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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31)] 밀레질 소리

 

아허이 놀레로다 요 밀레야 놀고 나가라
어석비석 잘도 간다 아허이 놀레로다
물결소리는 처량도 허게 와랑지랑 나는구나
ᄒᆞᆫ(한) 질 가나
ᄒᆞᆫ 질을 오나 농부들이 ᄒᆞᆫ는(하는) 일이지
아하 먼 딧(데) 사람 듣기도 좋고 어허야 놀레로다
밑엣 사름은 보기도 좋고 어허어 놀레로다
곁에 사름 보실 제(때)는 두 번 일억 ᄒᆞ염시면은(하고 있으면)
어깨춤이 저절로 나네 농부 소리를 불러나 보라
실픈(싫은) 일을 그리운 듯(하고픈 듯) ᄒᆞ면 성도 얼마나 가실 소냐
어허어 놀레로다 밀레소리 와랑지랑
잘도 난다 잘도 난다 요 밀레야 저 밀레야
어서 살살 놀고나 가라 어허어 놀레로다
젊은 사람 알만ᄒᆞᆫ(한) 일 내가 ᄒᆞ다가 버치면은(힘들면)
어느 누가 ᄒᆞᆯ(할) 것이냐 어허어 놀레로다
어허 요 밀레는 지(자기)가고 싶은양 잘도나 간다
물결 소리는 와랑지랑 요만 ᄒᆞ면은 ᄒᆞᆯ(할) 만도 ᄒᆞ(하)지
요 일 성공시켜다가 부모 처자 봉양 ᄒᆞ곡(하고)

ᄒᆞ(하)다가 말면은(안하면) 어느 누가 ᄒᆞ(하)랴 어차
불쌍 실수가 뒈(되)면은 ᄒᆞ(하)던 일이 무효가 될 걸 어허어 놀레로다
이팔십이 당ᄒᆞ(하)여 가니 호흡이 바빠 안 뒈겟네(밀레질소리 서귀포시 대포동)

 

제주도에는 ‘대칩(이)’라는 토종 벼 종자가 있었다. 벼 파종은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直播)법, 비료 성분을 묻힌 볍씨를 물이 없는 논에 파종하는 건경(乾耕)법,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후에 전체 논으로 옮겨 심는 농사법이 이앙법이 있다. 육지부 논농사지역에서 이앙법(移秧法)은 조선 전기부터 행해지고 있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김매는 노동력도 6~7할만 사용해도 충분히 김매기가 가능하였다. 즉, 김매는 횟수와 김매는 노동력 자체가 덜 들어가는 농사법이 이앙법이다. 게다가 이앙법은 벼를 재배하는 동일 면적에서 직파법보다 더 많은 벼를 수확할 수 있다. 때문에 위험성이 있더라도 많은 수확을 가져다주는 이앙법이 인기가 좋았다. 다만 이앙법은 모내기 시절에 가뭄 들면 농사를 그르칠 위험이 매우 높다.

 

대포마을 논농사는 좀 다르다. 50여 전만 하더라도 대포마을 논농사는 직파(直播)법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포마을 김항선씨 증언에 따르면, 그가 12살 때 그 당시 제주의 기업가 박종실씨가 이 마을에 ‘금맥’이라는 볍씨를 최초로 보급했다고 한다. 박종실은 일제 강점기 제주의 대표적 기업가이다. 본관은 밀양, 호는 청암(晴巖), 아버지는 박원길(朴元吉)이며 어머니는 탐라 최씨이다. 부인은 진주 강씨이다. 아들은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朴景勳)과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박충훈(朴忠勳)이다. 박종실 어머니는 대포마을 출신이다. 그래서 대포마을에 박종실 소유 논이 많았다.

