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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1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몽골(Mongolia)은 중국이 아니다. 현 중국 내에 몽골족이 소수민족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지만 역시 몽골은 독립국이며 세계사에 동방의 금자탑을 세웠던 위대한 민족의 나라다. 그렇기에 칭기즈칸을 여기 ‘중국, 중국인’에 게재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역사의 중심인물들을 여기에서 논의하는 것은 그들이 ‘원(元)’ 왕조를 세웠고 중국역사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사에서 ‘원’이 없으면 단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후에 소개하는 인물들은 몽골의 위대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칭기즈칸(GenghisKhan, 成吉思汗, 1161~1227)은 몽골의 보르지기드(Borjigid, 孛兒只斤) 씨에 속한 예수게이 바아투르(Yesügei Baγatur, 也速該)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몽골(蒙古)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원(元)의 시조(재위 1206~1227)로 추숭되었다. 이름은 테무친(Temüjin, 鐵木眞), 칭기즈칸은 호이다.

 

1188년 몽골의 부족장이 돼 몽골을 통일하였다. 1206년에 오논 강변에서 쿠릴타이(khuriltai)를 열어 아홉 개의 백기를 세우고 몽골의 대칸(카간, qaγan, Kağan)에 즉위해 칭기즈칸의 존호를 받았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금(金), 서하(西夏)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를 평정하였으며 유럽 동부와 이란 북부 등을 점령해 세 아들〔차가타이(Chaghatai), 오고타이(Ogotai), 툴루이(Tului). 장남 주치(Juchi)는 서방 원정 이전에 사망〕에게 분봉하였다. 1226년에 재차 서하를 공격했으며 1227년에 서하가 항복하기 직전 육반산(六盤山)에서 병사하였다.

 

쿠릴타이가 소집돼 그의 셋째아들 오고타이가 카간(qaγan, 몽골어로 일국의 군주인 칸〔Khan〕의 뜻)을 승계하였다. 손자인 쿠빌라이(Khubilai)에 의하여 원 왕조가 성립된 뒤 태조로 추존되었다.

 

그 후 칭기즈칸 일족은 ‘황금 씨족’으로 일컬어 졌고 ‘칸’의 칭호는 그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몽골은 칭기즈칸에 의하여 세계사의 전면에 나섰으며 그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칭기즈칸은 몽골의 아들로 세상에 등장, 세계를 변화시킨 주역이다.

 

현재 알려진 칭기즈칸의 능묘는 내몽고 오르도스(Ordos) 고원 이진호러 기(EjinHoro Banner) 알탄시러(Altan Xire, 阿勒腾席热)진 동남방 15킬로미터에 있는 간더얼(Gandeer, 甘德尔) 어버(oboγa, 敖包)에 있다. 점지 면적은 5만5000평방미터에 달한다.

 

푸른 풀이 요처럼 깔려 있고 갖가지 꽃들이 비단처럼 아름답게 펼쳐져있다. 몽골의 게르(Ger, 파오) 형식의 대전이 높이 솟아있어 웅위를 자랑하고 기품이 넘친다. 그야말로 시의 정취와 그림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칭기즈칸과 그의 세 명의 황후, 두 명의 친동생, 넷째아들 툴루이(拖雷)와 부인의 영구가 그곳에 놓여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칭기즈칸의 능묘는 다른 여타 왕조의 제왕들의 능침과는 다르다. 진짜 황릉이 아니다. 가짜다. 칭기즈칸의 능묘뿐만 아니라 원 왕조의 모든 황제의 황릉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능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하는 문제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특히 칭기즈칸의 능묘가 있다고 전해오는 구체적인 지역은 네 가지 설이 존재하기까지 한다. 하나는 위에서 얘기한 내몽고에 있다고 하는 것이고, 둘째는 영하(寧夏) 경내에 있는 육반산에 있다하기도 하고, 셋째는 위구르(Uighur, 新疆) 북부 아러타이(Aletai, 阿勒泰)산에 있다하기도 하며, 넷째는 몽골 옛 경내의 컨트(Kent, 肯特)산 남쪽 캐룰렌(Kerulen) 강 북쪽에 있다하기도 한다. 심지어 칭기즈칸의 능묘가 중국내 장가구(張家口)에 있다하기도 한다.

