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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1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원(元) 태종(1186~1241) 오고타이(Ogotai, 우구데이〔Ögedei〕, 窩濶台), 칭기즈칸의 셋째아들이다. 내성적이었고 깊은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포용력으로 처세하면서 부친에 의해 칸(Khan)에 선택되었다.

 

칸에 앉은 후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중용하고 금(金)을 멸망시켰다. 1236년에 바투(Batu, 拔都)를 파견해 서정하면서 세력이 유럽 중부에까지 이르렀다. 경제 정책을 중시해 ‘한족 법제’를 받아들이면서 몽골 제국을 더욱 강성하고 부강하게 만들었다.

 

원 태조 테무친은 몽골 보르지긴(Borjigin, 孛兒只斤) 귀족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곤궁한 삶을 살았으나 발분해 여러 영웅을 결집하고 권토중래하였다. 1200년에서 1206년까지 메르키트(Merkid), 타타르(Tatar), 케레이트(Kereit), 나이만(Naiman)을 차례로 정복하고 몽골 주요 부족을 통일한다.

 

개희(開禧) 2년 몽골 각 부족은 오논(Onon) 강변에서 ‘쿠릴타이(Khuriltai)’를 개최해 대칸에 오르고 칭기즈칸(成吉思汗,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이라 칭하면서 몽골 칸의 제국을 건립한다. 군사, 정치, 법률 등의 제도를 제정하고 몽골 문자를 창제하면서 몽골 사회 경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218년에서 1223년 사이에 제1차 서정하면서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 초원을 점령해 카라코룸(Karakorum, 和林, 현 몽골 울란바토르 서남쪽)을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통괄하는 대한국을 건립하였다.

 

1205년에서 1209년까지, 3차에 걸쳐 서하(西夏)로 진군해 서하로 하여금 진공하고 항복을 받아줄 것을 구걸할 지경에 이를 때까지 핍박하였다. 가정(嘉定) 4년에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해 8년에 금 왕조 중도(中都, 현 북경)를 점령하였다. 일생 동안 “40개 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풍운아요 일대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칭기즈칸과 첫째 부인 보르테(Börte) 사이에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 주치(Juchi, 朮赤), 둘째 차가타이(Chaghatai, 察合台), 셋째 오고타이(Ogotai, 窩濶台), 넷째 툴루이(Tului, 拖雷)가 그들이다.

 

칭기즈칸은 주치로 하여금 사냥을 관장케 하고 차가타이는 법령을, 오고타이는 조정 정사를, 툴루이에게는 군대를 통솔케 하였다. 그들 모두 몽골 제국을 건국하는 데에 공을 세워 제국의 기둥으로 우뚝 섰다.

 

 

몽골은 예로부터 막내아들〔幼子〕이 우선 계승권을 갖는 풍습이 있었다. 첫째 부인 소생인 막내아들을 몽골어로 ‘옷치긴(otchigin)’이라 불렸으며 “부뚜막(火爐)의 수호자(守護者)라는 뜻”으로 그의 형들이 분가한 뒤에도 막내아들은 끝까지 부모와 생활하며 천막을 지켰기 때문에 생겨난 풍속이라 한다. 결국 가업을 지키는 아들인 셈이다. 그의 형들은 외지로 진출하여 다른 ‘가마목’을 세워야했던 것이고.

 

칭기즈칸은 자신의 막내아들 툴루이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을 접고 몽골의 옛 습속을 타파해 셋째아들 오고타이를 저군(儲君, 황태자)으로 삼았다. 역사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칭기즈칸이 선택한 그 계승자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결국 칭기즈칸의 안목이 탁월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칭기즈칸은 어째서 오고타이를 저군으로 선택했을까?

 

칭기즈칸은 비록 정복전쟁을 통하여 몽골제국의 기초를 닦았지만,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원대하게 생각하였던 그로써는 군사만으로는 제국을 튼튼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계승자는 군사 전문가 자질도 갖춰야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든 강산을 공고히 하고 영원히 지킬 수 있는 정치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건설한 대제국의 영광을 이어 발전시킬 수 있으며 천하를 보존해 자자손손 전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칭기즈칸은 아들들의 재능과 장점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결국 오고타이가 다른 아들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오고타이는 의지가 강하고 충후하며 어짊을 따르고 견실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보았다. 나라를 잘 다스려 능히 안정시킬 수 있는 중임을 맡길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마음속에 이미 결정돼 있었다.

 

그래서 가정(嘉定) 12년, 칭기즈칸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정을 나서기 전에 자신의 아들들과 친동생들을 소집해 오고타이를 칸의 계승자로 삼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러고서 칭기즈칸은 네 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대군을 네 갈레로 나눠 화레즘 샤(Khwarezm Shah) 왕조 정벌에 나섰다. 길고 긴 6년 전쟁을 끝내고 마침내 개선한다.

 

보경(寶慶) 원년(1225)에 칭기즈칸은 서하 왕이 서약을 어겼다고 질책하고 재차 대군을 동원해 토벌에 나섰다. 이듬해 6월, 서하 왕 이견(李睍)이 군대를 파견해 응전했으나 결국 대패하면서 투항하였다. 칭기즈칸은 군대를 거느리고 남하하기 시작한다. 황하를 건너 칼끝을 중원을 넘어 중국 전체로 향했다. 적석주(積石州)를 지나 경조(京兆, 현 서안)를 공략하였다.

 

 

보경 3년 7월, 칭기즈칸은 중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했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죽음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들을 불러 모았다. 형제간에 화목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리고 거듭 부탁하였다. “만약 너희가 안락하고 자유롭게 이러한 삶을 영유코자 하고, 군권과 재부의 결실을 향유코자 한다면 내가 얼마 전에 너희에게 누누이 얘기해 잘 알고 있는 사실, 오고타이가 칸의 자리에 앉도록 하여야한다. 나는 제국의 열쇠를 영용(英勇)하고 재지(才智)를 갖춘 오고타이 손에 넘겨줄 것이다.”

 

봉건제도에 따르면 황제가 붕어하면 그가 정한 계승자가 당연히 등극하여야한다. 그러나 몽골에는 제왕 회의인 ‘쿠릴타이’ 전통이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오고타이는 부친의 유명을 받아 곧바로 즉위할 수 없었다. 여전히 쿠릴타이 최후의 결정을 기다려야하였다. 칸의 자리가 비어있는 2년 동안 툴루이가 국정을 담당하였다.

 

쿠릴타이가 열리고 새로운 칸을 결정할 때 40일 동안 쟁론이 벌어졌다. 그때 주치는 이미 죽었고 차가타이는 전심전력을 다해 오고타이를 밀었다. 궁정 내의 소수만이 툴루이가 즉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중에 툴루이도 어찌할 수 없이 오고타이를 옹립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재삼재사 권하고 나서야 오고타이는 칸의 자리에 앉겠노라고 대답한다. 그가 원 왕조가 건립된 후 추숭된 태종(太宗)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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