 

이러한 직파법의 논농사 과정을 보면, 청명이 지나 3월 10일 전후 일정 단계를 거쳐 파종(播種)한다. 만약 휴경했던 밭에 파종하기 위해 정, 이월에 일단 밭을 한 차례 갈아놓았다가 파종 직전 다시 밭을 간다. 특히 논밭의 흙은 성질이 강하다. ‘곰베’로 두들겨 흙덩이를 풀어주고 나서 물을 댄다. 원류(源流)에 가까운 상답(上畓)부터 물을 대어나간다. 대포마을 ‘동골왓’은 ‘검주와리’와 ‘배톤개’에 모두 물을 대고 난 다음 가능했다. 이 때문에 파종 시기가 보통 20일 차이를 둔다.

 

보통 논 100평이면 2되 정도 씨앗을 2~3일 동안 물에 담아 둔다. 씨앗 속에 어느 정도 물 기운이 스며들어야 파종 후 씨앗이 물에 뜨지 않는다. 씨앗이 물 위로 뜨면 새 먹이가 될 우려가 있고 물 위에 떠다닐 우려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씨앗을 물에 담근 씨앗을 뿌린다.

 

씨앗을 물에 담근 후 싹이 날 무렵에 뿌린다. 그래야 씨앗에 어느 정도 무게가 있어 물 위에 떠다니지 않는다. 보통 세 번 밭갈이 한다. 논밭은 찰지며 흙덩이는 탄탄하여 여러 번 밭 갈아 줄수록 잘 풀린다. 파종 한 달 전부터 파종 때까지 보통 세 번 갈아준다. 논갈이는 어렵다. 무턱대고 쟁기를 들이댄다고 논밭이 갈리지 않는다. 물이 맞아야 한다. 물이 알맞지 않으면 땅속으로 보습 날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쟁기의 볏에 붙은 흙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쯤 해두고 나서 써레질과 밀레질을 한다. 그 위에 씨앗 뿌리고 다시 밀레질 한다. 써레질은 소에다 써레를 매달아 놓고 조종해가며 논바닥을 고르는 일이다. 밀레질은 반달 같은 판자에 손잡이 막대를 부착시켜 만든 연장인 밀레로 논바닥을 고르는 일을 말한다.

 

파종하고 나서 첫 번째로 매는 논매기를 두고 ‘뫼골름 검질’이라 한다. 이쯤 묘종이 약 20cm쯤 자란다. 이때 논을 매어주고 동시에 묘종을 적당한 간격으로 유지시켜 준다. 듬성듬성 씨앗이 잘나지 않는 곳에 다른 곳에 난 묘종을 옮겨 심는다. 이 일을 묘종을 고르게 심는다는 의미에서 ‘뫼골름’이라 불렀다.

 

뫼살름 검질이란 논밭에 난 잡초를 제거하는 논매기 일을 이르는 말이다. 곧 잡초를 제거해줌으로써 잡초에 시달리는 묘종을 살려낸다는 의미이다. 6월 초순에서부터 7월 말 사이 대개 3번에 걸쳐 잡초를 제거한다. 논 김매기는 밭 김매기보다 많이 힘들다. 밭매기는 앉아 하는 일이고 논매기는 허리 굽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밭은 두둑이 뚜렷하기 때문에 그걸 기준으로 일을 해나가지만 논 김매기에는 그 두둑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9월 그믐 경부터 수확한다. 벼 베기는 음력 9월 중에 벤다. 벼 베기 15일 전에 물을 빼줘야 한다. ‘머흐네’ 논은 물을 뺄 수 없어 바지 걷고 베야 한다. 한꺼번에 베는 일은 흔치 않다. 대게 익어가는 대로 베어 나간다.

 

‘클’이 보급되기 전 ‘좁개’ 또는 ‘근대’라는 두 개의 나무막대 틈에 이삭을 끼워 훑어 탈곡했었다. 멍석 위에 벼 이삭을 널어놓고 방망이로 두들기며 까그라기를 떨궈나간다. 이 일을 ‘ᄀᆞ시락 꺼끈다’라 한다. 벼이삭의 까그라기를 꺾어 낸다는 말이다. ‘남방애’(절구)에서 찧거나 연자매(ᄆᆞᆯ고래)에서 돌려가며 껍질을 벗긴다.