 

이처럼 700여 년 동안 칭기즈칸의 능묘를 찾지 못한 중요한 이유는 원 왕조 황실이 실행한 밀장(密葬)제도에 있다. 제왕들을 매장한 지점에 아무런 표지도 없고 장소를 공표하지도 않았으며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서정(西征)을 나서기 전에 몽골 대군은 오르도스의 아름다운 초원에서 잠시 쉬었다고 전해온다. 칭기즈칸이 사방을 둘러보니 일망무제의 초원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멀리 하늘가에 알록달록한 빛깔의 노을이 비쳐오고. 가까운 데에서는 많은 군마와 커다란 게르(Ger)가 기세등등하게 에워싸 있고. 군마들은 귓전에서 울부짖고 새들은 흥겹다는 듯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는가. 초원의 봄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평온하면서도 미려하기 이를 데 없는 풍광이었다.

 

칭기즈칸은 일생을 정벌전쟁에서 보냈다. 이처럼 사람을 매혹시키는 풍경을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도취해 있다가 별안간 자신의 후사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없이 골몰하였다. 그러다가 찬탄에 겨운 듯이 말을 내뱉었다.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으라!”

 

몽골 대군이 서정을 떠난 이듬해, 즉 1227년 7월에 칭기즈칸은 육반산 남쪽 기슭〔현 감숙(甘肅) 청수(淸水)〕에서 65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생전의 바람대로 그의 육신을 천리 먼 그곳까지 보내어 안장했다고 한다. 이 또한 그저 전해오는 말이다.

 

13세기, 몽골인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매장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징은 중원의 한족하고는 많이 달랐다. 중원의 한족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오랫동안 상례에 매달렸지만 몽골인은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몽골인은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고정된 거주지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의 생활 방식은 비교적 간단하였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장(喪葬) 의식도 간단하였다. 매장할 때 몽골인은 사자를 생전에 썼던 막사 중앙에 앉히고 육유(肉乳)탁자 위에 놓은 다음 마지막으로 말을 부장품으로 삼아 흙을 파고 묻었다. 의도는 간단하다. 죽은 자가 다른 세상에서 생활할 때 장막에서 살고 말을 타며 육유를 마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 왕조를 건국한 후 몽골인은 대대적으로 중원으로 들어갔다. 이후 점차 한족 풍속과 융화되면서 서서히 목관을 이용해 매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한 목관은 한족과는 달랐다. 사자를 염한 후 두 개의 널을 합치고 나중에 원목 형태로 만들어 쇠못으로 못질해 합했다. 이러한 관을 원나라 때에는 ‘몽고관(蒙古棺)’이라 불렀다.

 

대도(大都)에는 전문적으로 몽고관만을 만드는 점포가 있었다. 몽골인이 중원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이 예전처럼 간결하고 소박함을 잃지 않았다. 수의도 평상시에 입던 의복을 사용하였다. 매장할 때 일반적으로 비밀스럽게 진행하였다. 매장 후 봉분도 쌓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도 않았으며 묘지도 새기지 않았다. 죽은 자의 친속도 상장 의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일반 몽골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황제를 포함한 몽골 귀족 모두 사후에 땅을 깊이 파 매장하고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 섭자기(葉子奇)는 『초목자(草木子)』에서 원 왕조 황제의 사후에 관과 곽을 사용하지도 않고 부장품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지 “널 두 편으로 그 가운데 구멍을 뚫어 사람모양 크기로 합하여 관을 삼고 유체를 가운데에 안치하였다.” 그러고서는 흙을 깊게 판 후 매장하고 봉분을 만들지 않았다. “매장이 끝나면 말들을 몰아 밟게 하면서 평평하게 만들었다. 낙타를 죽여서 그 위에 놓고 천기로 하여 지키게 하였다. 해가 바뀌어 풀이 돋아나면 게르를 걷고 흩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면 평평하게 돼 아는 사람이 없게 만들었다. 제사를 지내고 싶을 때에는 죽인 낙타의 어미를 앞세워 길을 찾게 하면 울음소리를 내며 왔다 갔다 하는 곳이 매장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몽골 제왕이 죽으면 매장하고 나서 흔적을 없애고 봉분을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해오는 바는 다음과 같다 : 칭기즈칸 사후 휘하 신하들이 칸의 유명에 따라 부고를 내거나 상례를 치르지도 않고 비밀스럽게 영구를 막북으로 옮겼다. 비밀스레 황제의 관을 묘지로 옮긴 후 땅을 깊게 파 안치하였다. 말들을 풀어 땅을 밟게 하면서 평평하게 다졌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영대도 비각도 만들지 않았고 묘소로 가는 길도 만들지 않았으며 담도 쌓지 않았다. 석인, 석수도 세우지 않았다. 영구를 어디로 옮겼는지 알려지지 않도록 영구를 호송한 군인들은 운구 도중에 만난 사람과 짐승을 모두 죽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몽골 종친과 후비, 친속, 신료들은 융성한 애도의식을 거행하였다. 조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어떤 부락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3개월이 지난 후에도 계속해 문상이 이어졌다.

