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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人] 제주대 1회 졸업생 김찬흡 이사장
제주대 개교 60주년 맞아 김 이사장이 말한 초창기 대학의 모습은

제주대학교가 27일 개교 60주년을 맞는다. 제주도의 인재 양성소 제주대학교. 제주대의 첫 출발은 초라했다. 아니 대학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규모가 큰 서당(?) 이라고나 할까? 학생 수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제주대의 전신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2년 8월 제주향교 건물을 빌려 개교한 제주초급대학이다.

 

1952~1953년 정부가 추진한 개방적 고등교육 정책으로 지방 국립대학 설치 사업이 추진됐다. 제주에서도 제주학교 명륜당에 설립한 제주대학원을 모체로 1952년 5월 국문과, 영문과, 법학과, 축산과 등 4개 학과의 제주초급대학이 인가됐다.

 

1953년 9월에는 삼도1동 옛 제주농업고등학교 임시 건물에서 인재를 길러냈다. 1954년 6월에 현재 사범대학부설 중·고교가 있는 용담2동에 캠퍼스를 마련했다. 그 뒤 1955년 4월 도립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됐다.

 

60년이 지난 지금 제주대학교는 제주도의 상아탑으로 당당히 우뚝 섰다. 학생 수 1만여명이 넘는 지식의 요람이다.

 

치열한 살육전이 한창이던 한국전쟁 중 큰 꿈을 안고 제주대학의 문턱에 넘나들었던 당시 1회 졸업생에게 제주대는 아직도 설레는 곳이다.

 

 

제주대 1회 졸업생들의 모교에 대한 생각은 어땠을까?

 

향토사학자 김찬흡(80) 제주도교육의정회 이사장은 제주대 1회 졸업생이다. 1953년 제주농고를 졸업하고 제주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에 1957년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애월상고를 시작으로 20년여 동안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82년부터는 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구좌읍 연평중학교(우도면) 교장으로 재직하던 1983년에는 우도의 경승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우도8경을 발굴해 명명하기도 했다.

 

북제주교육청 교육장은 물론 제주도교육연구원 원장, 제주도 교육위원, 북제주문화원 초대 원장 등도 지냈다. 지금은 제주도교육의정회 제3대 이사장과 제주향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 이사장을 만나 60주년을 맞는 제주대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제주대학교가 올해로 개교 60주년을 맞았다. 1회 졸업생으로서 소감과 졸업당시가 궁금하다.

 

“벌써 60년이 됐나? 감회가 새롭다. 너무도 많은 것이 변했다. 돌이켜 보면 제주대 60주년은 제주의 자랑이다. 60주년을 계기로 제주대 출신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한다. 졸업식 당시 누군가 송사를 했고, 내가 답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장과 함께 학사증을 받은 것 같다. 요즘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당시는 모두 순박했다. 오염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제주대는 어떻게 세워졌나?

 

“처음에는 제주대학원(濟州大學園)이었다. 1951년도 말부터 제주향교에서 공부하다 이듬해 2년제 도립 제주초급대학이 생겼다. 최승만 도지사(제6대 제주도지사[1951~1953년]·제주대 초대학장)와 길성운 도지사(제7대 도지사[1953~1959년])가 많은 공을 세웠다. 백낙준 장관(제2대 문교부 장관[1950~1952년])이 당시 각 도에 국립대 1개씩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전국 대부분의 국립대들의 나이가 비슷할 것이다. 당시 제주도는 인구가 적어 대학을 설립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 지사는 친분이 있던 백 장관에게 간청을 한 끝에 2년제 대학을 설립하게 됐다. 그게 초대(도립 제주초급대학)다. 내가 1회 학생이다. 길 지사는 초급대학을 4년제로 승격(1955년 4월)시키는데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당시 국문과, 영문과, 법과, 축산과 4개과가 있었다. 학생은 100명, 교수는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1955년도 말이 돼서야 용담동 사대부고 자리에 진짜 학교가 들어서게 됐다. 1959년에 건축가 김중업씨가 설계한 제주대학교 본관 건물은 걸작이었다. 낙천적이고 낭만주의 경향을 띠어 문화재 감이었다. 당시 대학 건물을 그대로 놔뒀어야 하는데…. 1989년도쯤인가 철거됐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학창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당시 대학을 나온 분이 거의 없어 교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초창기여서 학사 운영도 상당히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학생들은 무척 열심히 공부했다. 학생이 없는 가운데서도 1회와 2회 졸업생 가운데 각 1명씩이 고시에 합격할 정도였다. 지난해 10월 작고한 김종배 전 제주지법원장이 2회 졸업생이다. 당시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읍·면 단위로 하나씩 생겨났다. 교사가 필요했다. 교사가 없어 졸업생 대부분이 중·고 교사로 취직했다. 그런 면에서 제주대는 인재를 양성했던 곳이라 볼 수 있다. 법과(법학과) 학생은 사회나 지리 과목을 가르쳤다. 국문과(국문학과)는 국어, 영문과(영문학과)는 영어, 축산과(축산학과)는 과학이나 생물을 가르쳤다. 나는 애월상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애월상고가 첫 직장이자 부임 학교다.

 

 

-학교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4.3사건이 일어나고 6년 뒤인 1954년 한라산이 개방됐다. 당시 제주도는 한라산에 5명의 무장대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돼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마지막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이 포착되지 않자 신상묵 제주경찰국장(1954년 8월~1956년 6월, 현재의 제주지방경찰청장)이 그해 9월 한라산 금족령(산중 입산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함)을 해제하고 한라산 개방을 선언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에서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다. 한라산이 개방됐으니 ‘정상을 밟아봐야지 않겠나’하고 생각하며 대자보를 붙였다. 100여 명이 가겠다고 몰려들었다. 길 도지사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그런데 학생들은 500원씩을 내고 군 트럭 2대를 빌린 뒤 무기마저 구입한 상태여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당시 무장대가 있어서 한라산에 오를 때에는 만일을 대비해 총기를 빌려줬다). 산천단에서 5~6시간 만에 정상까지 오른 것 같다. 그때는 혈기 왕성한 때라 거칠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날아다녔다(웃음). 다행히 무장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서귀포 쪽으로 하산하는 도중 7~8명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튿날 만났더니 방향을 잘못 잡아서 대열에서 이탈했다고 한다. 한라산 등반 자체가 큰일은 아니었지만 120명이 단체로 정상을 밟았을 때는 모두가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그 때는 학생들이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단결력도 좋았다”

 

-지금 후배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달라.

 

“예전과 지금의 제주대를 비교한다면 말도 못할 정도로 대단한 변화가 이뤄졌다. 당시에는 도서관, 연구실 이런 게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아주 열악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얼마나 공부하기 좋은 환경인가? 평소에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 나 같았으면 무척이나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책도 많이 읽고 전공 분야와 관련한 부분에서도 열심히 했으면 한다.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 하고 싶어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젊을 때 놀기도 해야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게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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