 

어허허 밀레로다 어허허 산이로다
어허허 산이로다 높은 디(데)랑 밀어다가
야튼(얕은) 디도 메와(매꿔 가멍(며) 저 바다에 물결치듯
한라산에 구름일 듯 고근산에 안개일 듯
ᄉᆞᆯ짝 ᄌᆞᆯ짝(살짝) 밀어 보자 물결이 노는 구나
물 좋은 우리 강정 이 고장에서 태어나서
제일 강정 좋은 물로 풍년농사 지어보자
물결이 노는구나 실픈 일랑 그린 듯이
요 놀레(노래)로 날 보내자 먼 디(데) 사름(람) 보기 좋게
부지런히 ᄒᆞ여 보자 요런 날에 요일 허믄(하면)
누워 두서 떡 먹기여 실픈 일랑 그린 듯이
부지런히 ᄒᆞ여 보자 먼 디 사름 듣기 좋게
요 놀레로 우겨나 보자 후렴 해는 보난 서해 가고
오늘 일도 다 뒈는구나 그만저만 다 뒈어간다(밀레질소리 남원읍 위미리)

 

이앙법 논농사 과정을 살펴보면, 사월 초순 전후하여 묘판을 마련한다. 물이 시원치 않은 논 주인은 보다 물이 풍부한 논 주인에게 부탁하여 묘판 자리를 얻는다. 밭 간 후 물을 댄다. 물을 대는 동안 거름을 뿌린다. 거름은 속칭 ‘구린패기’라는 잡초다. 이를 베어다 깔아놓은 후 쇠스랑으로 논밭을 짓이긴다. 그 일은 힘겹기 때문에 노래를 곁들인다. 5월 초순이면 싹이 돋아난다. 오월 초순께 묘를 심는다.

 

쟁기로 밭갈이를 한다. 논 밭갈이를 잘못할 경우 흙덩이 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밭갈이보다 신중해야 한다. ‘네벳데기’로 갈되 보통 밭갈이보다 조금 얕게 갈아야 한다. 물대기는 ‘수수못’에서 발원(發源)한 물을 서로 나눠 댄다. 물이 시원치 않으면 농사 망칠 수 있다.

 

소에 써래를 매달아 놓고 조종해가며 논바닥을 고른다. 이 일은 논바닥 고르기보다 흙덩이를 부수어 논흙을 보드랍게 하는 데 있다. 이 일을 하며 일노래도 불렀다. ‘써레질소리’라 한다. 또 써래를 확보하기가 여의치 않은 집안에서는 쇠스랑으로 이 작업을 대신했다.

 

논밭에 난 잡초 제거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잡초 제거해줌으로써 잡초에 시달리는 묘종을 살려낸다는 의미에서 일명 ‘메살름’이라 한다. 6월 초순부터 7월 말 사이, 3회에 걸쳐 잡초를 제거한다. 밭 김매기는 무릎 꿇고 하는 일이나 논에서 하는 일은 무릎 펴고 어깨만 굽힌다. 그만큼 힘이 든다. ‘밭에서 김매기 2일 하는 공력이 논에서 하루’라는 농사 속설이 있을 정도로 논에서의 김매기는 어렵다. 또 논에 물이 없어 말라 버리면 잡초가 더 많이 날 뿐 아니라 뽑아내기 어렵다.

 

10월 초순 전후 수확한다. 베어낸 볏단을 한 며칠 동안 밭에서 말린 후 집으로 운반해뒀다가 틈나는 대로 훑어 장만했다.

