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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배갈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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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15  11: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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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배갈은 증류 가공 방법으로 만드는 알코올 농도가 비교적 높은 음용하는 술을 말한다. 현재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량주로 우리나라의 일반 소주와 다르다. 중국에서는 배갈에 대해 ‘백주(白酒)’란 통일된 용어를 쓰고 있지만 ‘소주(燒酒)’, ‘백간(白干)’, ‘고량주(高粱酒)’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배갈의 과학적인 명칭은 ‘증류주(蒸溜酒)’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배갈은 ‘白干’에서 유래했다.[본 문장에서는 배갈과 소주라는 용어를 혼용해 쓴다]

중국은 언제부터 술을 증류했을까? 자체 발명했는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 전래됐는가? 이 문제에 대해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적으로 중국 배갈의 기원 문제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한(東漢), 당(唐), 송(宋), 그리고 원(元) 대에 비롯됐다는 네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동한이라는 설은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내편内篇』과 『후한서後漢書·신선전神仙傳』에 기록된 일단의 문자를 근거로 하고 있다. 초가(草家) 위에서 불을 붙여 음식을 끓이는데 초가 밑에는 타지 않았다는 ‘신선의 일’을 가지고 추론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신선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믿지 않는다.

명대 이시진(李時珍)의 말에 근거로 삼기도 한다. 이시진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술을 증류하는 것은 예부터 전해진 방법이 아니다. 원나라 때 비로소 그 방법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1919년, 미국 학자 베르톨트 라우퍼(Berthold Laufer)도 『중국-이란편(Sino-Iranica)』에서 이시진의 설이 합리적이라고 긍정하고 있다. 그래서 원 왕조 때에 배갈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설을 중국내외 학자들이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1968년, 일본학자 시노다(篠田)가 원래의 학설을 깨고 송대에 이미 배갈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제기하였다.

1956년, 원한청(袁翰青)은 「중국에서의 술을 빚는 기원 및 발전」이라는 논문에서 중국 배갈의 시점을 당대까지 올려놓았다. 이에 따라 당나라 때 배갈이 있었느냐하는 문제는 현재 배갈의 기원에 대한 토론의 핵심이 되었다.

   

배갈이 당대에 기원했다고 찬성하는 학자들이 주로 근거로 삼는 것은 당대 시인의 시구다. 백거이(白居易)의 『여지루대주荔枝樓對酒』중에 “여지가 처음 익으면 닭 벼슬 색을 띠고 소주를 처음 열면 호박향기가 나네(荔枝新熟鷄冠色,燒酒初開琥珀香)”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옹도(雍陶)의 『도촉후기도중경력到蜀後記途中經歷』 중에 “성도에 다다르니 소주가 익어가네, 내 몸 다시 장안으로 돌아갈 마음 없네(自到成都燒酒熟,不思身更入長安)”가 그것이다. 이 시구 중의 ‘소주(燒酒)’는 증류한 술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대곡(大曲)과 같은 배갈의 일종이라 본다.

