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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17)] 탕건노래

 

탕건노래는 갓 쓰기에 앞서 머리를 감싸던 말총으로 만든 탕건을 결으며 부르던 민요다. 조선시대부터 근래까지 탕건 겯기가 가장 왕성했던 제주에서 전승되었다. 제주에서 화북(禾北), 삼양(三陽) 등 제주시 일대와 신흥(新興) 등 조천읍 지역에 분포되었던 탕건 겯기는 양태, 모자, 망건 겯기와 더불어 제주도 부녀자들의 중요한 가내수공업이었다. 조천(朝天)은 과거에 조천관과 포구가 있어 내륙과의 문물 교류가 왕성했고 원료와 완제품 이출입이 용이했다고 한다.

 

고정종(高禎鍾)의『제주도편람(濟州島便覽)』에 의하면, “제주도의 공업은 유치한 수준, 단계로 제주도의 자원, 즉 자연환경을 이용한 약간의 자원을 가공하는 수공업 제품들 예를 들면, 죽제품, 조선모자(帽子), 탕건, 양태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이외에 주로 자급적 성격을 지닌 약간의 면직물 제품이 존재했다”고 한다.

 

1929년 조사에 의하면, 제주 도내 양태(凉太) 생산 종사 호수 1만3700호, 1개년 생산 수량 135만개, 생산액 40만5000원, 탕건(宕巾) 생산 종사 호수 128호, 1개년 생산 수량 9300개, 생산액 1만5810원, 망건(網巾) 생산 종사 호수 812호, 1개년 생산 수량 5만9000개, 생산액 5만9000원이다(조선총독부, 『생활상태조사 2 제주도』).

 

제주 전승 민요 ‘큰애기 타령’을 보면 “조천 근방 큰애기들은 망건 틀기, 신촌 근방 큰애기들은 양태 틀기, 별도(화북) 근방 큰애기들은 탕건 틀기, 도두 근방 큰애기들은 갓모자 틀기로 다 나간다”라고 나와 있다. 제주시 동부 지역인 화북(禾北)을 비롯해 조천읍 신흥리가 탕건을 만드는 중심 마을이다. 육지부, 특히 통영에서는 남자들도 갓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주에서 탕건 맺는 일은 주로 여성들에 의해 행해졌다.

 

탕건은 세공 제작이기 때문에 작업 규모가 작고 공구도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치밀하고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에 걸친 숙련이 중요하다.

 

김혜정 2대 탕건장에 의하면, “집중력과 유연한 손놀림을 지닌 사람도 정자관 하나 완성하는 데 6개월 정도 걸린다”고 한다. ‘탕건 짜는 소리’는 탕건청에서 밤낮 없이 이루어지는 작업 속에서 지루함과 고달픔을 달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탕건을 짜는 과정은 망건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공정이 필요하지만 작업 동작은 비교적 단순하다. 단지 섬세함과 끈기를 요구할 뿐이다. 사설 역시 고정적이기 보다 다양한데, 다른 노래의 사설을 빌려다 부른다. 주로 오일장에 내다 팔기 위해 탕건 짜는 작업 실태, 탕건 팔아서 쌀을 사고 옷도 사고 싶다는 서민들의 개인적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졸리거나 지루해 흥을 낼 필요가 있을 경우 ‘창부타령’과 같은 유흥요(遊興謠)를 불러 고단함을 달래기도 한다. 여성들이 부르는 노동요로 탕건청(宕巾廳)에서 함께 어울려 작업을 하지만 각자 나름의 탕건 만드는 작업을 하는 만큼 노래는 주로 독창 방식이다. 내용도 작업 독려보다 개인적 소망이 주를 이루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주 말총을 재료로 하는 이 탕건 겯기는 겯고, 삶고, 정리하는 세 단계 공정(工程)을 거치는데 그 품질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탕건 겯기는 손 놀리는 동작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원래부터 이에 관한 민요가 드물다. 그 가사(歌辭)는 주로 작업 실태에 대한 내용이다.