 

어허허어 산이로다 어허어 밀레로다
높은 디랑 밀어다가 야튼 디로 메워 가멍(며)
새별코지 물결치듯 할락산(한라산)에 구름 일 듯
고공산에 안개 일 듯 ᄉᆞᆯ짝(살짝) 짝ᄉᆞᆯ 밀어 보자
물절(결)이 노는 구나 물 좋은 우리 강정 이 고장에 태어나서
제일 강정 좋은 물로 풍년농사 지어그네
나라에 진상 ᄒᆞ고 웃대(윗대) 조상 봉제 ᄒᆞ며
부모님께 공양 ᄒᆞ고 우리 권속 양식 ᄒᆞ자
물절이 노는 구나 이팔청춘 소년들아 백발 보고 희롱 말라
나도 어젠 청춘이더니 오늘 백발 뒈엇구나
젊었을 때 ᄌᆞ냥(조냥)해사 후제(후에) 나민(면) 호강 헌다
ᄒᆞ당(하다) 말민(면) 놈이나 웃나 부지런히 ᄒᆞ여 보자
먼 딧(데) 사름(람) 보기나 좋게 어서어서 ᄒᆞ여 보자
물절이 노는 구나 실픈(싫은) 일랑 그린 듯이 요 놀레로 날 보내라
이런 날에 요 일 ᄒᆞ믄(하면) 누워 두서 떡 먹기여
나 놀레랑 산 너머 가라 나 놀레랑 물 너멍(넘어) 가랑
오늘 날도 다 저믄다 그만 저만 ᄒᆞ여 보자
잠깐 전에 다 뒈엇저 물절(결)이 노는 구나(밀레질소리 서귀포시 강정동)

 

예로부터 제주지역은 지형적 특성상 논(水畓)이 농지 면적의 1〜2%에 불과했다. 이 문에 밭에 물 대어 논으로 만드는 개답(開畓)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 기록에 의하면, 18세기 말부터 수전(水田)이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중기부터 계속하여 개답 공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1900년 이후 제주지역에서 대표적 개답은, 화순 창고내 하류 지역, 중문 광베기와 대포 너베기 일대, 종달리와 하도리 경계의 갯벌, 토평 칼당원 지경, 광령 너븐들 지경 등이다.

 

중문(中文)

 

1906년부터 1908년까지 3년 동안 대정군수였던 채구석의 주도로 중문 천제연 물을 이용하여 중문 광베기 일대 5만평을 논으로 만들었고 1923년경 대포지역 너베기 일대 역시 논으로 만들었다(대포마을, 󰡔立式契約書󰡕).

 

천제연 양쪽 가에 3개의 물골이 있다. 동쪽에 웃골과 알골, 서쪽에 섯골로 세 개의 물골 중 섯골을 먼저 만들었다. 섯골은 지형이 험하고 군데군데 암반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원래 1893년 색달리 김천총씨가 착공하였으나 자본이 부족해 추진 못하다가 대정군수를 지낸 송경연씨가 이를 이어받아 완성해 개여물케 논을 만들었다.

 

그 당시는 단단한 암반 위에 장작을 쌓아 불을 붙여 뜨겁게 달구거나, 독한 소주를 붓고 불을 붙여 암반이 뜨겁게 가열된 상태에서 찬물로 암반을 급속히 냉각시켜 바위를 깨는 방법을 사용했다.

 

장작불로 바위를 부수고 뚫어 2km나 되는 물골을 베릿내 오름 앞까지 만들어 5만여 평 논을 만들어 벼농사 지었다. 첫 공사 구간은 천제연 1단 폭포(‘웃소’)에서 베릿내오름골 앞을 돌아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앞 밀레니엄관 일대까지 1889㎡이다. 일명 ‘웃골 수로’로 불리는 1차 공사로 이 일대 5만여 평의 땅이 논으로 바뀌었다.

 

화순(和順)

 

1832년(순조 32년) 3월부터 1841년(헌종 7년) 9월까지 10여 년 간 한경면 저지리 출신 김광종은 안덕 황개천(창고내 하류) 바위를 뚫고 화순천을 이용하여 대답원(大畓原) 일 만여 평을 개답했다. 호곤밭, 냇세왙, 퍼물, 너븐질왓 지경이다.

