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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64) ... 15차 가시리 쫄븐갑마장길 코스(3)

■ 헌마공신 김만일

 

제주출신의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김만덕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으로서 사업으로 대성하고 번돈을 백성들의 구휼에 희사했으니 그 은덕을 기려 마땅하다.

 

필자는 주저없이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을 제주출신의 대표 역사인물로 생각한다. 김만덕도 훌륭한 분이지만, 김만일은 그에 비해 역사의 평가나 후세의 인식이  너무 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분의 고향인 의귀리에 옷귀마테마타운을 만들고, 관련행사를 개최하고 있지만 아직은 홍보와 인식 부족인지 김만덕에 비해 아는 이가 많지 않은 듯 하다.

 

김만일은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김인찬 장군의 후손(8대손)이다. 김인찬의 아들 김검룡은 태종 때 제주의 행정을 총괄하는 도지관을 지내며 경주 김씨의 제주 입도조가 된다. 종달리에 묘가 있다.

 

김만일은 17세기 전후 격동의 조선사회에 크게 기여를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박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선조부터 인조까지 김만일의 공에 대한 숱한 기록이 있으나, 중앙의 인물이 아닌 변방의 인물이니 후대 역사가들은 별로 다루지 않은 것이다. 제주에서조차 외국인인 하멜은 알아도 김만일을 모르는 이가 더 많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위인의 실체적인 업적보다 스토리텔링과 홍보의 부족에 원인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주도 차원에서 김만일 부흥운동(?)이라도 해야할 판이다.

 

김만일은 당시 왜소해져만 가는 제주마의 개량사업을 통해 제주의 국영목장에 속한 말들보다 우수한 말들을 길러내어 2만마리까지 보유했었다. 지금의 녹산로, 따라비오름을 포함한 가시리일대 2000만평에 이르는 산마장을 개척하고 운영했다. 

 

다음 내용은 권무일의 역사소설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 중 김만일의 업적을 요약한 것이다. 저자가 스스로 발굴한 역사기록을 토대로 저술한 것이라 김만일의 업적에 대한 사실관계가 거의 일치한다고 본다.

 

○선조 19년(1586년)에 가리포(지금의 완도)에 왜적이 침입했을 때, 무과출신인 38세의 김만일은 100마리의 군마와 기마병을 이끌고 전라도 일대를 누비며 왜적을 소탕한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발발시 아들 대명을 대장으로하여 기병 200명과 기마 200마리를 보내 참전시키고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선조 27년(1594년) 봄 군마 100마리, 가을에 400마리를 헌납한다. 이때 선조는 중추부 동지사 및 가선대부(종2품)관직을 주고 공신록에 헌마공신으로 올린다. 이 때 9개월간 한양에서의 관직생활을 하나 고향에서 말을 키우기 위해 귀향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키우던 말들을 잡아 건육,힘줄,가죽등을 전시물자로 헌납하였다.

 

○임진왜란 종전 후 군마 2000마리를 바치라는 명의 요청에 결국 1000필을 헌납한다.

 

○선조 37년(1604년)에 제주에 극심한 가뭄과 태풍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곶간의 곡식을 모두 내어 백성을 구휼하였다.

 

○광해군(1608년 즉위)이 기병양성을 목적으로 김만일에게 군마 2000필을 요구하자 보냈는데, 광해군은 말 1필당 쌀20석또는 무명1동(1동은 50가구가 입을 옷감분량)으로 보상했다.

 

김만일은 이를 백성의 구휼에 사용했다.

 

○광해군10년(1617년)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군 파견을 요청하여, 광해는 김만일에게 말 2000필을 요구, 김만일은 2200필을 진상함. 결국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함으로써 후에 정묘호란 때 이 말들이 다시 조선땅을 짓밟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광해군11년(1618년) 김만일은 자의로 말 500필을 끌고 한양으로가 헌납한다. 광해는 보답으로 김만일에게 5위도총부 부총관(정2품)을 제수하나 얼마 안되 도성의 부정과 무능을 절감하고 다시 낙향한다.

 

○인조5년(1627년) 정묘호란 후 후금이 물러나면서 전쟁보상금으로 군마를 요구하여 240마리를 헌납한다.

 

○ 인조6년(1628년)인조는 김만일에게 말 500필을 징수하고 명예직인 종1품 숭정대부에 칭하나 김만일은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긴다.

