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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51)

항우(項羽)1와 유방(劉邦)2이 천하의 패주를 다툴 때 유방은 사소한 것에 신경 쓰면서 암암리에 세력을 키워나가 점차 깃털을 다 갖추게 되자 군대를 동원해 항우와 대치하였다. 국면이 온당치 않아 한 지역 군대가 전멸하면서 부친까지 항우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항우는 강압으로 쉬이 승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고 유방의 부친을 이용해 유방을 협박하였다.

 

유방의 낯짝이 더 두껍다는 것을 어찌 짐작할 수 있었으랴. 유방이 항우에게 말했다. “내 부친이 바로 당신의 부친이지 않소. 만약 당신이 당신의 부친을 삶아 먹을 수밖에 없다면 인자한 마음을 내어 내게도 한 잔 나누어주시구려.”

 

유방의 성공은 바로 “성공한 사람은 ‘뻔뻔하다’”는 이치를 증명하고 있다.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인은 가장 체면을 중시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면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유지한다. 존엄을 위하여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 “삼군이라도 그 장수를 빼앗을 수 있지만 필부라도 그 마음을 빼앗을 수 없다” ; “옥이 되어 부서질지언정 하찮게 완전한 기와가 되지 않겠다(차라리 옥쇄할지언정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 “서서 죽을지언정 목숨을 구걸하려고 무릎을 꿇지 않는다” ; “머리가 잘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 체면을 버릴 수는 없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무의식중에 타인에게 체면을 손상당했다 싶으면 자존심을 상처받았다고 생각해 여러 가지를 총동원하여 체면을 찾아오려고 애쓴다. 설사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른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중국인은 체면이 몸을 의탁하는 주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뻔뻔하다.’ ‘뻔뻔하다’는 말은 염치를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놀라지 않으며 이해와 득실을 초월해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너무 자신의 체면을 중시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한신(韓信)3은 항우의 초(楚)나라 군대에 투신하기 전에는 가난한 젊은이였다. 늘 보검을 차고 거리를 헤맸다.

 

어느 날, 불량스런 소년이 갑자기 앞을 막아서서는 우쭐거리면 말했다. “네가 늘 보검을 차고 다니고 체구도 우람하지만 실제론 겁쟁이에 불과해. 그렇지 않다면 너, 나를 죽일 수 있어? 나를 죽일 수 없다면 순순히 내 가랑이사이로 기어가야지!”

 

생트집을 잡아 도전하는 그 소년을 보고는 한신은 대단히 화가 났지만 곧바로 냉정을 찾았다. 허리를 숙여 그 소년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크게 웃어댔지만 한신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몸을 일으켜 길을 떠났다.

 

어려운 시절에 깊은 시름에 빠지지 않았다. 미천할 때 의기소침하거나 고민에 빠지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평범함과 어려움을 감내하면서도 결코 위대한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소양, 도량, 인품과 덕성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불개기락(不改其樂)”4했다는 안회(顔回)나 가능할 것이다.

 

불운을 당한 시기에 자기 이상의 표준을 낮추고 운명이라 여겨 머리를 숙이며 심지어는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더라도 인내하여 고분고분 굴종해 순종하고 허리 굽혀 굴종하며 ; 현재의 지위에 참고 견디고 범속함을 이겨내며 ; 무뢰한이 도발하더라도 냉정을 찾아 감내하며 ; 가랑이사이로 기어가는 치욕까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견디어 내는 사람도 있다. 어느 날 세를 얻으면 영웅의 기세로 천하를 횡횡하였던 인물은 한신, 경포(黥布)5 등이 있다.

 

이 둘은 비천한 신분일 때에는 멸시와 모멸을 당한 상황이 비슷하지만 심리상태는 확연히 다르다. 한 인물은 도덕, 인격의 귀감이다. 인생은 본래 평범하다 여기고 결코 영화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담담하고 욕심 없이 천지자연의 조화로운 기운과 청정 평안을 닦았다. 다른 한 인물은 영웅의 정서를 갖추고 있었다. 뜻을 얻었을 때에는 비범하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큰일을 위하여 모욕을 감내하였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의 종각(宗慤)6이야말로 이 두 종류의 정서와 도량을 겸비했다고 할 수 있다.