 

종달(終達)

 

구좌읍 종달리와 하도리 경계의 광활한 갯벌을 이롭게 이용하고자 하는 방안이 1890년경 당시 제주 판관을 지낸 채구석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금붕사 입구에서 ‘신속곶’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언제(堰堤)를 쌓아 논을 만들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해수가 땅 밑으로 솟아나면서 실패하였다(『地尾의 脈, 종달리지』.)

 

이후 1957년부터 지미봉 남동쪽 ‘펄갱이왓’ 지경 논은 과거 염전(鹽田)이였으나 개답하여 논농사를 지었다. 과거 이 지역은 바닷물을 이용, 소금을 생산하여 제주도 각지에 공급하고, 보리나 메밀 등 잡곡과 교환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 이후 사회가 안정이 되면서 정부 당국은 식량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에 대대적인 간척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간척사업이 시작되어 ‘연기동산’ 돌과 지미봉(地尾峰) 송이(scoria)를 운반하여 만 3년이 지난 1960년 12월 바닷물을 막아 32ha 간척지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이후 주민들의 계속적인 노력과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개답이 이루어져 1962년 이 간척지를 130세대에 분배하고 자금 염출에 열을 올렸으나 완전한 개답으로 만들기에는 시간과 자금, 노력이 많이 부족하였다. 그 후 6년 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968년 당시 북제주군 군수에 의해 다시 개답공사와 정지(整地)작업이 이루어져 1969년 비로서 논이 만들어졌다.

 

광형(光令)

 

너븐들지경에 1885년경 김부영이 물꾸왓 지역 개답을 목적으로 ‘매모를’ 목에 방축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묘상(苗床)을 설치했다. 그러나 어리목 수원을 무수천으로 유입시켜 저수시키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호우로 인해 방축이 무너지고 개답에 실패하였다. 1930년경 일본에서 돈 벌어온 백창유가 어리목에서 너븐들에 이르는 시멘트 수로(水路)를 완공하여 너븐들지경 10절 가량(당초 목표의 1/10가량)의 개답에 성공하였다(광령1리, 1990, 『광령약사』.). 현재 당시 수로(水路)가 남아있다. 그러나 어승생이 식수원으로 이용되자 농업용수가 모자라게 되어 현재는 폐답했다. 마을부인회에서 시범적으로 ‘흑도(黑稻)’를 재배하고 있다.

 

토평(土坪)

 

 
▲ 진관훈 박사

구한말 최원순(崔元淳)씨가 수리사용권(水利使用權)을 받아 토평 칼당원 지경에 8정(町)을 인수하여 개답했다. 10년 후 하천리 송상오(宋相五)씨에게 매도하였는데 그 후 1940년경 효돈 사람 6명이 매수했다. 이를 당시 면장 김찬익(金贊益)씨가 인수하여 효돈수리조합을 조직, 관리하던 중 해방되어 일시 중단되었다. 1946년 지주회(地主會)에서 인수 10년간 진력하여 미완성분을 준공시켰다. 즉 돈내코 수원(水源)을 이용하여 저수지와 수로공사 등으로 초창기 35ha 정도 개답(開畓)하여 논벼(나록, 水稻)를 재배하였다. 그러나 수원 부족으로 점차 줄어들어 10ha 정도 재배에 그치다가 육지부에서 쌀 반입이 늘어난 1960년대 초 완전히 폐답(廢畓) 되었다.

 

하효(下孝)

 

하효마을에서는 김인방씨가 이에 돈내코 수리조합에 합류하여 논농사를 했으며 이후에는 모내기도 위쪽에 있는 언물내에서 나는 물을 이용하여 신례리에 저수지를 만들고 예촌가름까지 논 만들 계획으로 수로 공사까지 마쳤으나 저수지에 물이 저장되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었다.

 

<참고문헌>

 

광령1리(1990), 󰡔광령약사󰡕.
대포마을(1920년대), 󰡔立式契約書󰡕.
제주도사연구회(1996), 󰡔제주도사연구󰡕 5집.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
cid=210402&mid=RC00003682&menuName=구술(음성)>민요
종달리지편찬위원회(1987), 『지미의 맥』.
좌혜경 외(2015),『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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