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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 서한 광천(廣川, 하북 경현〔景縣〕 광천진 대동고장촌〔大董故莊村〕)사람으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 유심주의철학가, 금문경학자이다. 한 경제(景帝) 때 박사가 돼 『공양춘추(公羊春秋)』를 강술하였다. 한 무제(武帝) 원광(元光) 원년(기원전 134), 무제가 조서를 내려 치국방략을 널리 구하자 동중서는 유명한 「거현량대책(擧賢良大策)」에서 계통적으로 “천인감응(天人感應)”, “대일통(大一统)” 학설을 주창하면서 유학을 중국의 정통사상으로 만들어 이천 년 동안 영향을 끼쳤다. 그 학설은 유가 종법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이 섞여있다. 신권(神權), 군권(君權), 부권(父權), 부권(夫權)을 함께 엮어 제제신학(帝制神學) 체계를 이루었다.

 

중국 학생들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동중서(董仲舒)가 백가를 파출하고 유학만을 숭상하는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했다고 배운다. 당시 한무제(漢武帝)가 유술(儒術)과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결합시켜 통치수단으로 삼았다고, 그리고 후대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그런데 “파출백가, 독존유술”이 과연 동중서가 제기한 것일까? 이것이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 전모를 살펴보자.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은 무엇인가?

 

서한(西漢) 초기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파출백가, 독존유술”하였다. 그 정책의 핵심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척, 폐지하고 유가학설에 능통한 인재를 관리로 삼기로 했다는 점에 있다. 그럼으로써 사상을 통일하고 전제주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런 정책의 지침아래 한 왕조는 태학(太學)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유가경전으로 귀족자제를 교육하였다. 관리를 선발함에 있어 유가학설을 표준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유가는 중국 봉건사회의 유일한 통치사상이 되었고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정통사상이 되었다.

 

이것이 중국 중학교 교과서에 있는, 역사사실이라 알고 있다. 중국 이론학계에서는 확고부동의 학술 신조로 여기고 고금중외의 유학 저술에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인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많다.

 

의문을 품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한다 : 한무제는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건의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 더욱이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정책을 실제로 실행한 적이 없다. 한문제는 그저 “출억황로(絀抑黄老), 숭상유학(崇尚儒學)”하였을 뿐이다. ‘출억황로’란 황로사상을 억누른다는 말이다. 한무제가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했다면 한나라 초기의 정치, 경제, 사상 투쟁의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무제 이후의 모든 중국사상사와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한무제가 “파출백가, 독존유술”했다는 말은 학술계의 거짓말이다. 이런 관점이 제기되자 학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찬동과 반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어째서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사상을 동중서와 함께 엮어 얘기하는가? 주로 동중서의 유명한 ‘천인삼책(天人三策)’과 맞물려 있다. “『춘추』가 통일을 추중하는 것은 천지의 항구 하는 원칙이요 고금 공통의 도리입니다. 작금에 이르러 스승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고 사람들의 의론도 다르며 백가의 연구방향도 서로 달라 의향도 다릅니다. 그래서 위의 인군이 통일된 표준을 유지하지 못해 법제가 여러 차례 변하니 아래는 지킬 바를 모릅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이렇습니다. 육예(六藝 :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과와 공자의 학술이 아닌 것은 모두 그 도를 끊으시어 더불어 논하지 못하게 하소서.”(『한서(漢書)·동중서전』) 이렇게 해서 동중서는 오랫동안 ‘독존유술’하게 한 유학의 원로라고 추앙받았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반대로 통치자를 위하여 사상을 통제하게 만든 원흉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동중서는 이러한 사상을 제기한 책임을 씌울 수 있는가? 관건은 동중서가 언제 ‘천인삼책’을 제기했는지에 있다.

 

 

『한서·무제본기』에 “건원(建元) 원년, 조서를 내려 현명하고 선량하며 품행이 바르고 직언해 간언할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였다. 승상 위관(衛綰)이 ‘선명하고 선량한 인재를 추천할 때 신불해(申不害),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 소진(蘇秦), 장의(張儀)와 같은 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국정을 혼란케 하는 자는 모두 중용치 마소서’라고 상주하자, 한무제가 동의하였다”라고 기록돼있다. 이는 건원 원년(BC 104년)에 ‘파출백가’의 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원광(元光) 원년(BC134) 연초 「효제본기」에 “두태후(竇太后)가 여전히 황로사상을 믿고 유술을 좋아하지 않아 몰래 사람을 파견해 조관(趙綰) 등이 불법 이익을 취한 사실을 캐고 조관, 왕장(王臧)을 조사하기 시작하자 조관과 왕장은 자살하였고 (그들이) 건의하였던 일들을 모두 폐지하였다”고 기록돼있다. 또 한무제가 현량 대책의 조서를 내린 일을 기록하고 있다. “5월, 조서를 내려 현량……이에 동중서, 공손홍(公孫弘) 등이 출사하였다.” 이를 근거로 보면, 만약 동중서가 원광 원년에서야 효렴(孝廉)에 따라 대책에 참가했다면, 결코 ‘파출백가’의 창시자가 될 수 없다.

