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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고대 중국을 밝힌 조명(照明)의 비밀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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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01  10:3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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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에 전기를 발명함으로써 조명 기술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 길고긴 어두운 밤에 고대 중국인들은 어떻게 ‘조명’의 문제를 해결했을까?

1968년 하북 만성(滿城)의 서한(西漢)시기 두관묘(竇綰墓)에서 주작동등(朱雀銅燈)이 발굴되었다. 높이 30센티미터, 지름이 19센티미터였다. 주작이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켜세운 모양이다. 부리는 등반을 물고 있고 발은 반룡을 딛고 날개를 벌려 날아가려는 형태다. 등반은 원형으로 홈이 파져있으며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고 각각 1개의 못이 박혀있다.

중국 고대 전설 속 주작은 백조의 왕이다. 춤을 잘 추는 신령성과 고귀한 생활 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길함을 준다고 돼있다. 한(漢)나라 때 주작은 4신 중 하나로 도기, 동경에 자주 등장하며 석묘의 묘비에도 자주 등장한다. 죽은 자를 보호하는 신물이요 길상의 징조를 나타낸다고 보았던 것이다. 주작을 닮아 묘의 주인이 신선이 되거나 일찍 하늘나라로 올라가기를 바랐던 소박한 소망을 담아 나타낸 것으로 본다.

이런 주작동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예술 조형에 감탄하거나 그것이 지니는 내용에 감동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 등을 어떻게 밝혔을까”라는 문제에는 관심두지 않는다. 어쩌면 간단하게 자문자답했을 수도 있다. 간단하지 않는가? 등반 위의 못과 같은 형태 위에 양초를 꽂아 불을 붙이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다른 형태, 즉 양(羊) 모양의 동등(銅燈)을 살펴보자. 이 등은 1968년에 하북 만성 서한(西漢)시기 유승묘(劉勝墓)에서 발굴되었다. 높이 18.6센티미터, 길이 23센티미터다. 등은 앉아 있는 양의 모양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 두 뿔은 굽어 있고 몸은 똥그랗게 만들어져 있으며 꼬리는 짧다. 양의 등 부분에는 홈이 파여 있다. 등반은 양이 이고 있는 모양이다. 등반은 타원형의 주둥이가 있다. 등의 파인 홈에는 등유를 보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등은 어떻게 불을 붙인 것일까? 설렁설렁 그림을 본 사람은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등반에서 뭔가를 꽂을만한 못과 같은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은 전국(戰國)시대에서 당대(唐代)까지의 조명 기구를 보면 등잔 가운데 못 하나를 박아 놓거나 아예 못조차 박아놓지 않은 형태를 취했다. 단단한 등의 심지를 못 위에 올려놓거나 등잔 가운데 세워둔 채로 불을 붙였다. 단단한 심지가 아니면 등잔 옆에 놓지 않고 등잔 가운데에 대를 만들어 심지를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전문가들은 ‘잔중립주식(盞中立炷式)’이라 한다. 한나라 때 등의 심지는 대부분 껍질 벗긴 삼대와 같은 단단한 섬유질로 만들어 썼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초를 사용했을까? 광동 광주(廣州) 동한(東漢) 후기 묘에서 가장 이른 촉대가 발굴되었다. 그때가 돼서야 중국에 양초 모양의 초가 발명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고대의 기름 등의 점화 방식은 언제부터 변화되기 시작했을까?

1955년 위구르(新疆) 파초(巴楚)현 투오크즈사라이(Tuokuzisalai, 脫庫孜薩來)에서 동등(銅燈)이 발굴되었다. 높이 7.3센티미터로 등좌(燈座)와 등잔(燈盞)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등좌는 팔각형으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의 조롱박 모양이다. 등잔 입구에는 등유가 잘 흐르도록 돼있고 뒷부분은 가는 자루가 있다. 이는 당대의 등과 유사하다. 이런 모양은 호남 장사요(長沙窯)에서도 2개가 출토되었다. 하나는 사발 모양의 도자기 등으로 낮고 둥글게 만들어져 있었고 입구는 관 모양이다. 다른 하나는 단지 모양의 도자기 등으로 입구가 좁고 배 모양, 밑바닥은 둥글게 돼있다. 세 개의 손잡이가 있어 기울이면 밖으로 쉽게 흐르게 돼있다. 셋 다 일반적인 조명 기구 형태다.

