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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2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송 태조 건덕(乾德) 2년 11월, 조광윤은 충무절도사 왕전빈(王全斌)에게 6만 병사를 이끌고 촉으로 진격하라 명했다. 동시에 공장(工匠)들에게 명해 변량(汴梁)에 촉의 군주 맹창이 살 주택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유조를 내린다. “행군하여 이르는 곳에서 민가를 불사르거나 백성을 쫓아내거나 분묘를 파내거나 뽕나무를 벌목해서는 결코 안 된다. 성과 마을을 함락한 후에 포로를 남살하거나 재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그때 변량에 큰 눈이 내렸다. 송태조는 강무당(講武堂)에서 검은 단비 옷을 입고 일을 보다 갑자기 좌우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입고도 춥다고 느끼는데 서정을 나간 장병들이 생각나는구려. 눈서리를 뒤집어 쓸 텐데 어찌 이보다 못하다 하겠소?”

 

즉시 의복을 벗어 태감에게 주면서 촉 지역으로 달려가 왕전빈 장군에게 전달케 하고 전군에게 두루 상을 내리지 못하여 유감이라 전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송나라 군대는 용기를 내어 진군하였다. 성도를 지키고 있는 촉나라 병사는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우리 부자는 따뜻한 옷과 풍족한 양식으로 병사들을 40년 양성했는데 적을 만나자마자 화살 한 촉 쏘지 못하는 구려!”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건덕(乾德) 3년 음력 정월 보름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사공평장사 이호(李昊)가 표를 써 맹창에게 스스로 성문을 나가 투항하라 상주하였다. 왕전빈이 출병한 날로 세면 66일 만에 후촉이 멸망한 것이다.

 

전촉 왕연이 후당에게 멸망당한 것보다도 빠르다. 두 번 다 표를 써서 올린 인물이 이호다. 그래서일까, 충성심을 갖고 있던 어떤 인물이 이호의 집 대문에 “대대로 항복하라는 표를 올린 이 씨 집안”이라 쓰기도 하였다.

 

푸른 버드나무가 낙엽을 휘날릴 때, 맹창, 화예부인과 이호 일행 33명은 변양으로 압송된다. 두견새들은 “가면 안 돼요, 가면 안 돼요!” 울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변량으로 압송된 후 맹창은 진국공(秦國公)에 봉해졌고 검교태사 겸 중서랑이 되었다. 송 태조 조광윤은 그처럼 맹창을 우대했지만 절세가인이라 귀가 닳도록 들었던 화예부인을 한 번 봐야 갈증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대전으로 초빙하면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것은 분명하였다.

 

계책을 세웠다. 맹창에게 상을 내리면서 그의 시종과 가속들 모두에게 상을 내리면 궁으로 들어와 감사를 표할 것이 아닌가. 당연히 화예부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고. 과연 그렇게 되었다. 감사를 표하는 그날 맹창의 모친 이부인 뒤로 화예부인이 따라 왔다.

 

태조는 특별히 주의해서 보았다. 그녀가 어전 앞으로 왔을 때에야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도취할밖에. 자세히 뜯어봤다. 형용할 수 없는 백만교태가 아닌가. 화예부인이 신첩이라 칭하며 황상의 만수무강하시라 고원할 때의 교태와 교음이란.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꾀꼬리 소리가 아니던가. 어떤 악기의 소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제야 태조는 정신을 차렸다. 양 눈을 부릅뜨고 화예부인을 훑었다. 하나도 빼뜨려서는 안 된다는 듯이. 화예부인도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태조를 흘깃 훔쳐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떨어뜨린 머리카락을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설 때의 추파는 넋을 잃게 만들었다. 태조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당연하고. 7일 후 맹창은 급병으로 죽는다. 나이 47세였다. 역사가들은 태조가 독살했다고 보기도 한다.