 

역사 교과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동중서가 건의한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한무제가 받아들여 실행했다고 선전하는 내용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무제 원년부터 시작해 무제 6년에 걸쳐 진행된 몇 차례의 사상투쟁과 학술투쟁의 결과라 주장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와 나중의 반고(班固)의 『한서․무제기』 기록에 근거해 한무제 초기 유학자들 사이에 두 차례 큰 사상 투쟁이 있었다고 본다. 첫째는 “신불해, 상앙, 한비자, 소진, 장의의 말을 쓰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 중심인물은 승상 위관이었다. 둘째는, 의고립명당(議古立明堂, 황제에게 옛 제도에 따라 성남에 정교를 선명할 명당을 건립해 제후를 조회하는 곳으로 삼아야 한다는 건의)으로 그 참가자는 조관, 왕장, 신공(申公), 두영(竇嬰), 전분(田蚡)이고 반대자는 두태후였다. 첫 번째는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두 번째는 참담한 실패를 맛본다. 왕장과 조관은 피살되었고 신공, 두영, 전분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두 차례의 투쟁은 유학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기·유림열전(儒林列傳)』에 “두태후가 붕어하자 무안후 전분이 승상이 되었다. 황로, 형명, 백가의 말을 파출하고 문학으로 유학자 수백 명을 선발하였다”고 기록돼있다. 동중서가 건의한 “파출백가, 독존유술”은 전분이 “황로, 형명, 백가의 말을 파출하였다”는 것보다 늦다. 그리고 한무제 6년 이전의 어떤 존유(尊儒) 활동에도 참가한 적이 없다. 따라서 한무제가 동중서가 건의한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분이 “황로, 형명, 백가의 말을 파출한” 후에야 비로소 동중서가 나타났다. 동중서는 바로 “유학자 수백 명을 선발하였을” 때에 선발된 한 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한무제가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런 설은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역사학자 사마천은 『사기』에서 한 번도 그런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분이 “황로, 형명, 백가의 말을 파출하고 문학으로 유학자 수백 명을 선발하였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처음으로 기록한 학자는 동한 사학자 반고다. 그는 『한서․동중서전』의 결미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한무제가 처음 즉위할 때부터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이 앞뒤로 승상이 돼 유학을 흥성시켰다. 동중서에 이르러 대책을 내고 공자를 선양하고 백가를 파출하였다. 학교를 관리하는 관리를 설립하고 주군에서 재덕이 뛰어난 인재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하는 것은 모두 동중서부터 시작되었다.”

 

 