 

ᄒᆞᆫ 코 두 코 걸렴시난 삼벡 예싄 ᄆᆞ치난 장을 보게 뒈엿고나(탕건노래)

 

“한 코 두 코 걸리고 있더니 삼백 예순 코를 마치니 장을 보게 되었구나” 1950년 이전에는 탕건 생산 규모가 커서 제주시나 조천읍 일대 오일장에서 매매가 활발하였으며 전국은 물론 북간도(北間島)까지 팔려갔다고 한다.

 

ᄒᆞᆫ 덜(한달)이면 육장(여섯번 장)이로구나 심벡허는(경쟁하는) 탕건이라
얼씨구나 절씨구나 아니 노지는 못ᄒᆞ(하)리라
이내 탕건 ᄆᆞᆽ아(결어)그네 폴아그네(팔아) 쏠(쌀)도 받아 먹곡(고)
곤 옷도 해영(지어) 입곡(고) 헐꺼우다(할겁니다) 산지천물 돈 고뜨민(같으면)
우리 부모가 외로울소냐 저 바당이 소주 고뜨민
우리 아바지(아버지)가 무사(왜) 술 그리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아침 먹언(어) 오란(와서) 낮꼬지(같이) 
ᄒᆞ젠(하려고) ᄒᆞ난(하니) 손도라근 자기
몬 놀리키여 손이 떠부난(늦어서) 이젠두나 못 헐로구낭(하겠구나)이야(탕건노래)

 

* 산지천= 제주시 산지천(山地川)

 

탕건은 앞쪽은 낮고 뒤쪽이 높아 턱져 있다. 관직자(官職者)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망건 위에 썼다. 탕건은 옛날의 건(巾) 또는 두건(頭巾)이 중국의 조모(早帽), 복두(幞頭), 사모(紗帽) 등의 영향을 받아 지금 형태로 완성되었다고 추측된다.

 

중국의 ‘당건(唐巾)’이 우리나라에 옮겨지면서 탕건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는 마포(麻布)나 사(絲)로 하였으나, 우리나라 특히 제주에서는 말총으로 만들었다. 탕건은 원래 독립된 하나의 관모(冠帽)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冠)을 대신하여 썼다. 망건 덮개, 입모(笠帽) 받침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18세기말 영조 때『상방정례』에 보면 “왕과 세자가 착용(着用)할 제주의 탕건은 2~3건씩 왕실에 진상하도록 하였고 19세기에는 제주의 특산품으로서 장시에서 널리 판매되는 상품이었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망건, 탕건 등과 같이 조선시대 선비들이 착용하던 각종 관모 공예품들 대부분은 제주여성들의 기술과 노력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여겨진다(제주특별자치도,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 대사전).

 

탕건은 목침(木枕)에 서랍을 만들어 보관할 정도로 늘 몸 가까이에 두고 사용하였다. 탕건은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면 ‘감투 쓴다’고 하였다. 하지만 감투는 턱이 없이 민틋하게 생겼으며 탕건과 그 형태가 다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년 이년 이년이 탕건 ᄒᆞᆫ코 두코 ᄆᆞᆺ나아나지라
요 탕건 ᄆᆞᆺ아근(몾아) 장 보아그네(봐서) 우리집 온 식구 밥 먹고 살 탕건
탕건아 탕건아 나 탕건아 ᄒᆞᆫ코 두코씩 다 ᄆᆞᆺ아지라

 

이년 이년 이년이 탕건 요 탕건 ᄆᆞᆺ아근 장 보아그네
나 씨집(시집) 갈 때면 이불 ᄒᆞ영(하고) 갈 탕건 탕건아 탕건아 다 ᄆᆞᆽ아지라
이년 이년 이년이 탕건 요 탕건 ᄆᆞᆽ아근 장 보아그네
씨집이 갈 때믄 보선(버선) 주엉갈 탕건 ᄒᆞᆫ 코 두코씩 다 ᄆᆞᆽ아지라

 

요 탕건 ᄆᆞᆽ아근 장보아그네 일 년 열두 ᄃᆞᆯ(달) 밥 먹고 살 탕건
탕건아 탕건아 나 탕건아 요 탕건
ᄆᆞᆽ아근 밥 먹어 살 탕건
일년 열두
ᄃᆞᆯ 먹고 살 탕건 탕건아 탕건아 나 탕건아
ᄒᆞᆫ 코 두코씩 ᄆᆞᆺ아나지라(탕건노래)