 

태조는 맹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5일 동안 입조하지 않고 소복을 입었다. 그리고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맹창이 죽자 맹창의 모친은 울지 않았다. 술을 들어 땅에 뿌리며 제를 지내면서 말했다. “너는 사직을 보존하지 못했으면서도 죽음으로 순직해 명예를 지키지 않고 목숨을 아끼었구나. 나도 네가 구차하게 삶을 갈구하는 것을 보고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지금 네가 죽었으니 내가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수일을 절식하고 죽었다.

 

맹창은 낙양(洛陽)에서 장례를 치루고 그의 가족은 변경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럼, 화예부인은? 술 몇 잔을 마신 화예부인은 태조의 손에 이끌려 침궁으로 들어갔다. 얼마 없어 귀비에 봉해졌고. 그때부터 태조는 매일 조정에서 물러나면 화예부인을 찾아가 술 마시며 읊조리는 시가를 듣는 게 낙이 되었다. 물론 화예부인은 여전히 맹창을 잊지 못하여 그림을 그렸다하기도 하지만…….

 

화예부인은 나중에 송나라 권력투쟁의 와중에 휩쓸렸다. 태자를 세우는 문제에 있어 태조의 동생 광의(光義)의 이익과 상충되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을 때 나중에 태종이 되는 조광의가 쏜 화살을 맞고 죽는다. 태조는 그 뜻을 알아차렸으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애도하는 도중 군기처에서 급박한 전장의 소식이 들려왔다. 웅심이 발동해 기병하고 출정하면서도…….

 

 

그렇다면 진짜 화예부인은 조광의에게 죽임을 당한 것일까? 화예부인의 죽음에 대하여 사서는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는 조광의에게 죽었다는 것이다. 북송 중기 소박(邵博)의 『문견근록聞見近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조광윤이 친왕과 후궁을 데리고 후원에서 활쏘기 경연을 벌였다. 조광윤이 조광의에게 술을 권했다. 조광의가 대답하기를 “만약 화예부인이 나를 위하여 꽃을 꺾어오면 마시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조광윤이 화예부인에게 꽃을 꺾어 오라 보내자 조광의가 활시위를 당겨 쏘아 죽였다. 그리고는 조광윤의 다리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막 천하를 얻었습니다. 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중요할 때입니다. 부디 주색을 멀리하소서!” 조광윤은 불쾌했지만 동생을 책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송 말년의 『철위산총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돼있다. 화예부인이 송나라에 귀속된 후 조광의도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돌아올 리 만무하였다. 어느 날 후원에서 사냥할 때 화예부인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조광의는 “활시위를 조절하고 짐승을 맞추려 하다가 갑자기 화살을 돌려 화예를 쏘아 맞췄다. 활 맞고 죽었다.”

 

조광의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죽였는가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하나는, 조광의가 인품이 높고 절개가 곧아 사직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 일체를 고려치 않고 그 형의 옆에 있는 ‘화근’을 제거했다고 본다. 둘째는, 조광의가 흠모를 넘어 질투가 심하여 내가 얻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얻지 못하게 만들려고 일세의 미녀를 없앴다고 본다. 셋째는, 화예부인이 황위 계승자 문제에 있어 조광의에 불리했다는 설이다. 조광의가 원한을 품고 보복했다는 것이고.

 

그런데 첫째 이유는 근본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조광의 자신이 호색한이었다. 그는 나중에 남당 이욱의 소주후(小周后)에게 탐욕을 부려 강제로 빼앗은 것이 전형적이 예이다.

 

두 번째 이유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조광의가 화예부인의 미색에 침을 흘린 것은 맞지만 결코 미인 하나 때문에 조광윤에게 죄를 지어 자신의 황위 계승권에 악영향을 미치도록 할 인물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세 번째 이유가 가장 이치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황위를 계승하기 이전에 조광의는 표면적으로 가장 겸손하였고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고분고분 조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내도 최소의 기준이 있었다. 바로 그의 계승권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됐다. 영향을 준다면 보이는 족족 가차 없이 죽여 없앴다. 무자비하기 그지없었다. 최후에는 ‘촉영부성(燭影斧聲)’이란 천고의 미스터리를 남기지 않았던가?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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