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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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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5.12  13: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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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응변(臨機應變)”

지혜는 민첩(敏捷)함도 포함한다. 옛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임기응변하는 지혜를 ‘첩지(捷智)’라 하였다.

춘추시기에 제(齊) 양공(襄公)에게는 아들 두 명이 있었다. 규(糾)와 소백(小白)이다. 관중(管仲)은 규를 따랐고 친구 포숙아(鮑叔牙)는 소백을 따랐다. 공자 규는 노(魯)나라로 몸을 피했다. 공자 소백은 거나라(莒國, 지금의 산동성 쥐(莒)현에 있었던 주대(周代)의 나라 이름)로 도피하였다. 오래지 않아 제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제 양공은 반란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제나라는 일시에 국군(國君)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공자 두 명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나라로 진군하였다. 귀국 후 왕위를 계승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공자 소백은 포숙아 등을 거느리고, 공자 규는 관중 등을 거느리고 귀국하다가 제나라 변경지역의 좁은 지역에서 만났다. 양보할 여지가 없었다.

   
▲ 관중 [사진=한국인문고전연구소 중국인물사전]

관중은 말은 탄 채로 소백에게 문후하는 척하다가 활을 뽑아들고 소백을 쏘았다. 적중은 했지만 소백은 죽지 않았다. 화살이 옷의 후크를 맞혔을 뿐이었다. 포숙아는 곧바로 소백을 뒤로 쓰러지게 한 후 화살 맞아 죽은 것처럼 가장하였다. 관중은 소백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가 규에게 보고하였다. “공자께서는 편안하게 국군의 보좌에 오르셔도 됩니다. 공사 소백은 이미 죽었습니다.” 규의 군대는 진군하는 속도를 늦췄다. 포숙아 일행은 공자 소백을 데리고 박차를 가하여 속도를 높였다. 달리는 말에 채질해 제나라 경내에 들어선 후 공자 소백이 국군 자리에 앉았다. 유명한 제 환공(桓公)이다.

포숙아의 총명과 재지는 날아오는 화살에 호응해 공자 소백을 뒤로 넘어지도록 하고 죽음을 가장하게 만든 데에 있다. 그의 지모는 질풍처럼 번개처럼 상황에 맞게 응변할 수 있었다.

송(宋) 태조 때에 장괴애(張乖崖, 장영張詠, 946~1015)는 성도(成都) 태수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 사열하고 있을 때 장괴애가 나타나자 모든 군인이 큰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장괴애는 듣자마자 당장 몸을 돌려 말에서 내린 후 도성 개봉(開封)이 있는 동북 방향으로 땅에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만세 삼창하였다. 뒤이어 몸을 일으킨 후 말에 올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봉건사회에서는 황제에게만 만세라 부를 수 있었다. 물론 장병들도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장괴애가 황제를 대표하고 있었기에 장괴애가 나타나자 그에게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하지만 장괴애는 그 일이 황제에게 전해진다면 구족을 멸하는 죄에 연루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괴애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다! 급한 중에 수가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장병들이 만세라고 외친 함성을 자기의 행동으로 멀리 도성에 있는 황제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아이의 지혜가 어른보다 뛰어날 때가 있다고도 한다. 특히 순간적인 기지는 어른을 훨씬 능가한다고. 이치에 맞는 말이다. 다음은 소년 둘의 임기응변이다. 위험한 상태를 안전하게 만든 이야기이다.

왕희지(王羲之, 303~361, 혹 321~379, 자는 일소逸少, 서법가로 ‘서성書聖’이라 불린다)는 어릴 적에 대장군 왕돈(王敦, 266~324)이 호감을 가졌다. 자주 왕희지를 불러 자기 군영에서 함께 잠을 잤다. 한번은 왕돈이 먼저 일어나 군영에 찾아온 전봉(錢鳳)과 함께 둘이서만 비밀리에 모반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어린 아이가 군막에서 잠을 자는 것을 깜빡하였다. 왕희지는 일찍이 일어나 있었다. 그들이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 일을 듣고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왕희지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한다. 손가락으로 목구멍을 쑤셔서 구토한 후 자기 얼굴과 베개를 더럽히고 나서 단잠에 빠져들었다는 듯이 잠을 잤다.

