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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와 중문에 서려있는 채구석의 온기 ... 제주인의 기개와 개척정신

 

제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인 채구석은,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대정군수였다. 그는 바위를 뚫어 천제연물로 논을 일궈낸 개척자이며, 그의 후손들은 제주도와 합작하여 ‘제주항공’이라는 기업도 세웠다.

 

천제연 3단 폭포에 세워진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沓灌漑遺跡碑)’에는 과학적인 사고와 개척정신이 뛰어난 채구석 군수를 기리고 있다. 당시 토목기술로는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1906년부터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천제연 도수로 공사를 완공, 황무지를 옥답으로 바꿔 주민들이 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기반조성을 한 역사적 사실 을 기록하고 있다.

 

천제연 도수로가 시작되는 부분은 단단한 조면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이었다. 물길을 내려면 바위를 뚫어야 했다. 장비라고는 곡괭 이·정·징 등이 고작이었던 시절, 그는 물과 장작불과 소주와 온도 차이를 이용하는 과학적인 공법을 동원했다.

 

암반 위에 장작불을 뜨겁게 지펴 바위를 달군 다음 독한 소주를 부어 뜨겁게 하고는 찬 물을 부어 급속히 냉각시켜 폭발게 했다. 단단한 바위가 급격한 온도 차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균열되는 과학적인 방법을 응용한 것이다. 암반을 뚫고 물이 흐르도록 하여 5만여 평의 논밭을 일구어 낸 채구석 군수의 흔적을 만나는 것도 즐거움일 것이다.

 

1901년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은, 천주교도인 대정군의 부이방(副吏房) 김옥돌이 향장(鄕長) 오대현의 기처(妓妻)를 간음한 사건을 계기로, 상무사원(商務社員)과 천주교도 간에 충돌로 일어난 사건이다. 봉세관인 강봉헌이 상무사의 대표인 채구석 군수를 사건의 책임자로 조정에 무고하였기 때문에 채구석은 대정군수 직에서 파면되었다.

 

상무사는 1901년 4월 채구석·오대현·강우백 등이 대정군민들과 함께 일본어민의 어장침투, 경래관들의 탐학, 봉세관의 남세와 일부 천주교도의 작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설립한 단체였다.

 

상무사의 지도자이며 당시 대정군수였던 그는, 난이 진압되는 동안 관민 측과 목사 사이를 오가며 유혈충돌과 난의 확산을 막을 뿐 만 아니라 프랑스 신부 보호 등에 진력하였다. 억류되어 조사를 받고,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군수 직에서 파면되고, 3년간 금고생활을 하였다.

 

그 뒤 중문에 거주하면서 1899년 종달리에서 실패한 간척사업을 떠올리며, 천제연폭포수 주변 지세를 1905년부터 3년간 답사하였다. 드디어 1908년 물길을 열어 성천봉 아래로 물을 대어 5만여 평의 논을 개간하였다.

 

 

종달리와 중문에 있는 채구석의 흔적에서 척박한 제주 땅을 일구고자 앞장선 제주인의 기개와 개척정신을 엿본다. 진정한 의미의 목민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몸소 실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그는 또한 1894년(고종 31년) 제주판관 재임 시 제주에 흉년이 들자 봉록을 의연(義捐)하여 기민(飢民)들을 구제하였다. 1895년 대정군수 재직 시에는, 주민 강유석과 송계홍 등이 난을 일으켜 갑오경장 후의 신제도 실시에 반대하여 경무청을 파괴하자, 부사 김윤병과 함께 관군을 인솔하여 난을 진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가혹한 세금 때문에 일어난 화전민 방성칠의 난(1898년)을 진압하지 못했다는 책임 때문에 면직되기도 했다.

 

1899년 재차 대정군수로 부임한 후 이재수의 난(1901년)이 일어나 민군과 천주교인 사이에서 거중조정 역할을 하지만 또 파직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결국 민란 주동자였던 이재수, 오대현과 도민의 원성을 샀던 봉세관 강봉헌은 교수형에, 채구석은 금고형에 처해졌다.

 

이후 채구석의 석방을 위해 제주도민들이 청원하고, 당시 제주목사인 홍종우도 프랑스인 라크루 신부에게 요청함으로써 배상금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1903년 석방되었다.

 

채구석은 만년에 중문 천제연 절벽을 뚫고 관개수로를 만들어 성천봉 아래 ‘베릿내’ 5만여 평의 논밭(지금의 중문관광단지 일부)을 개간하고, 이어 구좌읍 종달리 ‘소금밭’을 옥답으로 개척하여 ‘곤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준 제주선인이다.

 

논밭 조성 사업에서 채구석 군수가 종달리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중문 천제연에서의 성공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기록이 상반되어 추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훗날 다시 정리하고자 한다.

 

한편 채구석의 아들 채몽인(1912-1970)은 ‘애경유지’를 창업하였다. 대기업으로 육성시킨 그의 부인 장영신은 한국전쟁 당시 제주에 들어와 피난고등학교에서 배우기도 했다. 채몽인의 아들 채형석은 제주항공을 제주도와 합작으로 창업하기도 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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