반고의 이런 서술은 『사기』에도 위배되고 『한서』의 「무제기(武帝紀)」와 「유림전(儒林傳)」과도 위배된다. 그럼 믿을 수 있는 말일까? 당나라 한유(韓愈)가 「원도(原道)」를 쓸 때 동중서를 한나라의 중요한 유학 전인으로 기록하고 있지도 않다. 송나라 때 와서 반고의 기록을 사마광(司馬光)이 참고로 한다. 사학 명저 『자치통감(資治通鑑)』의 「한기(漢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무제 원년 “겨울, 10월, 조서를 내려 현명하고 선량하며 품행이 바르고 직언해 간언할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였다. 친히 고금치도를 책문하자 백여 인이 응했다. 광주 동중서가 책문한 바에 대하여 말하길 ‘『춘추』가 통일을 추중하는 것은 천치의 항구 하는 원칙이요 고금 공통의 도리입니다. 작금에 이르러 스승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고 사람들의 의론도 다르며 백가의 연구방향도 서로 달라 의향도 다릅니다. 그래서 위 인군이 통일된 표준을 유지하지 못해 법제가 여러 차례 변하니 아래는 지킬 바를 모릅니다. 신의 어리석은 견해는 이렇습니다. 육예(六藝 :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과와 공자의 학술이 아닌 것은 모두 그 도를 끊으시어 더불어 논하지 못하게 하소서. 사벽한 설을 없애버리면 통치의 법도가 하나가 되고 밝아져 백성들이 알고 따를 것입니다!’ 천자는 그 대책이 옳다 여기고 동중서를 강도상으로 삼았다.” 동시에 사마광은 『통감고이(通鑑考異)』에서 “작금의 효렴으로 천거하는 것은 원광 11월이요, 대책은 하 5월이니 동중서에서 시작됐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 『무기(武紀)』의 오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남송(南宋)의 홍매(洪邁)는 사마광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시간은 원광 원년이 분명하고 “대책을 내놓은 자가 백여 인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장조(莊助) 혼자 옳다고 하여 중대부에 삼았다. 이후 6년, 원광 원년(5월)에 다시 현량 추천을 하조하였는데 이에 동중서가 나왔다”고 하였다. 청나라 왕선겸(王先謙)도 이 설에 찬동하면서 보충했다 : 동중서 대책 중에 “야랑(夜郎), 강거(康居) 이역만리가 덕에 감화돼 귀의케 되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한서서남이전(漢書西南夷傳)』 기록에 따르면 건원 6월에 야랑과 교류하였기 때문에 이듬해 원광 원년에 동중서가 대책을 내놓을 때에야 만이 비로소 야랑이 덕정에 귀순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천백 년 이래로 건원 원년과 원광 원년 5월이라는 두 가지 설이 대치하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 시정(施丁)은 원광 원년 설을 동의하면서 증명하였다. 동중서의 대책 중에 “작금 정치에 임해 다스리려 했었던 것이 70여 세월이다”고 했는데 한나라가 건국하고 나서 건원 원년까지는 70년이 되지 않고 원광 원년이 돼서야만 72년이 되는 것이다. 이 논단은 『동중서전』의 “皆自仲舒發之”와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發’을 ‘시발’로 보지 않고 ‘발휘’, ‘발표 의론’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라는 말이다. 하물며 『오경』박사 설치도 건원 원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문경(文景) 시기에 비로소 성립된 일이고.

 

손경단(孫景壇)은 건원 원년의 설을 견지한다. 그는 원광 원년의 현량 천거 하조와 건원 원년의 현량 추천을 다르다고 본다. 전자는 대책의 내용이 『오경』에 있고 후자는 백가(百家)에 있다는 것이다. 『오경』 대책은 반드시 다섯 종의 경학 내용의 이론을 근거로 해 황제의 질의에 회답하여야 하는 것으로 다른 이론으로 회답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았다. 『한서·무제기』에 기록을 보면 한무제 5년에서야 비로소 “『오경』 박사를 설치하였다”고 되어있는데, 만약 『오경』 박사가 설치돼있지 않았다면 『오경』으로 책문할 수 없다고 본다. 그렇기에 동중서의 “파출백가, 독존유술”의 건의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장대가(張大可)도 손경단의 관점에 동의하면서 보충하였다. 역사적 사실로 볼 때 한무제 시기 현량을 천거한 열전을 보면 동중서, 풍당(馮唐), 원고생(袁故生), 엄조(嚴助), 공손홍 등 6명이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을 보면 이 5명은 모두 건원 원년에 현량으로 천거되었다. 한 명도 원광 원년에 현량이 된 사람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동중서가 대책을 내놓은 시간이 건원 원년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동중서는 발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중서의 대책은 한무제가 행한 “황로, 형명, 백가의 말을 파출하고 문학으로 유학자 수백 명을 선발하였다”는 원인이 아니고 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사마천과 동중서는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 사마광은 동중서의 시대와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자치통감』의 기본 원칙은 “근명분(謹名分, 명분을 삼가다)”에 있었다. 동중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선구자다. 사마광은 어쩌면 동중서에게 “근명분”을 부여하기 위하여 “한무제가 동중서가 건의한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받아들였다”고 위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동중서가 ‘천인삼책(天人三策)’을 언제 제시했냐는 그 시점이 그가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제기했느냐 안 했느냐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고대 역사서에는 그 시점의 기술에 편차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동중서가 “파출백가, 독존유술”을 제기했느냐 하는 의문을 명확하게 풀지 못하고 있다.

 

이 논쟁은 언제쯤이면 끝날까? 확실한 역사적 사료를 가지고 증명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끊이지 않고 계속될 수도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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