 

이렇게 칭기즈칸이나 원나라 황제 모두 몽골의 전통 장례 풍습을 유지하였다. 죽은 자를 비밀스레 장례하는 몽골의 풍습에 따라 칭기즈칸과 여타 원 왕조 황제의 왕릉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칭기즈칸과 원대 황제의 황릉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칭기즈칸과 원대 역대 황제는 같은 장지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황제의 장례도 대체적으로 같았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사집(史集)』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몽케(Möngke, 蒙哥, 원 헌종)가 사천에서 송나라와의 전투 중에 죽자 그의 아들 아수다이(Asuday, 阿速歹)가 직접 부친의 영구를 오르도(Ordo, 막북의 본영 궁전)까지 운송하였다.

 

그리고 몽케를 위하여 도처를 돌며 애도하였다. 첫째 날은 홀도태(忽都台) 황후(哈敦)의 오르도, 둘째 날은 타루(拖累) 황후의 오르도, 셋째 날은 몽케와 함께 출정했던 출비(出卑) 황후의 오르도, 넷째 날은 치사(乞撒) 황후의 오르도에서 애도하였다.

 

매일 영구를 각기 다른 오르도에 마련된 식장에 모시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울음으로 애도를 표하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몽케를 ‘부루한 할둔(Burkhan Khaldun)’이라 불리는 칭기즈칸과 툴루이가 묻혔다는 능침 옆에 안장했다고 한다.

 

 

칭기즈칸과 원 황제의 입관과 부장품이 적은 것도 능묘가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라고 추론한다. 원대 제후의 부장품도 검소하고 소박하다. 중원의 황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호나 귀족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들이 염할 때의 의복류도 담비 모피, 가죽 모자, 장화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다. 입관 후 검붉은 색 도료로 칠하고 밖은 세 줄의 황금 테를 두른 후 관 밖에는 겉널을 쓰지 않았다. 부장품은 '금 주전자 둘, 잔 하나, 사발 접시 숟가락 각 하나'에 불과하였다. 원 왕조의 황제의 장례 풍속은 중국 황실 장례 역사상 가장 검소하고 소박했다고 할 것이다.

 

원대 제왕들은 ‘일대천교(一代天驕)’〔최초 하늘의 총아, 칭기즈칸을 말한다. 천교(天驕)는 사전적 의미로 총아를 말한다. 원래는 한(漢)대 사람들이 흉노족의 선우(單于)를 일컫던 말이었다. 나중에 천하를 횡횡했던 칭기즈칸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로부터 대대손손 모든 제왕이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남길 원했다.

 

물론 중원 왕조의 황릉이 도굴꾼에게 훼손되는 불행을 보면서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 검소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검소함이 도드라졌고 아직까지도 도굴되지 않게 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초원을 내달리던 영웅들이 검소함이 투영된 형태라 보는 것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칭기즈칸의 부장품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페르시아 역사학자 주바이니(Juvayni)는 『세계 정복자의 역사(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에서 '아미르(Amir, 원대의 중앙아시아 직함, 시위)와 노얀(Noyan, 수령) 가족의 여인 40명을 선발해 구슬과 옥, 장신구, 미포 장식으로 치장하고 귀한 의복을 입힌 후 말에 각각 태우고 칭기즈칸의 영혼과 함께하려고 출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에 순장했다는 뜻이다. 말과 함께 여인까지도 순장시키는 현상이 존재했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럴까?

 

후세의 사람들은 칭기즈칸과 그의 자손이 어디에 안장됐는지 알 길이 없게 되자 자신들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상상 속의 황릉을 조성하고 세계의 영웅이라 불리는 칭기즈칸을 회고하고 추억하고 있다. 아직까지 칭기즈칸이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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