이 당대 조명 기구의 공통적 특징은 입구 가장자리가 등유가 쉽게 흐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이런 형태는 중국의 전국시대, 진한 이래의 등잔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 현재 서양의 등잔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서양의 등잔은 기울이면 등유가 쉬이 흐르게 돼있다. 심지를 입구나 모서리에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방식이다. 이른바 ‘잔순탑주식(盞脣搭炷式)’이다. 고대 지중해 지역과 서아시아 각국에서 이런 방식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당대에 와서 중국의 점등 방식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서양의 점등 방식이 위구르를 경유해 중국으로 전래하였을 것으로 본다. 송(宋)대에 와서 이런 형태의 등잔이 보편적으로 사용됐다고 보고 있다.

이전에 안숙자(顔叔子)라는 사람이 일가친척 하나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이웃에 홀로 살고 있는 과부가 있었다. 어느 날 폭풍우가 몰아쳐 과부의 집이 날아가 버렸다. 과부는 어쩔 수 없이 안숙자의 집으로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안숙자는 그녀를 머물게 하고 등촉(燈燭)을 들고 있게 하였다. 날이 밝아오기는 했으나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들고 있던 땔감이 다 소진돼 버렸다. 안숙자는 급히 지붕의 모초를 가지고 와 불을 붙였다. 홀로 살고 있던 안숙자는 과부와 어두운 집에서 있게 되면 헐뜯는 말이 마을에 돌까봐 지붕의 모초까지 이용해 불을 밝혔던 것이다.

그렇다. 중국은 한나라 이전에는 땔감으로 등촉을 삼았다. 그래서 ‘촉(燭)’을 ‘화(火)’라 한 것이다. 초를 사용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확실치 않다. 옛 사람들은 마나 여뀌 같은 것으로 불을 밝혔다. ‘초’는 없었다. “낮은 짧고 괴로운 밤은 기나기나니 어찌 불 밝혀 놀지 않으랴?(晝短苦夜長,何不秉燭遊?)”(『고시십구수古詩十九首』)라고 했는데 ‘병촉(秉燭)’이란 촛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땔감을 들고 불을 밝혔다는 말이다.

『사기(史記)·맹상군전(孟嘗君傳)』에 유명한 전국시대 4공자 중 한명이 손님을 접대하였다. “저녁을 먹는데 불빛을 막아버렸다. 객이 노하여 식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먹기를 멈추고 하직하였다. 맹상군이 일어나 자신이 그 밥을 먹었다. 손님은 부끄러워 자진하였다. 사대부들은 그로 인해 맹상군을 더더욱 가까이 하였다.” 무슨 말인가? 손님을 초청해 교류하기를 좋아하였던 맹상군이 땔감으로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불똥이나 연기가 손님에게 날아갈까 염려해 하인에게 막아서게 했는데 손님이 오해했다는 말이다. 자진까지야 할 필요 없었지만. 아무튼 그 시대에는 불을 밝히는 것은 등유도 초도 아닌 땔감이었음은 분명하다.

   

“난초향기 나는 기름으로 불 밝히니 숱하게 모여 선 아름다운 여악〔女樂〕들(蘭膏明燭,華容備些)”(『초혼招魂』)이라는 구절을 보면 요원한 전국시대에 유등(油燈)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중국의 밤하늘을 밝히는 것은 유등이었다. 그런데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는 귀족들의 사치품이었을 뿐이었다. 그때는 아직 식물기름이 없던 때였다. 동물기름은 물량이 한계가 있었고 향료를 섞어야했기 때문에 비싸기 그지없었다. ‘조명’ 기술이 발달했다고는 얘기할 수 있어도 일반적으로 통용됐다고는 볼 수 없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위진(魏晉) 시기에도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전통적 방법인 ‘땔감’으로 불을 밝혔다. 그런데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위 문제 조비(曹丕)가 미인 설령운(薛靈芸)을 사랑해 궁으로 불러들이는데 ‘촉대(燭臺)’를 세웠다고 돼있다. 홍촉(紅燭)을 밝혀 대낮같이 밝았다고 돼있다. 이를 보면 당시에 ‘납촉(臘燭)’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동물성 유등이 아닌 초를 사용하게 되면서 이후 중국은 밤에 초로 불을 밝혔다. 오구(烏桕) 기름이 최고요 다음으론 유채(油菜) 기름, 아마(亞麻) 기름, 면실〔棉子〕 기름, 호마(胡麻) 기름이 있었고 동유(桐油)와 구혼유(桕混油)는 하품이었다.

송대에는 ‘성유등(省油燈)’이 발명된다. 이렇게 유등이 발명됨으로써 중국의 밤은 휘황찬란해졌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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