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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는 외침과 수탈 ... 저항과 끈기로 삶을 개척, 다양성.포용성의 제주정신

 

2016년 들어 세계를 달군 소식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라는 브렉시트(Brexit)일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영국인들의 국수주의적인 몸부림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전성기의 로마와 지금의 미국은 다인종을 품은 나라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어쩌면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는 조건은 다양성을 품는 격에 달려 있다 하겠다.

 

제주는 지금 이주민과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귀농인과 귀촌인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도 이주해온다는 점은 제주의 산업뿐 아니라 문화적 가치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주민과 정착민의 사회적 갈등이 없진 않지만, 장구한 세월 제주도는 자의타의로 오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며 독특한 문화를 일구어 온 용광로 같은 저력의 땅이다.

 

탐라국의 개벽설화에 의하면 제주에는 애초에 사람이 살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혈에서 삼신인이 시차를 두고 솟아났다. 그들은 땅이 거칠어 주로 수렵을 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동쪽 바닷가에 오른 목함에는 벽랑국의 세 공주가 송아지·망아지·오곡 종자 등과 함께 실려 있었다.

 

삼신인은 성산읍 온평리 혼인지에서 세 공주와 혼인하여 상생의 방법인 사시복지(射矢卜地) 즉 활을 쏘아 영지를 정하고 나라를 일궜다. 단기보다 4년이 앞선 기원전 2337년은 탐라국의 출발로 여기는 해이다. 주몽과 금와왕 아들들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나라를 세운 고구려 등지의 타 왕국과 달리, 탐라는 투쟁이 아닌 상생의 방법으로 나라를 일으켰으며, 후손들에 의해 평화와 수눌음의 방법으로 공동체 문화를 일구어왔다.

 

고려가 원나라에,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에 조공외교를 했듯, 탐라는 백제에 조공외교를 펼치기도 했다. 백제사기에 있는 한 대목이다. ‘탐라가 조공하지 않으므로 백제 동성왕이 크게 노하여 동왕 20년(498년) 스스로 친정군 4천 기병을 거느리고 탐라정벌에 나서 무진주(광주)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탐라왕은 곧 사자를 보내어 사죄하고 신하가 되길 약정하니 동성왕이 회군하였다.…’

 

660년 백제 멸망 당시 탐라에 이주해온 백제의 귀족과 관리들은, 일본에 건너간 백제 왕족들과 백제부흥운동을 꾀하려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고구려 귀족 일부가 탐라에 이주하여 탐라의 교육문화의 기반조성에도 기여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고후·고청·고계 삼형제가 통일신라에 입조하여 조공을 받치고 성주·왕자·도내, 그리고 탐라라는 국명을 받아오기도 했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난 탐라는 삼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 연안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하였다고 전한다.

 

탐라는 또한 684년 고지창을 신라에 보내어 이두문을 배워오게 한 사실로 미루어 백제와 고구려 왕족과 유민들이 가져온 문물과 함께 높은 수준의 문화를 다져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섬이라는 환경 조건을 잘 활용한 탐라는 유구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동남아까지 교류의 폭을 넓히고 있었다. 탐라선인들이 뛰어난 배 건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012년(현종 3년) 탐라인이 고려정부에 대선(大船) 2척을 바쳤다는 기록과 1268년(원종 9년) 원나라가 탐라에 100척의 배를 건조할 것을 명했던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실현되지 않음이 다행인가, 몽고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탐라에 피난궁(避難宮)을 짓도록 했다는데, 그 궁이 13세기에 창건된 법화사라고도 전한다.

 

조선 태조는 즉위한 해인 1392년에 제주에 향교를 세우라고 명했다. 지방향교로서는 가장 일찍 설립된 예이다. 이어 1394년에는 제주향교에 교수관을 두고 10세 이상의 토관(土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고, 그들로 하여금 과거에 응시케 하여 때로는 중앙의 인재로 기용하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패망을 전후하여 귀족과 유민들이 제주에 왔듯, 여말선초 시대에도 고려왕조 유신들이 제주에 유배 와서는 섬 문물에 기여하였다. 제주의 4현으로 불리는 한천(청주 한씨 입도조)·김만희(김해 김씨 입도조)·이미(경주 이씨 입도조)·강영(신천 강씨 입도조) 이외에도 양천 허씨 입도조인 허손,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 등 적지 않은 유민들이 이때를 전후하여 입도, 대부분 훈학으로 학문의 씨를 뿌리며 제주문화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다양한 신들의 생성처럼 시차를 두고 모여든 사람들이 사용한 고유한 언어와 습관이 서로 동화하고 융합하며 혈통이 교류되어 제주도의 원주민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세계농업유산이기도 한 돌담문화와 제주어를 낳기도 했다.

 

흔히 제주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경계하는 투로 ‘육지거’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문관보다 무관 위주의 제주목사들에 의한 착취와 출륙금지령(1629-1823)에 의한 고립무원·절해고도의 처절한 삶과 4·3 진압 차 제주에 온 서북청년단들의 만행에서 육지거라는 경계심리가 비롯되었을 것이다.

 

제주는 오랜 세월 유형의 땅이었다. 조선 15대 임금인 광해군과 마지막 유배인인 이승훈 등 260여 명이 거친 바다를 건너 와서는 유배문화를 심은 땅이었다. 외침과 수탈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삶을 개척해온 저항과 끈기의 섬이었으며, 자연재해를 극복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슬픈 변방이었다.

 

고을라·양을라·부을라와 국제결혼한 3공주의 나라 벽랑국은 상상 속의 나라일 것이다. 탐라선인들이 만든 개벽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얼까? 치열한 다툼이 아닌 상생의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닐까. 다양한 사람들을 받아드리고 한데 어울리는 삶이 이어져 온 데는, 예로부터 내려온 제주정신이 있었을 것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다양성과 포용성이고, 삼다삼무의 정신을 이은 어울림과 수눌음의 정신이고, 바다로 세계로 나아가려는 도전정신이 제주정신이 아닐까 한다.(global인 세계화와 local인 지방화의 합성어인 glocal은 세방화라고도 말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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