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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스러운 바닷가에 드리운 4·3이란 재앙의 그물 ... 제주섬을 피로 물들인 역사

 

어린이날을 맞아 가족과 함께 ‘중문관광단지’를 찾았다. 먹을거리가 넘치는 시장처럼 그곳에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우리 가족은 이곳저곳을 들러본 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역사 흔적들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사람 구경이 더 신나는 모양이다.

 

이곳 백사장에는 파도에 밀려온 모래들이 쌓여진 모래동산이 있다. 그 모래 둔덕에서 어린이들이 신나게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숨을 헐떡이며 미끄럼 타느라 온몸이 모래로 뒤범벅이다. 꼬마들의 손발에 채어 모래가 밑으로 내려오고 또 내려오지만 모래 산의 높이는 낮아지지 않는다. 밤새 바다에서 밀려온 모래들이 사구(砂丘)를 다시 빚어놓기 때문이다.

 

이곳 백사장 입구에는 일본군이 포를 숨겼던 곳으로 알려진 해안 동굴이 하나 있다. 이러한 인공동굴들은 4·3이 일어나기 4, 5년 전에 일제가 제주선인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뚫어놓은 것이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데 동굴 공사에 강제로 동원된 섬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노역의 늪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 는 처절한 모습을 부질없이 상상해 본다.

 

패전을 예감한 일제는 일본 본토가 아닌 제주도를 대미(對美) 결전의 마지막 항전지로 삼는다. 1945년 초부터 관동군을 비롯해 7만 가량의 일본군을 일본과 만주 등지에서 제주도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미군은 일본 전투기와 접전하기 위해 제주 해안에 상당량의 폭탄을 퍼부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좀 더 지속됐다면 제주섬은 전쟁터로 변하여 불바다가 될 뻔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패전 후 그들이 버리고 간 무기들이 4·3에 다시 사용된 악연(惡緣)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제주도에는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다해서 ‘4·3 폭동’ 또는 ‘4·3 사건’이라 불리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최근에는 ‘4·3 항쟁’으로도 불린다. 해방 정국에서의 좌익과 우익에 의한 이념적 대립에서 빚어진 이 사건을 나는 ‘4·3’이라 적는다.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명칭마저 정립이 안 된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마치 망각의 심연에서 억지 잠을 자다 깬 어정쩡한 모습으로 ‘4·3’은 우리 앞에 서있다.

 

어느 시인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제주섬 사람들에게 4월은 잔인함을 넘어 죽음의 달이었다. 제주섬 전체가 골고다의 언덕이었다. 밤에는 ‘산사람’, 낮에는 ‘검둥개’가 나타나 주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토벌대를 지칭하는 ‘노랑개, 검둥개’나 산사람 모두가 제주선인들에게는 저승사자였다.

 

초토화 작전과 함께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바닷가 마을로 소개(疏開)되는 과정에서 95% 이상의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고, 80개가 넘는 마을들이 사라졌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더러는 해안가 동네로, 더러는 산 쪽으로 피신해 동굴 속에서 또는 숲 속에서 나날을 지내기도 했다. 동굴 안에 갇힌 이들은 쏘아대는 총탄에 죽거나 연기에 질식해 처참하게 죽음을 맞기도 했으리라.

 

제주인구가 25만 안팎이던 시절, 엄청난 사람들이 주검이 되어 제주섬을 피로 물들였던 뼈아픈 역사! 적게는 2만, 많게는 7만, 제시하는 곳에 따라 사망자 수도 크게 다르다.

 

삼다삼무의 섬에서 이토록 희생된 영혼이 많음에 대한 놀라움으로 우리의 속담을 떠올린다. 빈대 몇 마리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운 건 아닐까 하고.

 

모래동산에 올라 신나게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덧없는 공상에 빠졌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파도가 밀려오고 갈매기 나르는 평화스러운 바닷가였을 것이다.

 

바다를 의지하며 살던 순박한 사람들은 ‘테우’라는 통나무배와 투박한 어구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낚으며 살고 있었을 즈음, 4·3이란 재앙의 그물이 그들을 덮친 것이다.

 

여러 백사장에서, 구릉진 밭에서, 마을 공터에서 왜 죽어야 하는 지도 모른 채 비명에 간 영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목숨 만 살려주십서, 난 아무 것도 모릅네다. 살젠허난 여기도 숨고 저기도 숨은 죄밖에 어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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