 

탕건을 만드는 작업은 고단한 일이었다. 웬만한 참을성과 집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사람 머리카락보다 조금 굵은 말총을 작은 바늘귀에 꿰고 한 코 두 코 섬세하게 엮어 가며 만든 탕건은 탕건장의 땀방울과 끈기, 손끝 기술의 결정체였다. 이처럼 식구들 밥과 옷이 자신의 손끝에서 짜는 탕건에 의해 얻어짐을 알았던 제주여인들은 한평생을 밤낮 없이 탕건 짜는 일에 매달렸다. 그래서 제주에서 "우리 어멍 속 썩인 저 눔의 탕건"이라는 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탕건 재료는 말총이다. 쉽게 구겨지거나 부러지지 않고, 가볍고 땀을 잘 흡수할 뿐 아니라 더러움을 타지 않아 위생적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조랑말의 말총이 가늘고 질기고 부드러워 최고로 꼽혔기 때문에 탕건은 제주도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1895년 단발령 이후 일제의 감시 때문에 육지(주로 통영)에서 관모 생산이 중단되자 제주도의 탕건 수요는 더욱 늘었다(정경희, 2006).

 

요 탕건 뱁제근 인간을 가서 우리 어멍 속섹인(속썩인) 탕건이로다
탕건아 나 탕건아 ᄒᆞᆫ 코 두코씩 다 ᄆᆞᆽ아지라
요 탕건 ᄆᆞᆽ아근 장 보아그네 씨집이 갈 때민 담배상(사서) 갈 탕건

 

탕건아 탕건아 나 탕건아 ᄒᆞᆫ코 두코씩 다 ᄆᆞᆽ아지라
요 탕건 아근
ᄆᆞᆽ 씨집갈 탕건 요년이 탕건아 ᄆᆞᆽ아지라
요 탕건 이멍
ᄆᆞᆽ 장보아그네 ᄒᆞᆫ푼 두 푼 돈모일 탕건

 

탕건아 탕건아 요 탕건아 일년은 열두ᄃᆞᆯ ᄆᆞᆽ을 탕건
탕건아 탕건아 나 탕건아 ᄒᆞᆫ코 두코씩 다 ᄆᆞᆽ아지라
요 탕건 ᄆᆞᆽ아근 죽 채와그네(채워서)
조천장 가그네(가서) 돈 모일 탕건아

 

탕건아 탕건아 나 탕건아 ᄒᆞᆫ코 두코씩 자리 잘잘 ᄆᆞᆽ이라
동네에 요 친구랑 등피불에서도 요 탕건
ᄆᆞᆽ
가곡 오는 디(데) 몸 받은 탕건 일 년은 열두 ᄃᆞᆯ에 시름진 탕건

 

제주의 탕건은 홑탕건(疎宕)과 겹탕건(密宕)이 있으며 그밖에 바둑탕건이 있다. 바둑탕건은 이중사망(二重絲網), 삼중사망(三重絲網), 오중사망(五重絲網) 기법으로 사각 무늬를 놓았다.

 

탕건 만들기는 말총 다듬는 일부터 시작된다. 씻어 말린 말총을 나무로 만든 탕건골로 받쳐 가느다란 바늘로 형태를 짠다. 홑으로 한번만 엮어나가면 홑탕건, 2중, 3중으로 엮어 나가면 겹탕건이 된다. 더 섬세한 작업으로 정교하게 사각무늬를 넣으면 바둑탕건이 된다. 외형을 견고하게 굳히기 위해 골에 끼운 채로 두 번 삶아내고 그늘에서 건조시킨 뒤 칼로 정리한다. 노란색 말총은 참먹을 진하게 갈아 바르고 햇볕에 말려준다.

 

탕건을 겯는 데는 '쳇대기', '탕건골' 등 여러 가지 연장이 필요하다. 제작과정은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우선 겯고 난 다음에 삶고 먹칠하는 일을 거친다. 탕건은 밑으로부터 시작하여 위쪽으로 결어 가는데 정상으로부터 밑으로 결어 가는 갓모자 겯기 경우와 대비된다. 겯는 일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아랫부분부터 시작하여 한 차례 결어가는 과정과 날줄이 되는 말총 서너 가닥씩 지르며 감치는 과정이다.

