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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왜 갱유를 했는가?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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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10  08:5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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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진시황이 6국을 멸하고 통일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실행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중,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가장 잘 알려진 사실이요 잔혹한 역사임도 알고 있다. 그런데 ‘분서갱유’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도대체 진시황은 왜 갱유를 자행했는가? 그리고 갱유한 수는 몇 명일까?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함양궁(咸陽宮)에서 유생(儒生)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석상에서 많은 유생들이 모여 분봉제分(封制)를 실시하여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왕관(王綰), 박사 순우월(淳于越) 등은 분봉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면 승상 이사(李斯) 등은 군현제(郡縣制) 실시를 주장하면서 순우월 등이 “지금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옛것을 배운다”, “옛것을 얘기하면서 지금을 해친다”고 공격하였다. 최종적으로 진시황은 이사의 견해를 지지하고 이사의 ‘분서’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진기(秦紀, 진나라 사서), 의약(醫藥), 복서(卜筮), 농서(農書), 그리고 국가 박사가 소장하고 있는 『시(詩)』, 『서(書)』, 백가어(百家語) 이외의 열국(列國)의 사적,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유가 작품, 제자백가 저작 및 기타 전적은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시(詩)』, 『서(書)』를 논하는 것을 금하고 “옛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방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위반한 자는 엄벌 내지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진시황이 칭제 이후 장생불로를 애써 추구하였다. 먼저 서복(徐福), 후생(侯生), 노생(盧生) 등을 선약을 구해오도록 파견하였다. 후생과 노생은 당초 곁에서 진시황을 모셨던 방사(方士)였다. 오랜 기간 진시황을 위하여 선인과 선약을 구하였지만 끝내 찾을 방법이 없었다. 진 왕조의 법률에 의하면 선약을 구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했다. 그래서 후생과 노생은 몰래 타향으로 도망쳤다. 이를 안 진시황을 극도로 분노한다. 그래서 함양에 있던 모든 방사들을 감찰하고 심문하면서 후생과 노생을 찾으려 하였다. 진시황은 결국 460명을 선정한 후 함양에서 구덩이를 파 산채로 묻어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시황의 ‘분서갱유’다. 가장 잔혹한 역사다. 역사서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많고 역사학자들도 여러 차례 논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역사서를 보면 분서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갱유에 대해서는 너무 두루뭉술하다. 또한 갱유의 문제에 있어 의론이 엇갈리고 있다. 갱유의 차수가 한 번 뿐이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번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갱유의 인명에 대해 460여 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600명을 한꺼번에 갱유했다하기도 한다. 더 심한 것은 진시황이 분서는 했지만 갱유는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진 왕조 역사에서 갱유한 사건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도대체 몇 번 있었을까? 진시황은 도대체 몇 명의 유생(儒生)을 생매장했는가? 이런 문제들은 아직까지도 의론이 분분해 일치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쟁론의 하나, 진시황은 갱유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분서갱유’를 진시황이 ‘존법반유(尊法反儒)’(법가를 존중하고 유가를 반대)의 중요한 증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른바 진시황의 ‘갱유’는 사실 ‘갱방사(坑方士)’한 사실의 와전이라고 생각한다. 이 관점을 견지하는 학자들은 다음 두 가지 방면에서 논증하고 있다.

첫째, 역사서에는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체적 인물은 후생, 노생, 그리고 한중(韓衆), 서불(徐巿) 등 4명이다. 『사기』에서는 그들 활동이 방선(訪仙)과 선약을 구하는 것에 한정되었고 모두 신선학파(神仙學派)에 속하는 방사들로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진시황을 위하여 신선을 찾고 불사약을 구하였는데 이는 모두 순수한 방사의 활동이었다. 나중에 성공하지 못하자 진시황은 사기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노기충천해 산채로 묻어버렸다. 이 점은 후대 군주들이 제멋대로 살인하는 성격과 일치한다. 그저 연루된 사람이 너무 광범위해 허위로 조작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너무 많았던 것, 그래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을 뿐이었다. 후생과 노생이 진시황이 무도하다고 질책한 것은 유가 관점과 유사하나 그들과 유가의 정치 주장, 혹은 학파 관점과는 무관하다. 사마천은 ‘분서갱유’ 사건을 기록하면서 ‘방사’ 혹은 ‘방술사(方術士)’라 하면서 명확하게 신선학파의 인사들이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한나라 초기 가의(賈誼), 동중서(董仲舒) 등의 대유도 진나라 정치에 대하여 여러 차례 평론하면서 분서에 대해서는 매번 질책하고 있지만 한번도 ‘갱유’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한 왕조와 진 왕조는 시간상 가깝고, 가의와 동중서는 박학한 인물들이었기에 ‘분서갱유’ 상황에 대하여 당연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진시황이 생매장한 인물들이 유학자였다면 유가를 존중하는 가의와 동중서 등이 논거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이른 근거로 판단하면, ‘갱방사(坑方士)’의 설은 역사적 진실과 맞아떨어진다.