사실 당대부터 ‘소(燒)’자와 ‘주(酒)’자가 연계되면 “온도를 올리다, 보온 발효, 가열해 증류하다” 등을 포함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조(李肇)의 『당국사보唐國史補』에 “술에는……검남의 소춘이 있고(酒則有……劍南之燒春)”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분명 증류주라 하여야할 것이다. 또 방천리(房千里)의 『투황잡록投荒雜錄』에 “남방에서 마시는 것은 바로 소주다(南方飮,即燒)”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도 한 예이다. 그리고 사서 기록에 근거하면 당시 소주는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백색을 띠고 하나는 홍색을 띤다. 홍색을 띠는 소주는 ‘포도소(葡萄燒)’라 불렀다. 예를 들어 『몽양록梦粱綠』13권에 보면 남송(南宋) 임안(臨安)에 “수정홍백소주(水晶紅白燒酒)”를 판매하고 있었다고 기록돼있다. 그렇다면 소주라 할 때 ‘소(燒)’는 술의 색깔을 형용하는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대 시가 중의 ‘소주’는 ‘포도소(葡萄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과학기술사 전문가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포도주는 “옛날에는 서역에서 제조했는데 당대에 고창국(高昌國)을 멸하면서 그 방법을 배워왔다”고 보고 있다. 중국은 대략 서기 700년경에 증류 소주가 있었고 독일의 브랜디와 무척 비슷했다고 보고 있다. 이외의 여러 학자들도 당시(唐詩)에 보이는 ‘홍소주(紅燒酒)’는 홍색의 포도소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 송(宋) 당신미(唐愼微)는 『증류본초證類本草』에서 당 덕종(德宗) 시기의 『정원집요광리방貞元集要廣利方』을 인용하고 있는데, 당시에 이미 증류주를 가지고 뱀독을 해독하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중국의 증류주는 원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송대, 어쩌면 더 일찍 당대까지 소급해 올라가야 할 것이라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의 ‘소주’는 시작 단계에 해당하는 당송(唐宋) 시기는 우연히 발생한 수준의 단계에 불과하다. 남송 후기에서 원대에 들어서야 점차 확대됐다고 봐야 옳다는 말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 대부분은 원한청의 논거가 불충분하다고 논박한다. 백거이와 옹도의 시에 나타난 ‘소주’는 결코 현재 중국인들이 말하는 소주, 즉 배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단술을 삶아 홍색을 띠게 하는 방법으로 제조한 홍주(紅酒)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육유(陆游)의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 보이는 용어도 시가에 보이는 소주와 마찬가지로 홍주일 뿐 증류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백거이의 시에 보이는 ‘소주’는 앞뒤 구절을 대조하면 명사로 쓴 것이고 호박색을 가지고 그 술의 색깔과 광택을 형용했다고 본다.

당시에서 보이는 ‘소(燒)’는 일반적으로 ‘홍(紅)’의 뜻으로 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소주라는 두 글자는 현재 중국의 소주라 볼 수 없기에 증류주가 당대에 시작됐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검남(劍南)의 ‘소춘(燒春)’도 바로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된 검남의 도사(道士)가 제공한 ‘생춘주(生春酒)’이지 증류주는 아니다. 술 색깔이 호박이나 화염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어 ‘소주(燒酒)’라 썼을 뿐이지 결코 증류주의 맛이 불에 댈 정도로 톡 쏘거나 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도수가 높아서 붙인 이름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더나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 당대의 소주와 홍주는 다른 개념이었다. 소주는 양조해 가공 방법을 더했기 때문에 붙여진 술의 이름이요 홍주는 술이 색깔이나 곡물류의 색에 따라 붙여진 술의 이름이다. 이 두 종류는 발효주에 속하는 것으로 증류주는 아니다. 당대의 포도주도 현재와 같은 ‘소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주는 증류 방법으로 만든 증류주이다. 증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설비는 역시 증류주기(蒸溜酒器)다. 그렇기 때문에 소주의 기원에 대해 논할 때 증류주기가 언제 출현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중국 소주가 원대에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당송 시기에는 증류주기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대에 이미 증류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위의 관점이 타당성이 없다고 본다. 현재 찾아낸 문헌 기록이나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원대 이전에 중국에 증류주기가 이미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신석기시기에 이미 ‘증(甑)’이라 불리는 취사 용기가 있었다. 음식물을 찌거나 삶는 용기로 아랫부분에 증기가 통과할 수 있는 여러 작은 구멍들이 나있었다. 삼족정(三足鼎)과 같은 ‘력(鬲)’ 위에 올려놓고 음식을 찔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취사 용기는 중국식 증류기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력(鬲)’ 위에 조그마한 잔을 올려놓고 머리 부분에 응결시킬 수 있는 사발을 올려놓는다면 단순하지만 전형적인 증류설비가 되는 것으로 본다.

