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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45)

큰 뜻이 있는 사람만이 큰일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분투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각각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자신만이 겪는 실패가 있다. 실패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좌절을 맛보면 소침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에서 경험을 삼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걸 바탕으로 일어나 노력하고 분투하여야 한다.

 

이밀(李密, 582~619)은 수나라 말기 대란의 시대에 살았다. 일찍이 양현감(楊玄感)에게 의탁해 와강채(瓦崗寨)에서 봉기한 후 축록(逐鹿) 전쟁에 참가하였다. 618년에 이밀은 동부에서 왕세충(王世充)의 부하에게 패하여 세력이 고갈되자 잠시 이당(李唐)에게 귀순하였다. 이후 다시 당(唐)나라에 반기를 들어 기병했으나 실패 후 사살되었다.

 

이밀은 난세의 효웅이다. 몇 번 일어서고 몰락하며 적지 않은 좌절을 맛보았고 실의에 빠졌었다.

 

위(魏)선생의 이름은 실전되었다. 그는 북주(北周)에서 태어났다. 유가 경전을 두루 섭력하였고 악장(樂章)에 정통하였다. 그럼에도 성정이 담박해 권세를 탐하지 않았다. 비파, 거문고와 더불어 술 마시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수나라 말기 천하대란의 시기에 세상을 벗어나 향촌에 은거하였다.

 

수나라 대업(大業) 9년에 수 왕조 황부상서 양현감이 여양(黎陽)에서 거병하였다. 좋은 기회를 이용해 세력을 대대적으로 넓혀나갔다. 짧은 시간에 10만 병력을 모병한 후 수 왕조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양현감은 유리한 전투 기회를 상실하면서 점차 곤경에 빠지기 시작하고 나중에 수나라 군대에게 수향(閿鄕)에서 격파 당한다. 양현감이 전투에 패하여 죽자 패거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밀은 그의 모사 중 한 명이었다. 조정에서 반드시 잡아들여야 하는 역적이 됐다. 죄를 사면 받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안문(雁門)으로 도망쳤다.

 

병법 36계 중 일단 달아나는 것[주위상(走爲上)]이 최상이라 하지 않았던가. 실패해 좌절을 맛본 사람은 참고 견디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피하여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한 차례 두 차례 좌절을 맛보고 곤경에 빠진 이밀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좌절과 실패 경험을 기틀로 삼아 천천히 동산재기를 도모하여야 했다.

 

 

이밀은 안문으로 도망간 후 지명수배를 피하려고 성과 이름을 바꿨다. 서책을 골라 훈장이 돼 입에 풀칠하였다. 당시에 위선생도 전란을 피하여 교묘하게도 안문에 은거하고 있었다. 위선생과 이밀은 동향이었다. 두 사람이 안면을 튼 후 자주 왕래하였다. 음악 분야 등을 탐구하면서 세상과 등진 탈속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초연한 의제를 가지고 이야기 나눈다하여도 타고난 성품이 남보다 뛰어난 총명한 자질을 숨길 수 없지 않던가. 뛰어난 지략가였던 이밀은 위선생과 이야기 나누는 도중에 자기 재능을 드러냈고 실의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밀의 그런 언행은 자연스레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상대 의중을 잘 알아차리는 위선생의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또 모옥에서 만났다. 집밖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위선생의 화제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는 농담 던지 듯한 어투로 이밀에게 말했다.

 

“내가 군의 안색을 살펴보니, 기가 꺾인 듯하고 눈빛이 평온하지 않소이다. 마음은 요동치는 듯하고 말투가 모호하기도 하오. 내가 추측해볼까요. 안색이 기가 꺾인 듯하게 보이는 것은 일이 성사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고 ; 눈빛이 평온하지 않은 것은 분명 마음속에 주관이 뚜렷하지 않는 것이겠고 ; 마음이 요동치는 것은 어떤 일이 결정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하고 ; 말투가 모호하니 말하고자 하나 도중에 그치는 것은, 분명 누군가를 찾아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 아니겠소!”

 

위선생의 말은 이밀이 마음에 숨겨둔 일을 벗겨내는 것이었으니, 이밀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위선생은 기색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그르지 않았음은 파악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이밀의 진면목을 파헤쳐 내어 말했다.

 

“오늘날 조정의 상하가 모두 양현감의 도당을 수색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대도 수양제 폭정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소.”

 

위선생의 말은 천청벽력 같이 이밀을 흔들었다. 한참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위선생의 예리한 눈빛에 굴복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선생님의 안목이 저를 알아차릴 정도로 고명함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선생님의 예지를 여쭙겠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저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위선생은 앞에 있는 이밀의 간절한 태도를 보고는 성심으로 말했다.

 

“군은 제왕의 풍채가 보이지 않소. 장군이 될 인재도 아니오. 그저 난세의 효웅일 따름이요. 내 직언을 용서하시오.”

 

그러고서는 위선생은 연이어 예지를 번듯이는 눈빛으로 당시 군웅이 할거하는 형세를 짚어낸 후 이밀에게 부귀를 구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밀이 대답을 망설이자 유일한 방도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위선생은 진양(晉陽)에 주둔하고 있는 이연(李淵)에게 찾아가 의탁하라고 권했다.

 

 

좌절을 맛보고 위험에 빠졌을 때 잠시 인내하고 수양하면서 냉정하게 자신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한 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순순히 받아들여 자신의 앞길을 열어가는 것도 곤경을 빠져나가는 방법 중 하나다.

 

이밀은 위선생의 말을 믿었다. 나중에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이연에게 의탁한다. 물론 잠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연에게 의탁할 동안에는 평안한 삶을 살아간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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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밀(李密, 582~619), 자가 법주(法主), 현수(玄邃), 집은 경조(京兆) 장안(長安), 그의 부친은 수(隋) 왕조 상주국(上柱國) 포산공(蒲山公) 이관(李寬)이다.

 

○ 양현감(楊玄感,?~613), 자는 현감(玄感), 홍농(弘農) 화음(華陰, 현 섬서 화음華陰시) 사람으로 수 왕조 대신이며 사도(司徒) 양소(楊素)의 큰아들이다. 예부상서에 올랐으나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침공 때 여양(黎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여 자살하였다.

 

○ 이연(李淵, 566~635) : 당(唐) 왕조 개국 황제로 묘호는 고조(高祖)다. 자는 숙덕(叔德), 장안(長安)에서 태어났다. 선비족 계통이었던 그는 서위와 북주 때 당국공(唐國公)이 되어 활약한 이호(李暠)의 손자다.

 

○ 상주국(上柱國) : 주국(柱國)과 상주국(上柱國)은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사용된 관직 명칭이다. 초(楚)나라에서 커다란 전공을 세운 자에게 상주국이라는 훈호(勳號)를 부여한 데에서 비롯돼 큰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부여되는 훈작(勳爵)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북위(北魏)에서는 ‘주국대장군(柱國大將軍)’이라고 불렸으며 승상(丞相)의 윗자리였다.

 

○ 축록(逐鹿) : 사슴을 쫓다 뜻이다. 정권이나 지위, 인기를 위하여 다투는 것을 말한다. “중원이 축록으로 되돌아가니 문필을 던지고 군사(軍事)에 종사하였다.” (『사기·회음후전(淮陰侯傳)』)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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