단지 동한(東漢) 이후 시간적 거리가 이미 멀어졌고, ‘극진(劇秦)’(극진미신〔劇秦美新〕, 진은 혹독했고 신은 아름다웠음)의 사회 여론, 유가 독존의 지위, ‘금문학파(今文學派)’의 허위과장을 넘어 작위의 학풍 성행 등이 진시황이 ‘갱유’했다고 조작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반고(班固)는 ‘술사(術士)’라는 용어를 이용해 광범위하게 적용시켜 버린다. 그는 『한서(漢書)·유림전(儒林傳)』에서 “진시황이 천하를 겸병함에 이르러 『시경』, 『서경』을 불태워버리고 술사를 죽이니 육학(六學)이 이때부터 완전치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둘째, 피살자들에 대해 내린 죄명은 무엇일까? 황제를 ‘비방’한 죄이다. 결코 신앙이나 유가학설을 전파했다는 죄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진시황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어느 학파의 정치 주장이거나 모 학파의 의론이 아니다. 방사들이 날조해 “거만금의 비용을 하사”받고도 “끝내 선약을 얻지 못한” 죄이다. 진시황을 비방한 자들은 하나하나 도망쳤다. 황제가 사기를 당했다. 그래서 그들을 징벌해야 하였다. 이것이 바로 ‘갱유’가 ‘갱방사’가 된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른바 ‘갱유’는 실제 황제 개인의 복수를 위한 자의적 행위였다. 결코 진 왕조의 정책이 아니었다. 진시황은 분노를 참지 못하여 초빙하였던 ‘문학(文學), 방술사’ 460여 명을 함께 생매장했다. 물론 460여 명 중에 유생에 속한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진시황은 신앙이나 유가학설을 전파하였기에 죄를 물어 주살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갱유’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기·진시황본기』에 기록에 따르면, 시황 34년에 분서를 했는데 그 대상은 민간에서 사장(私藏)하고 있던 ‘백가어(百家語)’이지 유가에 화살을 돌린 것은 아니다.

   

이상 두 가지 논점을 근거로 하면, 피살된 460명 중에 유생은 한 명도 없고 모두 방사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대표인물은 후생, 노생이었고 피살자의 주류는 방사들이었다. 그 피살의 원인은 유가의 정치 주장이나 학파의 관점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진시황이 ‘갱유(坑儒)’ 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갱방사(坑方士)’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분서갱유’에 대한 주된 관점은 전통적인 관점을 따르고 있다. 즉 진시황이 생매장한 것은 유가로 그저 단순히 방사들만 주살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외에 갱유가 몇 번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다.

논쟁의 둘, 진시황의 갱유의 차수와 사람 수다. 이 문제에 대해 『사기』, 『자치통감(資治通鑑)』, 『장서(藏書)』, 그리고 현대의 『중국통사간편(中國通史簡編)』에서는 진시황이 한 번 갱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기원전 212년 한 차례를 말한다. 그런데 전백찬(剪伯贊) 주편의 『중국사강요(中國史綱要)』에는 이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한 차례 더 있었다고 보고 있다. 즉 :