이외에 북송 말기 채조(蔡條)는 『철위산총담鐵圍山叢談』에 향료인 장미로(薔薇露〔장미수〕)를 증류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남송 후기 조여괄(趙汝适)도 『제번지諸番志』에서 “장미수(薔薇水)는 대식국(大食國)의 향수(기름)다……지금은 대부분 꽃을 채취해 물이 스며들게 한 후 증류해 그 액을 얻는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송나라 사람들이 늦어도 북송 말기에는 이미 장미수를 증류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장미수를 증류하는 증류기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방법은 북송 후기에서 남송 후기까지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다른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남송 시기 장미수를 증류하는 방법과 비슷한 방식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감화로(柑花露), 박하유(薄荷油), 금은화로(金銀花露), 그리고 향정유(香精油)를 만들고 있었다. 학자들은 증류기기와 증류주기를 사용하는 것이 똑같은 방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증류기기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면 증류기기가 출현하는데 기초가 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럼 고고학 발굴은 어떤가? 당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송대나 당대에 증류주기가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송대의 기록 중에서 ‘소기(燒器)’라 불리는 주기를 찾아냈다. 황간(黄干)은 남송 사람으로 감태주주무(監台州酒務)를 역임하였다. 그는 『석문주기명石門酒器銘』에 송대의 다섯 가지 양주용 기기를 기술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소기’다.

이외에 1975년, 고고학자들이 하북성 승덕(承德)지구 청룡(靑龍)현 동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금대(金代) 유적 중 수직의 원형 움집에서 ‘소주과(燒酒鍋〔술도가〕)’를 발굴하였다. 분석한 결과 그 ‘소주과’는 청동으로 만들었고 요대(遼代) 후기와 원대 초기 사이의 금대, 혹은 금말원초(金未元初)의 유물로 밝혀졌다. 높이 41.6센티미터로 상하 두 부분이 합체된 형태로 돼있다. 아랫부분은 반원구형 시루이고 윗부분은 원통형 냉각기이다. 상하 합체된 접합 부분에 있고 쌍순 홈이 있어 술이 흐르거나 배수용으로 사용하도록 돼있다. 관련 학자들이 모형을 만들어 실험한 결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요나라든 금나라든 송나라 문명보다는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이 견해다. 그렇게 보면 금대에 사용되었던 증류기술은 송대와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된다고 추론한다. 즉 금대의 소주 증류 기술은 송 왕조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 금대에 이미 그와 같은 완전한 ‘소주과’가 있었다면 송대에도 금대 소수과와 같은 제조 생산 기기가 분명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간이 말한 ‘소주’는 분명 송대 특유의 ‘소주과’에서 만들었음이 분명하다고.

이상과 같은 증거가 있지만 당대에 증류주가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위와 같은 설은 일견 설득력 있다고 보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찾아낸 송대 증류기기 자료들은 모두 화로수를 증류하였던 것일 뿐 송대의 증류기기가 증류주기라는 명확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송대 생활상을 보면 장미수 위주의 화로수로 만든 화장품과 방향제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장미수는 그때까지는 외국에서 수입했었다. 나중에 수입되는 장미수의 수량이 부족하게 되자 송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증류법을 사용해 화로수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송나라 사람들이 제조한 화로수는 외국의 장미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송나라 사람들이 화로수를 증류하는 기본적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문적으로 화로수를 증류하는 증류기기와 소주를 증류하는 증류주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규격의 크기에 있었다. 전자의 용적량이 후자보다도 훨씬 작았다. 원대 이후 전문적으로 소주를 양조하는 증류주기는 통틀어 ‘소과(燒鍋, 술도가)’라 했다. 이외에 ‘소항(燒缸)’, ‘소증(燒甑)’이라는 명칭도 보이기도 한다.

청나라 사람들의 기록에 따르면 대형 소주 양조장에서 연간 소모하는 곡물의 량이 “천수백만석(千數百萬石)”에 이른다고 하였다. 양조장 내의 술도가에서 한 번 증류하기 위해 소모되는 곡물은 최소 6두 이상이었다. 소주를 증류하기 위해서는 먼저 곡물로 주배(酒坯)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체적은 최소 2배 이상이 불어났다. 이처럼 계산하면 보통의 술도가 하나에 최소한 1석 이상의 곡물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그런데 청룡현에서 출토된 금대 청동 ‘소과(술도가)’는 높이가 41.6센티미터이고 아랫부분만을 보면 높이가 26센티미터이며 입구가 28센티미터, 가장 볼록한 부분이 36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이렇듯 체적이 너무 작아 술을 빚기 위한 곡물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발굴된 금대 술도가는 어쩌면 화로수를 증류하기 위한 기기일 뿐 증류주기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반론한다.

이렇듯 학술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증류주가 언제 시작됐는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더 많은 고고학 발굴이 있기 전까지는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듯도 하고.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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