 

종각이 곤궁한 서생 때 동향인인 유업(庾業)이 그를 대단히 업신여겼다. 유업은 재산도 있었고 권력도 있었다. 부유하기도 하고 기개가 넘쳐나기도 해 연회를 베풀어 손님을 맞을 때마다 요리가 10여 종을 넘었고 주안상이 1장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공작에게 주어진 요리는 돌피 등 잡곡으로 만든 투박한 음식이었다. 종각은 예전대로 편안하게 식사하였다.

 

나중에 종각에 출세해 예주(豫州)태수가 되었다. 생사의 권한을 한 몸에 가지게 됐지만 유업이 자신을 멸시한 옛 원한을 염두에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업을 불러 자신의 장사(長史)로 삼았다. 종각은 과거의 치욕을 준 사람을 마음에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덕으로 구원을 갚았기에 역사에 미담으로 전해져 오게 되었다.

 

유업이 지체 높은 친구들이 꽉 찬 연회장에서 종각을 푸대접했지만 종각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뜻이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점은 한신, 경포와 서로 비슷하다. 종각이 뜻을 얻은 이후에 유업을 자신의 부하로 삼으면서 과거의 구악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그러한 숭고한 넓은 가슴을 지닌 어른의 풍모는 안회와 닮았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항우(項羽, BC232~202),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사수(泗水) 하상(下相, 현 강소江蘇 숙천宿遷시 지역) 사람이다. 진(秦)나라 말기 농민봉기의 우두머리다. 걸출한 군사전문가다.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의 손자다. 흔히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부른다.

 

2) 유방(劉邦, BC256 혹 BC247~BC195), 자는 계(季),패군(沛郡)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현 강소江蘇 서주徐州 풍현豊縣) 사람이다. 중국역사상 걸출한 정치가, 전략가, 군사전문가다. 한(漢) 왕조 개국 황제로 한고조(漢高祖)이다.

 

3) 한신(韓信, 약BC231~BC196), 서한(西漢) 초기 이성제후왕(異姓諸侯王)이다. 전국시대 한(韓) 양왕(襄王) 희창(姬倉)의 서손(庶孫)이다. 동명의 장수 회양후(淮陽侯) 한신(韓信)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역사서에는 한왕신(韓王信)이라 부르기도 한다. 유방을 도와 한우를 패퇴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4) 『논어(論語)』「옹야(雍也)」편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안회(顔回)여. 밥 한 그릇과 물 한 바가지를 먹고 마시면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근심을 남들은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子曰“賢哉回也.一簞食,一瓢飲,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 안회는 중국 노(魯)나라 현인으로 공자가 3천 명 제자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고 인정한 제자다. 《논어》에 “불행히 명이 짧아 죽어 지금은 없으니 그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듣지 못했다.(不幸短命死矣,今也則亡,未聞好學者也)”라며 공자가 요절한 안회를 그리워하는 문장이 있다. 공자는 가난한 생활과 어려운 처지에도 부족하다 여기지 않고 겸손하게 학문에 정진하는 태도를 훌륭하다 여겼다. 안회는 초야에서 청빈한 삶 속에 학문에 정진하는 은사의 표상이 되었다.

 

5) 영포(英布, ?~BC196), 구강군(九江郡) 육현(六縣, 현 안휘安徽 육안六安시) 사람이다. 진률(秦律)에 따라 경형(黥刑)을 받아 경포(黥布)라고 불린다. 진(秦)나라 말기 한(漢)나라 초기의 명장이다. 처음에는 항량(項梁)의 부하였고 이후에 항우(項羽)의 장수가 돼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졌다. 나중에 초(楚)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한 왕조가 건국된 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한신(韓信), 팽월(彭越)과 함께 한초(漢初) 3대 명장이라 불렸다. 한신과 팽월이 피살되자 두려움에 BC196년에 기병했으나 패하여 주살되었다.

 

6) 종각(宗慤què, ?~465), 자는 원간(元幹), 남양(南陽) 열양(涅陽, 현 하남河南 정주鄭州) 사람으로 동진(東晉) 서화가 종병(宗炳)의 조카다.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명장이다. 어릴 적에 숙부인 소문(少文)이 장래의 뜻을 묻자 “먼데서 불어오는 센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쳐 나가기가 소원입니다.(願乘長風,波萬里浪)”라고 하니 숙부가 “네가 부귀를 누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우리 집안을 파멸시키리라.(汝若不富貴,必破我門戶)”라 했다고 한다.(『남사南史·종각전宗慤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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