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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1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아릭부케(Ariq Böke, 阿里不哥, ?~1266),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Khubilai, 忽必烈)의 동생, 툴루이의 일곱째아들이다. 그의 형 몽케(4대, 헌종憲宗)가 죽은 후 카라코룸에서 먼저 비밀리에 즉위하면 쿠빌라이가 개평(開平)에서 즉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랐다. 쿠빌라이와 막북에서 전쟁을 치렀으나 이듬해 대패하였다. 서쪽으로 옮겨 차가타이의 힘을 빌리려 했으나 실패한 후 지원(至元) 원년(1264) 7월에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했으며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개경(開慶) 원년(1259), 원 헌종(憲宗) 몽케가 남하해 송(宋)나라를 토벌하는 전쟁 중에 합주(合州)에서 죽는다. 생전에 저군(儲君, 황태자)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칸의 자리를 놓고 저군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자는 몽케의 아들들 이외에 몽케의 동생들이 있었다.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아리크부카〕가 그들이다.

 

쿠빌라이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이 있었고 막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워 송나라 정벌에 앞장서고 있던 원수였다. 아릭부케는 카라코룸에 있었다. 황후와 몽케의 여러 아들의 옹호를 받고 있었다. 이른바 몽케의 심복이었다.

 

두 형제는 막상막하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칸의 자리를 노린지도 오래였다. 두 형제 사이 골육상잔의 내전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불붙은 화약이나 다름없었다.

 

쿠빌라이가 몽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남벌(南伐)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공도 없이 철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부인 차브이(察必)는 아릭부케가 병사들을 조련하면서 칸의 자리를 도모하고 있다고 밀보하였다. 쿠빌라이에게 몽골 내부의 형세가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방심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막료 학경(郝經)이 쿠빌라이에게 권했다. “지금 송나라는 걱정할 게 못됩니다. 아릭부케를 대처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쿠빌라이께서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계십니다만, 아릭부케가 칸을 계승했다고 정식으로 선포하고 칸의 자리에 앉는다면 우리가 어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사직을 생각하시어 송의 군대와 강화하십시오. 그런 후에 경기병을 이끌고 연도(燕都)로 곧바로 내달려 그들의 음모가 달성될 수 없도록 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군대를 보내어 선제의 영구 행렬을 막아서 몽케의 옥새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자를 파견해 아릭부케, 모케 등 제왕을 카라코룸에 모이도록 하고 아들이신 친킴(Jingim, 眞金)에게 연경(燕京)을 굳건히 지키도록 하고…… 이런 진세를 확실하게 다진다면 칸의 자리는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때마침 남송 재상 가사도(賈似道)가 화친을 청해온 터라 쿠빌라이는 즉시 동의하고 대군을 강북에 머물도록 조치한 후 자신은 친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타리치(脫里赤)가 아릭부케의 명을 받아 군세를 확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급히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친신 염희헌(廉希憲)을 개평(開平)으로 급파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타가차르(塔察兒)로 하여금 쿠빌라이를 옹립하도록 하였다. 중통(中統) 원년(1260) 3월에 쿠빌라이는 개평에서 여러 왕들을 소집한 후 칸의 자리에 올랐다.

 

아릭부케도 카라코룸에서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황후와 지위가 높은 소수의 제왕들이 자신을 옹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이 선제의 유조를 받들고 있다고 알리고 4월에 칸의 자리를 계승했다고 선포하였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이 나라에는 임금이 둘일 수는 없는 법이다. 두 형제가 칼을 갈고 있었으니 이제는 무력으로 상대방을 꺾어야만 하였다.

 

4월 사이, 쌍방은 진(秦), 촉(蜀), 롱(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쿠빌라이는 주도면밀했으며 과감하게 움직였다. 염희헌, 상정(商挺)을 섬서, 사천 선무사(宣撫使)로 삼아 곧바로 전투를 치르게 하였다. 유태평(劉太平), 곽로회(霍魯懷), 미리훠저(密里火者) 등 상대방의 장수들을 주살하였다.

