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칼럼] 노무현은 말한다...선거와 4.3의 불편한 동거

2003년 10월의 마지막 날 정오. 제주시내 한 호텔에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연단에 오른 이는 현직 대통령 노무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나갔다.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 ···(중략)···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수립 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는 (4·3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기대했던 일이지만 일순간 장내는 얼어붙었다. 이어진 장면은 눈물바다였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4·3유족들은 한없이 울었다. 장내에선 한 유족이 벌떡 일어나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치며 목놓아 흐느꼈다. 물론 소식을 전해들은 제주도내·외 곳곳의 도민들도 한없이 울었다. 그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맺혔던 한이 풀리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듯한 눈물이었다. 감격이자 감동이었다.

한때 ‘빨갱이 섬’으로 낙인 찍혔던 제주에 4·3은 족쇄이자 시련이었다. 통곡과 절규를 쏟아내게 만든 참담한 현실이었다. 아비규환에서 살아 남은 자들에겐 ‘트라우마’였고, 산 자의 후손이나 죽은 자의 후손이나 모두 입에 떠올릴 수 없는 주제였다.

 

1980·90년대를 거치며 민주화 운동으로 힘을 얻었고, 학계의 연구성과가 더해지면서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르러 4·3은 정부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 위치에 올랐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2000년 1월12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법 제2조는 ‘4·3사건’을 이렇게 규정한다.

 

“4·3사건은 1947년 3월1일(3.1절 기념시위 사건)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날)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군·경 토벌대와 무장대 간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법률이 공포된 지 1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정부수반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가 있었던 것도 이제 9년 전 일이 됐다. 물론 그 아픈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일부 보수세력은 아직도 그 4·3에 대해 이념의 덧칠을 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4·3특별법에서 규정하듯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 당했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분단의 와중에서 빚어진 참혹한 일’이라는 것. 두가지는 명백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4·3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열강이 냉전(Cold War)체제를 만들어 갈 무렵 애꿎은 우리 제주에서 ‘대리전’으로 비화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대리전에 애꿎은 제주도민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승만 정부에게 4·3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암초였고, 그는 국가수립 초기 단계에서 분란의 씨앗을 아예 제거하려 했다. 국제적 역학관계의 틈바구니에 놓인 이 조그만 섬에서 ‘준 내전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영문도 모르고 ‘죽거나 죽여야’ 했다. 뼈 아픈 현실이었고, 골육상잔의 피비린내가 진동하기도 했다. 무장을 한 채 저항했던 입산 게릴라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사실 그 때 숨져간 대다수는 아무 힘도 없었고, 저항도 못해보고 그저 겨눈 총부리에 목숨을 내놓았다.

 

‘빨갱이’라는 이념의 덧칠을 하려는 측에선 인정할 수 없겠지만 ‘사회주의 조국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란 구호는 사실 당시 저항세력은 물론 제주도민에게도 키워드(Key Word)가 아니었다. 남로당 중앙당은 당시 조직을 보호하고자 ‘대중동원에 의한 정치투쟁을 주축’으로 하는 비폭력적인 정치활동을 핵심으로 견지할 때였다. 각 지방조직엔 “일체의 무장투쟁을 자제하고 합법적 방법을 선택, 조직을 보호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상태였다. 제주에서 돌발적으로 벌어진 전면적 무장봉기는 이 지침을 벗어난 것이었다. 남로당 중앙당은 오히려 사후에 이를 추인할 수 밖에 없었다. 제주에서 예외적으로 벌어진 일인 것이다.

 

제주에선 정작 해방이 됐는데도 친일세력이 준동하고, 외지에서 내려 온 서북청년단의 갖은 행패와 폭압이 만연했다. 그들은 준경찰인 양 움직였고 애국심을 시험한다며 태극기를 강매하기도 했다. 불응하면 폭행과 협박, 감금으로 되돌아왔다. 무법천지였다. 여기에 뒤이은 군·경의 과잉진압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이 민간에 총을 난사하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제주도민들이 정부군에 유린됐고, 한 발 더 나아가 제주도민들끼리도 ‘살기 위해’ 분열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경이니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선 당연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토굴에라도 들어가 숨어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십년만에 세상에 알려진 ‘다랑쉬굴’ 유해는 그것조차 불가능했던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개인의 사과가 아닌 국가수반의 자격으로서의 사과였다. 잘못된 과거의 공권력에 대한 현대의 반성이었다.

 

더듬어 보면 그런 성과는 제주도민 모두의 합심과 단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시절 제주의 여·야 정치인은 사실 서로 힘을 합쳤다. 4·3 희생자들을 위무하고, 명예회복을 기하는 데 있어서 오히려 더 좋은 법안을 만들어내고자 경쟁까지 하는, 제주도민으로선 흐뭇한 광경을 보이기도 했다.

 

언제나 4·3 추념일이 다가오면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4년마다 반복되는 총선과 겹쳐 4·3을 되돌아 볼 땐 마음이 더 무겁다. 어느 정당은 그 4·3이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양 선거소재로 활용하고, 어느 정당은 그 4·3과 관련된 이슈만 불거지면 방어에 좌불안석이다. 물론 유권자인 제주도민들도 선거판에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 분열하고 만다. 하필이면 총선이 4월에 있기에 이 때만 되면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

 

2003년 10월 그 현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공식사과’란 빅뉴스를 전한 뒤 이렇게 말을 맺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 냈습니다.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제주도는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화해와 협력으로 이 땅에서 모든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동북아와 세계평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아쉽게도 노 대통령이 내다 본 미래는 아직 더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4·3은 여·야를 떠나 제주도민 모두의 구심축이 돼야 하건만 아쉽게도 그 4·3은 지금도 선거판의 단골메뉴다. 갈등의 소재다. 진일보한 4·3의 해법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네가 잘했냐? 내가 잘했냐?’란 소리만 들린다. 4·3문제를 국회에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게 있다면 이것 역시 ‘네 탓이다’란 공방만 있다.

 

4·3은 결국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6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린 분열하고 있다. 억울하게 숨져간 그 때의 넋들이 바라는 게 이것이었을까?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15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