“이듬해(기원전 212년) 또 갱유 사건이 발생하였다. 원인은 진시황에게 불만을 품은 서생들이 그를 ‘형률(刑律)을 전횡’하고 ‘잔혹한 형벌로 살육을 즐기면서 황제의 위풍을 과시하고 있다’ 등등 비판하자 진시황은 그들이 ‘어떤 이들은 요언(妖言)을 퍼뜨려 검수(黔首, 일반백성)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체포해 엄한 형벌로 고문을 가했다. 전후 460여 명의 유생이 체포되었고 결국 모두 함양에서 생매장돼 죽었다. 그러나 다른 사료에 진시황은 최소한 두 번 갱유했다는 기록도 있다. 첫 번째는 함양에서 460명을 갱유한 것으로 공개적으로 생매장해 죽였다. 그 목적은 ‘닭을 죽여 원숭이를 훈계’(일벌백계)하여 ‘천하에 그것을 알게 해’ 흉내 내는 이들을 방지함에 있었다. 두 번째는 규모가 더 컸다. 한꺼번에 700여 명을 생매장했다. 비밀 암살의 수단을 이용하였고 방법 또한 ‘교묘’했으며 잔인하였다.”

동한의 위굉(衛宏)은 『조정고문관서서(詔定古文官書序)』에 기록하고 있다 : 진시황이 여산(驪山) 온곡(溫谷)에 구덩이를 파 오이를 심었다. 겨울에 오이가 열린 기이한 현상을 이유로 박사와 여러 유생들에게 여산으로 구경 오라고 유혹하였다. 여러 유생들이 쟁론이 끊이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때 진시황은 기회를 노려 구덩이에 유생들을 파묻으라고 명령하였다. 700여 명의 유생들 전부 산곡에 생매장하고 밖으로 알리지 않고 2천여 년 동안이나 진상을 숨겼다. 나중에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를 편찬하면서 앞 사료를 사서에 편입시켰다. 안사고(顔師古)도 『한서·유림외전(儒林外傳)』에 주를 달면서 이 사료를 인용했다.

『사기․유림전정의』에 기재된 바에야 진시황이 여산에 갱유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단지 수단이 은밀하였고 당시에 아는 사람이 적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을 안다하여도 극소수였으며 감히 공개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여산에 갱유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진시황은 한 번 갱유했다고 본다. 함양에서 갱유했다는 것과 여산에서 갱유했다는 것은 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달리 기록하였을 따름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두 차례 갱유의 사람 수가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한 번은 함양에서 공개적으로 갱유하였고 다른 한 번은 여산 원곡에서 비밀리에 갱유하였다. 이전은 460여 명이요 후자는 이후는 700여 명이다.

여기에서 중국학자들의 주장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위굉에 대한 평가다. 제일 먼저 진시황이 두 차례에 걸쳐 갱유했다고 주장하는 위굉은 학문태도가 대단히 엄정했다고 한다. 그는 장기간에 걸쳐 현지를 방문하고 연구하고 정리해서야만 저작으로 남겼다고 한다. 물론 학술적 가치도 높고. 더욱이 동한 광무제(光武帝)는 개방적이면서도 학술 연구를 중시하였다. 따라서 위굉이 폭로한 진시황의 제2차 갱유의 진실성은 높다고 본다. 물론 중국학자들의 견해다.

   

그런데 진시황이 두 차례에 걸쳐 갱유했다는 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원대 사학가는 『문헌통고(文獻通考)』40권 『학교고(學校考)』에도,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 인용한 『고금기자(古今奇字)』에도 위 관점에 동의하는 기록이 보인다.

심지어 위 관점에 동의하는 학자들, 즉 진시황의 갱유는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두 번 갱유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그 원인을 제시하기도 한다. 무엇일까? 첫째, 갱유한 사람들은 당시 수도 함양에 살고 있는 460여 명의 박사와 유생들이었을 뿐 더 많은 유생들이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갱유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속적으로 강하게 진시황의 조치에 대해 반대하였다. 진시황의 큰아들 부소(扶蘇)조차도 걱정해 말했다고 한다 : “천하가 처음 안정되니 멀리 백성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여러 유생들이 공자를 칭송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법을 중히 여겨 그것을 묶으시니, 신은 천하가 불안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성상께서 살피시길 바랍니다.” 이런 관점은 당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이치에 맞기는 하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이 갱유를 했느냐 안 했느냐, 한 번 했느냐 두 번 했느냐, 몇 명을 생매장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460명이면 어떻고 700명이면 어떠랴. 갱유면 어떻고 방사들을 생매장했으면 또 어떠랴. 생매장 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잔악한 수단이요 극악무도한 야만적 행위가 아니던가. ‘생매장’ 사실 그 자체가 천고의 오명이요, 웃음거리인데.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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