 

탕건 맨 밑 부분인 '술기'로부터 '탕건바농' 이라는 바늘에 말총 한 오리씩 꿰어서 결어 간다. 턱진 데로부터 아랫부분인 '알통'을 모두 겯고 나면 윗부분인 '웃통'을 겯는다. 그 다음 감쳐 나가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곧 날줄 각각에 밑 부분 '술기'로부터 윗부분 '상지'까지 세로로 감쳐 나간다. 이 결은 탕건은 솥에 넣어 삶는다. 결어 놓은 탕건을 '탕진골' 모습으로 고정시키려는 작업이다.

 

탕건이 '탕건골'에 끼워진 채 몇 개를 솥에 넣은 다음, 이 탕건들 위로 물이 오를 듯 말 듯 물을 붓고 물이 끓자마자 꺼낸다. 탕건을 사들인 갓 장수들은 말총으로 만든 '목솔'로써 탕건마다 먹칠한 다음, 볕에 쬐어 말린다. 또한 턱진 부분이 펴지지 않도록 '자갑(紫甲)'으로써 단단히 고정시킨다(제주특별자치도,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 대사전).

 

제주도에서 행해지는 탕건 작업은 자기 집 방안에 작업하는 탕건 제작 도구를 놔두고 밭일이나 바깥일 하다가 여유 있을 때 일하기도 했다. 대개 2~3명 혹은 6~7명의 또래들이 혼자 사는 동네 여인 집에 모여 제작했다. 모여서 일하던 곳을 ‘일청’ 혹은 ‘탕근청(탕건청)’이라 불렀다.

 

탕건청에 비슷한 나이 동네 여성 10~20명이 모여 초저녁부터 11시경까지 작업하고 새벽에 일어나 집에 가서 밥 먹고 밭일 하러 나왔다. 이렇게 며칠이 걸려 완성시킨 탕건이 5개~10개가 되면, 제주시 관덕정이나 화북, 삼양, 조천 일대 5일장이 서는 날 새벽에 내다 팔았다. 1986년 15일에 한 개를 만드는 홑탕건과 겹탕건 한 개에 6만원, 바둑탕건은 한 개에 7만 원 정도 받았다(https://bluewaves.tistory.co).

 

제주도에서 탕건 짜는 기술은 주로 모녀간 세습(世襲)되는 경우가 많았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여자 어린이가 10여세에 이르면 어머니 무릎 앞에 앉아 탕건 짜는 기술을 보고 익히며, 15세쯤 되면 한 사람 몫을 거뜬히 해낸다.

 

전통적인 탕건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는 장인(匠人)을 탕건장(宕巾匠)이라 한다. 해방 후 제주도를 제외하고 탕건장들이 점차 사라져버렸다. 그러다 1980년 11월 제주여성 김공춘 장인을 중요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했다. 이후 2009년 2월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대 탕건자의 딸인 김혜정 장인이 국가무형문화재 제67호 2대 탕건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처럼 대를 이어 탕건 제작의 맥을 잇고 있다.

 

2020년 10월 3일 국가무형문화재 제67호 ‘탕건장’ 김공춘 명예보유자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9년생인 고(故) 김공춘 명예보유자는 말총 공예의 본고장인 제주에서 활동한 장인으로 1925년부터 고모 김수윤에게 탕건 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평생을 작업해온 장인이다. 1980년 탕건장 보유자로 인정됐고, 2009년 명예보유자로 인정되기 전까지 탕건 제작 기법의 보존과 전승활동에 헌신했다(제이누리).

 

<참고문헌>

 

高禎鍾(1930),『濟州島便覽』.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 연구』, 민속원.
조선총독부(1929), 『생활상태조사 2 제주도』.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
id=210402&mid=RC00003645&menuName=구술(음성)>민요
https://bluewaves.tistory.com/675(흐르는 강물처럼)
제주특별자치도,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 대사전.
정경희(2006), 「제주의 관모공예」,『제주도지』제7권, 제주특별자치도.
좌혜경 외(2015),『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채희숙(2017),『국회보』2017년 2월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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