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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2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원 순제(順帝, 1320~1370), 원 명종(明宗)의 아들이다. 재위기간 동안 황공 관리들의 탐욕이 극에 달했고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아 살아갈 수 없게 된 백성이 끊임없이 봉기를 일으켰다. 지정(至正) 20년(1369)에 명나라 군대가 대도(大都, 북경)를 함락시키자 북방 응창(應昌)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2년 후에 죽었다.

 

중국 고대 황제들은 교대로 교차하였다. 현명한 군주도 있었고 포악한 군주도 있었으며 황당하기 그지없는 황제도 있었다. 각양각색, 별의별 황제가 다 있었다. 원 왕조 말기에 공예 제작에 심취한 황제가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원 순제 토곤 테무르(Toghon Temür, 妥懽帖睦爾)다.

 

원 순제는 명종의 장자로 어릴 적부터 교묘한 구상을 많이 하였다. 자신이 궁루(宮漏, 고대 시간을 제는 의기의 일종)를 설계해 제작하기도 하였다. 새로우면서도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궁루는 높이 약 6,7척, 길이는 높이의 절반, 여러 누호(漏壺)는 특별히 제작된 목궤에 숨겨져 있었다.

 

목궤에는 사방에 삼성전을 설치하였다. 목궤 허리에는 맵시 있는 자태의 옥녀를 새겼다. 손에는 시각을 알리는 산가지가 들려 있었고. 시간에 따라 움직이면서 물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 목궤 좌우에는 금갑을 두른 신을 세우고 한쪽에는 징을 매달았으며 한쪽에는 종을 매달았다. 야간에 두 신이 시간에 맞춰 징과 종을 울렸다. 거의 정확했다고 한다.

 

징과 종이 동시에 울릴 때면 옆에 만들어 논 사자와 봉황이 일제히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목궤에는 일월궁 비선(飛仙) 여섯을 궁전 앞에 세워뒀는데 자시와 오시가 되면 선녀들이 쌍쌍이 앞으로 나와 선교를 건너 삼성전에 도착한 후 오래지 않아 궁전으로 돌아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정말이라면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비록 문헌 기록이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다하더라도 원 순제가 만들었다는 궁루의 구조는 쉬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기록으로만 본다면 구조를 추론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그가 설계하고 제작한 궁루는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여러 가지 장치가 부착돼 있었으며 정교하기가 그지없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 순제는 또 선박 설계사였다. 1354년에 원 순제는 내원에 용선(龍船)을 건조하였다. 자신이 도면을 설계하고 공장에게 건조토록 하였다. 용선의 길이는 120척, 넓이 20척, 앞쪽에는 와렴붕, 회랑이 있는 난각(暖閣, 몸을 녹일 수 있게 했던 큰 방에 딸린 방)을, 뒤쪽에는 전루를 세웠다.

 

용과 전루에는 오색 금장을 하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선원 24명을 눈부시게 치장시킨 후 배에 태웠다. 원 순제는 자신이 만든 용주를 타고 후궁에서부터 전전 아래까지 놓여있던 해자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용주가 내달릴 때면 용머리, 눈, 입, 발톱, 꼬리가 각기 움직였다. 진짜 용이 물위를 노닐 듯하여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원 순제는 자랑하듯이 비빈들에게 “수나라 양제가 회생한다 한들 이러한 작품은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득의어린 말을 내뱉었다.

 

원 순제는 교묘한 구상을 하고 공예에 뛰어난 점 이외에 가무에도 능했다. 그는 『십육천마무(十六天魔舞)』를 창제해 불가 사상을 표현하였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보자. 궁녀 16명에게 삼성노(三聖奴), 묘락노(妙樂奴), 문수노(文殊奴) 등 천마녀(天魔女)로 분장시켜 땋은 머리를 하고 상아 불관을 쓰게 했으며 영락(瓔珞)을 몸에 두르고 홍색 금색의 치마를 입히고……손에는 도구를 들게 하였다.

 

이른바 ‘가불라완(Gabulawan, 噶布喇完)’이 그것이다. 금강령을 들고 음악에 맞추도록 하기도 하였다. 또 궁녀 11명으로 된 악대가 있었다. 용적(龍笛), 필률(觱篥), 소고, 비파, 호금, 향판 등의 악기를 연주토록 하였다. 『심육천마무』는 궁중에서 찬불할 때 공연하였다.

 

공예에 심취하고 가무에 정열을 쏟는다는 것은 뭐 그리 비난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다 그렇듯이 원 순제도 현명한 군주는 아니었다. 정사에 태만하고 주연에 빠져 헤어나질 못했다. 이전 왕조의 마지막 황제와 다름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고 햇살이 아름다울 때라면 무슨 상관이랴. 원 왕조의 궁궐도 아름다웠다. 버들가지가 하늘거렸고 온갖 꽃들이 만개하였다. 넋 놓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리고 황제임에랴. 그러나 왕조는 이미…….