 

김만일 사후 제주의 국마장이 붕괴되어 갔어도 김만일가의 산마장은 효율적으로 잘 유지되었다.

 

효종은 김만일 자손들에게 종 6품의 산마감독관을 하게하고 이를 세습하게 하였다. 김만일가 경주 김씨들은 고종때  세습을 폐할 때까지 240년간 83명이 산마감독관을 세습했고, 기근시 구휼활동을 꾸준히 했다.  영조때 산마감독관 김우천과 그 아들은 쌀 1500석을 내어 구휼하여 영조가 자신의 옷을 하사했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 지명이 이렇게 생겼다는 설이다.

 

김만일가는 2000만평이 넘는 산마목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녹산장, 상장, 침장으로 나누어 친족끼리 관리하였고, 선별된 양마를 관리하기 위해 별도로 따라비오름 근처에 '갑마장'을 두었다. 녹산장은 대록산(큰사슴이오름)에서 서쪽일대를 아우른다. 

 

 

 

국난의 시기에 국가가 해내지 못한 일들을 김만일은 해내었다. 이름 없는 수 많은 민초들의 삶도 역사이지만, 그래도 이 분 정도면 당당히 위인의 반열에 이름을 내어야 마땅하다.

 

역사영화나 드라마라도 한번 제작해봄이 어떨까. 관계자분들의 관심을 기대해 본다.

 

■잣성길

 

 

목장에서 키우는 말들이 한라산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쌓은 돌담을 잣 또는 잣담이라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잣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잣담을 대신하게 되었다. 잣담은 방목하던 말들의 관리를 위해서 산쪽으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해안가 농지방향으로도 쌓았었다. 가축이 작물을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곳에선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잣담을 볼 수가 있고, 이 잣담을 따라 난 길을 잣성길이라 칭하고 있다.

 

 

이곳의 잣담은 말이 한라산 방향으로 못가게 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 목장의 경계담인 듯 하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예전 김만일 일가의 갑마장과 상장의 경계로 보인다. 이 잣담을 경계로 남서쪽은 가시리, 북동쪽은 성읍리이다. 누군가 이 담을 따라 편백과 삼나무를 심었고 지금에 이른 듯 하다.

 

 

 

따라비 오름을 내려와 풍력단지까지 잣담을 따라 난 길이 약 2km 정도 된다.

 

 

나무사이로 걷는 기분이 꽤 즐겁다. 군데군데 쓰러진 나무로 길이 막히면 옆에나 있는 남영목장의 승마로로 걸으면 된다. 다만 잡초가 다소 무성하여 걷기에는 좀 불편하다. 갑자기 뱀이 나오지 않을까 덜컥 겁이나 다시 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30분쯤걸었을까. 풍력발전 단지로 통한 길이 나온다.

 

 

 

 

 

■풍력발전단지

 

 

 

이곳 풍력단지엔 제주에너지공사의 풍력발전기 13기가 서 있다.

 

 

어느샌가 제주의 들판엔 풍력발전기의 군상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문명의 이기가 주는 혜택은 누리면서, 생산시설에 대한 막연한 반대를 하는 일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만 가급적 자연환경과 역사,인문학적인 관계와의 조화를 최대한 이끌어 내는 선에서, 세월의 변화를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싯점이기도 하다. 요즘 이슈가 되는 제2공항이나 쓰레기 매립장 문제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유채꽃프라자

 

 

가시리 주민들은 옛 녹산장일대에 유채꽃프라자를 운영한다. 카페와 연수시설로 운영한다고 한다. 나들이에 지친 발걸음을 이곳으로 돌려 잠시 쉬어간다.

 

 

 

■녹산로

 

 

 

 

녹산로는 앞서 말한것 처럼 말 목장인 녹산장에서 유래한 도로명이다. 부지런한 가시리 주민들은 해마다 봄이면 수킬로미터에 걸쳐 길을 따라 유채꽃을 피워낸다.

 

 

예전에 말들이 뛰놀던 녹산장 일대에 난 녹산로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과 만개한 벚꽃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벚꽃은 금방 지기 때문에 4월 초순 일주일정도 벚꽃과 유채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꽃길을 볼 수 있다.

 

 

 

산마장을 종횡무진하던 김만일의 말들은 이제 아쉽게나마 조각상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엔 따라비 오름의 억새에 취해 볼 일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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