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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에서 불어온 4·3이란 회오리바람세계냉전과 한국 분단체제가 빚어낸 사생아 4.3 ... 외적 폭력의 최종 결정판
문영택  |  yeongtaek24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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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06  11: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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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평화기념관에 유해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다랑쉬굴 특별관.

최근의 인구증가 현상에서 제주의 변화를 읽듯, 과거의 인구감소 현상에서 역사의 부침을 읽는다. 제주인구 1925년 20만5478명, 1938년 20만3651명, 1944년 21만9548명에서 보듯 급락을 거듭하던 제주인구가 1945년에는 27만6148명, 해방과 4·3을 맞으며 잠시 30만 인구시대를 맞는다.

여기에도 제주섬의 탈출잔혹사는 숨어 있었다. 일제에 의한 제주도 군사시설은 1926년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가 제주도를 일본 큐슈와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기때문이다.

대정지역에 남아있는 전폭기 격납고 등 일제의 군사시설이 이를 증명한다. 1945년 초 일제는 미군과의 결전에 대비해 제주도 방어에 주력하는 결7호 작전을 수립했다.

당시 제주인구가 23만인데 비해 일본군은 8만여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제주도 전역이 전쟁화되어 엄청난 진지가 구축되었고 제주선인들에게 막대한 노력동원을 강요하였다.

1945년 5월 미군의 공격을 피하여 육지로 피난해 가던 여객선이 폭격되어 280명이 사망한 것을 시발로, 제주 산지항·한림 무기고·모슬포 근해에 대한 미군의 폭격으로 제주선인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해방직후 제주도가 겪은 문제 중 하나는 급증하는 인구였다. 일본과 중국대륙 등지에서 귀환한 제주선인들은,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선인들의 대규모 귀환과 더불어 제주도는 심각한 경제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 등지에서 노동을 통하여 송금하던 선인들이 귀환함으로써 제주도의 경제에 보탬이 되었던 송금액이 감소하였고, 귀환한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실직상태에 처해야 했다.

무엇보다 6만 인구의 제주 귀환이 문제였다. 심각한 일자리 부족과 그에 따른 사회불안이 뒤따랐다. 20만의 인구에서 갑자기 26만이 된 것이다. 이때 귀환한 6만 인구는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던 경제활동 인구였는데, 이들이 아무런 생계대책 없이 고향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러시아와 중국을 포위하는 반공전선 속에서 제주도는 다시금 폭발하는 화산도가 되고 있었다. 바로 4·3이라는 참혹한 현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더욱이 4·3을 거치며 당시의 24만 도민 가운데 수만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다음은 제주역사학자 박찬식의 4·3에 대한 진단이다.

4·3은 결국 세계냉전 구도와 한국의 분단체제가 빚어낸 사생아였다. 미소와 한반도의 남북이 관련을 맺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제주섬사람들에게만 상처를 남겨 놓았다. 제주사람은 밖으로부터 들어온 이념과 공권력에 휘둘린 채 바로 눈앞에서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4·3은 조선시대 이래 변방으로 취급되던 제주섬에 가해진 외적 폭력의 최종 결정판이었다.

4·3 진압차 제주에 온 박진경 중령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라고 했으며, 경시청장인 조병옥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역에 휘발유를 뿌리고 거기에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태워 없애야 한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4·3세 장두 중 김달삼(이승진)도 조봉구도 섬을 탈출했다. 이덕구만이 남아 결사항전하다 1949년 6월 잡혀 관덕정 광장에서 효수되어 전시되었다.

정부의 인구통계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1955년 한국전쟁 후 피난민 인구유입 등으로 갑자기 28만8781명으로 불어났다. 이후 1965년에 30만 시대를 맞이하였고, 1975년에 40만 시대, 1987년에 50만 시대를 맞았다.

이후에는 연평균 0.63%의 증가율을 보여, 한자녀 선호 등에 의한 사회적 현상과 더불어 도외인구 유입폭도 감소했다. 그러다 2010년부터 57만7187명, 2012년 59만2449명, 2013년에는 60만을 돌파하였다.

 

 

 
▲ 문영택 전 교육국장

‘사람도 제주로, 말도 제주로’라는 말이 새롭게 회자되고 있다. 적지 않은 외지인들이 제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오고 있다. 최근의 인구증가에서 제주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듯 제주섬 잔혹사에서도 교훈을 배우련다.

제주의 젊은이들이 진학 또는 새로운 세상을 찾아 제주섬을 떠나고 있다. 제주인의 정체성도 함께 갖고 가기를 기원한다. 제주의 젊은이들이 제주를 알고, 사랑하고, 세계를 누비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우리의 숭고한 몫이다. 훗날 그들에 의해 제주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기에.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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