 

 

감주(甘州)에서는 동산단(東山丹), 그리고 합단(合丹), 팔춘(八春), 왕양신(汪良臣) 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모아 아란꾸얼(阿蘭谷兒), 훈두하이(渾都海)를 격파하게 해 아릭부케 세력을 분쇄시킴으로써 서부전선의 우세를 지켰다.

 

그해 가을, 쿠빌라이는 섬(陝, 섬서), 천(川, 사천)의 재화를 충당해 승기를 잡고 추격하면서 곧바로 카라코룸으로 향했다. 아릭부케는 식량이 부족해 졌으나 공급할 길을 찾지 못했다. 스스로 쿠빌라이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성을 버리고 서북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알루구(Alghu, 阿鲁忽)에게 국사를 맡기고 군량을 모으라고 당부한 후 거짓으로 쿠빌라이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휴식한 후 기회를 엿보려고 하였다.

 

쿠빌라이는 종왕(宗王) 에순게(Yesungge, 移相哥)를 파견해 변경을 수비토록 하고 자신은 개평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가을 아릭부케가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하며 갑자기 습격을 감행해 에순게를 퇴패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쿠빌라이를 향해 진격하였다. 쿠빌라이는 급히 군대를 소집해 반격에 나섰다.

 

두 세력은 현 수흐바타르 아이막(Sukhbaatar aimag) 남부에서 생사를 건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아릭부케가 대패해 북쪽으로 도주하고 그의 부장들은 쿠빌라이에게 투항하였다.

 

그때 알루구(Alghu)가 또다시 아릭부케를 배반한다. 차카타이(Chagatai, 察合台)에서 징집한 대량의 가축, 군비,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노기등등한 아릭부케는 군대를 거느리고 알루구와 전투를 벌이면서 그의 병사와 백성을 도살하는 참극을 벌인다. 잔혹한 수단을 일삼으니 민심이 이반되었다. 그의 부장들도 흉포한 행위를 보면서 하나하나 아릭부케를 떠났다.

 

결국 알루구는 쿠빌라이를 옹호하게 되고 처음에 아릭부케를 옹호하였던 제왕도 계속해 쿠빌라이에게 투항하였다. 그렇게 아릭부케는 고립돼 사면초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지원(至元) 원년(1264) 7월, 어쩔 수 없이 쿠빌라이에게 투항하게 되면서 장장 4년에 걸친 몽골 내전이 종식된다.

 

아릭부케는 어떻게 됐을까? 쿠빌라이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을 떠올렸다. 일대의 영주라 불리는 이세민은 ‘현무문 사변’을 일으켜 형과 아우를 죽임으로써 빛을 바래게 했지 않았던가. 그리고 칭기즈칸이 형제끼리 화목하고 단결하라 하지 않았던가.

 

몽골의 옛 교훈에 따르면 적이었기에 죽여야 마땅하지만 중원 문화에 ‘인서(仁恕)’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쿠빌라이는 ‘어진’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아릭부케는 양 날개가 꺾여 다시는 날 수 없는 처지가 아니던가. 게다가 정병 수만을 거느리고 있는 몽골 제왕들이 쿠빌라이를 주시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동생을 과연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보고 있지 않는가.

 

아릭부케를 죽이지 않으면 제왕들이 자신의 어짊을 받아들이고 반역하고자 하는 마음을 접을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중원을 통일하여야 하는 대업이 놓여있다. 몽골 내부의 안정이 우선이다. 그런 후에 온힘을 다해 남송을 토벌하자. 이게 상책 중의 상책이 아니더냐.

 

쿠빌라이는 아릭부케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래도 “죽을죄는 면할 수 있어도 살아서는 죄를 짊어져야 하는 법”, 아릭부케를 저택에 감금시켜 여생을 혼자 살도록 하였다.

 

이듬해 11월 쿠빌라이는 ‘대몽골’의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개칭하고 새로운 왕조의 영주로 중국 역사 무대에 오른다. 그가 원 세조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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