왕돈은 비밀 모의하다가 중간에서야 왕희지가 군막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질겁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저 애를 없애야겠군.” 침대 휘장을 걷고 깊은 잠에 빠진 왕희지를 쳐다보았다. 입안에서 흘러나온 오물이 얼굴과 베개에 잔뜩 묻은 채로 잠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본 둘은 아이가 여태껏 단잠을 자고 있다고 여겼다. 왕희지는 그렇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송나라 영종(寧宗) 때에 조방(趙方, ?~1221)은 형호(荊湖)일대에서 제치사(制置使)를 역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장병들을 위로해 포상하고 있었는데 하사품이 부족하자 군대에서 병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조방의 아들 조규(趙葵)는 당시 열두세 살이었다. 그가 그런 동향을 알아차렸지만 아버지에게 알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였다. 그때 곧바로 사람을 시켜 아버지 명의로 소리치게 하였다. “방금 나누어 준 것은 조정에서 하사한 선물이다. 본관에게 다른 하사품이 있다!” 말이 나가자마자 장병들의 마음이 평정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어떤 병고도 생기지 않았다.

어떤 지모는 고심하며 기획했기에 이루기 어렵다. 전력을 다하여 추구하기가 힘들다. 평상시에 수양이 쌓여야 한다. 평소의 소양이 있어야 임기응변할 수 있다. 고심하며 만들려고 하는 자는 그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최상의 것을 본받으면 가까스로 중간을 얻고 중간 것을 본받으면 그 아래가 된다.”

① 『사기·관안열전(管晏列傳)』 :

관중(管仲) 이오(夷吾)는 영상(潁上) 사람이다. 어릴 때에 포숙아(鮑叔牙)와 함께 놀았다. 포숙아는 그가 현명한 사람임을 알았다. 관중은 가난하여서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아는 끝까지 그를 좋게 대해주고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포숙아는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겼다. 소백이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라 제환공(齊桓公)이 되니 공자 규는 죽고 관중은 죄수가 되었다. 포숙아가 여러 차례 관중을 천거하였다. 관중을 써서 제나라 정사를 맡겼다. 제환공이 패자로 아홉 번 제후들을 소집해 천하를 안정시키니 관중의 지모 때문이다.

관중이 말했다. “내가 처음 가난하였을 때 일찍이 포숙아와 함께 장사하였다. 이익금을 나누면서 재물을 내가 더 많이 가져갔으나 포숙아는 나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아를 위해 사업을 도모했다가 더 곤궁해졌으나 포숙아는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익이 날 때도 있고 손해가 날 때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예전에 여러 번 관리가 되어 그때마다 군주에게 쫓겨났으나 포숙아는 나를 불초한 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여러 번 전장에 나가 그때마다 달아났으나 포숙은 내가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게 늙으신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糾)가 패하여 죽고 소홀(召忽)이 같이 죽었으나 나는 감금당하여 욕된 몸이 되었는데도 포숙아는 나를 염치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절의(節義)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功名)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포숙아(鲍叔牙, BC723 혹 BC716~BC644), 사(姒) 성, 포(鲍) 씨, 이름 숙아(叔牙), 영상(潁上, 현 안휘) 사람이다.

관중(管仲, BC723~BC645), 희(姬)성, 관(管) 씨, 이름 이오(夷吾), 자는 중(仲), 시호는 경(敬), 춘추시기 법가 대표인물로 영상(潁上) 사람이다. 주(周) 목왕(穆王)의 후손이라 한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② “최상의 것을 본받으면 가까스로 중간을 얻고 중간 것을 본받으면 그 아래가 된다.”(唐太宗『帝范』卷4)

“그 위에 것을 구하면 중간을 얻고 ; 그 중간 것을 구하면 그 밑에 것을 얻으며 ; 그 아래 것을 구하면 반드시 패한다.”(『孫子兵法』)

“그 위를 배우면 가까스로 가운데를 얻게 되며 ; 중간 것을 배우면 그것은 아래가 된다.” (嚴羽『滄浪詩話』)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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