 

순제 토곤 테무르는 궁궐 내에 시장을 열고 점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점포에는 구주사방의 맛있는 요리를 진열하였고 선염한 깃발을 꽂아 미풍 중에 하늘거리게 하였다. 궁중 요리사에게 풍성한 음식을 조리케 하여 여행객과 함께 누렸다. 보대(寶臺)를 세워 사방에서 진공한 진귀한 보물을 전시하였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골동품을 진열해 오가는 사람에게 감상토록 하였다. 전대미문의 시끌벅적, 궁내가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원 순제는 대대적으로 토목공사를 하였다. 낭비야 뭘 걱정하랴. 금원에 조원각(眺遠閣), 유연관(留連館), 만년궁(萬年宮)을 세웠고 용천정(龍泉井)을 새로 팠다. 마노석(瑪瑙石)으로 우물 가장자리를 만들었고 우화석(雨花石)으로 장식했으며 향단(香檀)으로 뚜껑을 만들었다. 이주(離朱)로 밧줄을 만들고 운모석(雲母石)으로 두레박을 만들었다. 이처럼 화려한 장식에 진귀한 보석으로 만든 우물은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원 순제는 또 수신 양생의 술(術)을 갈구하였다. 1353년에 하마(哈麻)와 토루 테무르(禿魯帖木兒) 등이 몰래 서천(西天)의 승(僧)을 원 순제에게 바쳤다. 이른바 ‘연접법(演揲法)’이라는 방중 운기 술을 가르쳤다. 또 다른 서천 승을 바쳐 그에게 밀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원 순제가 오랫동안 훈련했으나 효과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졌을 뿐이었다.

 

당시 불사의 약이라고 진헌한 사람이 있었는데 원 순제는 그를 불러다가 궁인들에게 말했다. “만약에 짐이 이런 약을 복용해 음식을 먹지 않더라도 배고프지 않고 능히 경도(瓊島) 신선의 산 사이에 노닐면서 신선들과 서로 화답한다면 짐은 천하를 한 줌의 흙처럼 그렇게 볼 수 있을 게 아니더냐.” 그러자 환관 양행(梁行)이 진언하였다. “폐하께서 입으신 게 신선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이까. 만약 지금처럼 이렇게 일생을 소요하실 수 있다면 극락의 즐거움인 셈입니다. 어찌 멀리 떨어져 묘연한 것들을 앙모할 필요가 있으리까?”

 

원 순제는 그때부터 자신을 옥신관(玉宸館) 패경화(佩瓊花) 제일동(第一洞) 연하소선(煙霞小仙)이라 칭하고 아현(阿玄)을 태소선비(太素仙妃)로, 일녕(一寧)을 태진선비(太眞仙妃)로 삼아 만세산(萬歲山)에 담을 높이 쌓고 신선이 머무는 천태(天台), 적성(赤城)처럼 만들고서는 자예성(紫霓城)이라 불렀다. 그리고 옥신관을 건축해 돌을 쌓아놓고 경화동이라 부르며 그곳에서 머물렀다.

 

간신 한두 명이 원 순제 면전에서 송덕가를 불렀다. “천하가 모두 태평해 황제가 원래 신선이시온데 ; 폐하께서는 아무 것도 않으셔도 무방한데 한 마음으로 신선이 되시려 하나이까?” 원 순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국가 정사는 듣지도 묻지도 않았다.

 

순제는 결코 태평성대의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공예에 심취하고 가무에 매달리고 신선을 구하고 불사약을 탐할 때 봉기는 도처에서 일어나 장강 남북을 내달리고 있었다. 군웅 중 주원장(朱元璋)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거한 세력을 멸하고 1367년에 군대를 세 갈레로 나눠 원 왕조의 수도인 대도로 진격한다.

 

주원장의 군대가 통주(通州)를 점령하였을 때 순제는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저 막북이 있음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칭기즈칸의 후예인 순제는 주원장과 생사를 건 전쟁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창졸지간에 비빈과 태자를 데리고 상도(上都)로 도망쳤다. 1368년에 명나라 대장 상우춘(常遇春)과 이문충(李文忠)이 상도를 에워싸자 원 순제는 또다시 북으로 도망쳤다.

 

용맹하고 위풍당당한 조상들이 말위에서 얻은 강산을 뒤로하고 눈물을 뿌리며 북으로 북으로 도망쳤다. 마음에 맺힌 것은 있었던 것일까? 이듬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뜬다.

 

공예와 가무를 사랑하고 방중술과 신선에 빠졌던 원나라 순제.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는 오대십국처럼 나약하였던 국가의 황제가 아닌 대원제국의 황제였고 강남지방에 웅크리고 앉아 희희낙락하였던 한족의 후예가 아니라 초원을 내달렸던 칭기즈칸의 후예였다. 누가 그를 그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 아연할 따름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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