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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바벨 (3)

바벨탑을 쌓아 올라간 사람들은 대홍수의 ‘지정생존자’ 노아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신이 다시는 인간들에게 대홍수를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무지개까지 띄워 보여줬건만 영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또 다른 대홍수에 대비해 하늘까지 닿을 만한 높은 탑을 쌓겠다는 야심 찬 기획을 하고 실행에 옮겨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바벨탑’ 역사에 들어간다. 

 

 

사람들은 어쩌면 또다시 신이 분노하지 않도록 신의 뜻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홍수로 응징 당한 그 시절처럼 난잡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다면 제2의 대홍수는 필연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신은 인간들의 도발에 분노하고 이 괘씸한 인간들에게 또 다른 응징을 가한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에서부터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과 이토록 끝없이 부딪혔다는 것이 놀랍다. 콩가루 집안의 부모 자식 관계를 보는 듯하다. 

 

신은 공사 중인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간들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만들어 사방으로 흩어버린다. 대홍수와는 또 다른 차원의 응징이다. 바벨탑 이전의 세상은 ‘온 누리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산 마르틴 광장에 ‘21세기의 바벨탑’이라는 작품을 설치한 마르타 마누힌은 ‘바벨탑’을 세상 사람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의 마음과 뜻이 물 흐르듯 통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는 이상향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그렇게 이상향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이름 ‘바빌론’은 ‘바벨(babel)’에서 나왔다. 아마도 그 어디쯤에서 바벨탑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baby(아기)라는 말은 본래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비롯됐다. 갓난아기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영어로 babble이라고 하고, 오랑캐나 야만인을 뜻하는 barbarian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모두 바벨에서 파생된 말들이다.

 

한마디로 신이 응징한 ‘바벨탑 사건’은 인간을 살려는 두겠지만 신에게 도달하고 싶다는 인간의 이상향만은 좌시할 수 없다며 그것을 몰수해버린 것이다. 어쩌면 대홍수로 인류를 절멸시키려 한 응징보다 더 가혹한 응징일 수도 있겠다. 신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말고 서로 말이 달라 소통이 안 되는 인간들끼리 영원히 갈등하고 싸움질이나 하고 서로 죽고 죽이라고 패대기쳐버린 사건이다.

 

 

영화 ‘바벨’ 속 등장인물 모두 바벨탑을 부숴버린 신의 응징 속에서 전전긍긍한다. 서로 합심(合心) 하지 못하고, 서로 상대의 말귀를 알아먹지 못한다. 상대의 말들을 오랑캐의 말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무조건 적대시하기도 하며 질곡 속에 빠져든다.

 

리차드 부부(브래드 피트)는 어느 날 아이가 죽는 끔찍한 불행을 당한다. 그러나 ‘합심’해서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서지 못한다. 아이가 죽어가는 아픈 과정에서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파경의 위기에 봉착한다. 파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부가 모로코 여행길에 나서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소통의 왜곡과 단절이 만들어내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모로코에서 불의의 사고로 제날짜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 리차드는 두 아이를 돌보는 멕시코 가사 도우미 아멜리아에게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아멜리아는 당장 내일 멕시코에서 올리는 아들 결혼식에 가야만 한다. 리차드와 아멜리아는 상대방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히 서로 말귀를 알아먹지 못한다. 

 

아멜리아는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리차드의 두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로 간다. 아들의 결혼식이 끝나고 아멜리아는 조카 산티아고가 운전하는 차에 리차드의 두 아이들을 태우고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멕시코인이 미국에서 멕시코로 들어가는 건 쉬워도 미국으로 돌아오는 건 만만치 않다. 

 

결혼식에서 술도 많이 마신 산티아고는 국경 검문소에서 얼굴에 플래시 라이트를 들이대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경찰에 지은 죄도 없이 주눅 든다. 산티아고의 불안한 모습에 경찰은 점점 의심이 든다. 게다가 차 안에는 미국 아이 둘이 타고 있다. 경찰은 본격적인 조사 태세를 갖춘다. 산티아고는 짜증과 분노, 그리고 불안감에 휩싸이다 액셀을 밟아 국경을 돌파해서 도주하기 시작한다.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미국에 산 지 오래된 산티아고와 아멜리아는 분명 훌륭한 영어를 하고 있지만 국경 경찰에게 그들의 영어는 아기들의 옹알이나 오랑캐의 이방의 언어처럼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의심이 모든 소통을 차단해서다. 산티아고도 국경경찰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설명’을 포기하고 대신 절망적인 도주를 선택한다.

 

수조차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소위 ‘잠룡’들이 오늘도 무수한 말을 쏟아내는데, 듣는 국민 입장에서는 왠지 갓난아기들의 옹알이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이방인의 말처럼 생경하기도 하다. 때로는 나라를 침범한 오랑캐의 말처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적개심부터 생기기도 한다. 이래저래 당황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이 다시는 마음이 통하고 단결할 수 없도록 한 신이 내린 바벨탑의 응징은 참으로 영험하다면 영험하고 가혹하다면 가혹하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말귀를 못 알아먹고, 상대가 알아듣든 말든 자기 말만 하고, 서로를 향해 의심과 적개심을 키워간다. 다시는 바벨탑을 쌓을 엄두도 내기 어려울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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