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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살다] 권혁란, 전국 유명세 당근케이크 ‘하우스레서피’
하와이보다 더 좋은 제주…귀덕리에서 그는 ‘왕언니’로 통해

1977년이었다. 그의 나이 26세. 결혼과 함께 거침없이 뉴스를 진행하던 방송사 스튜디오 데스크를 떠나야 했다. 남편을 따라 떠났던 해외에서 프리랜서 리포터로, 토크쇼 진행자로 다시 마이크를 잡을 수 있었다.

 

해외 생활 도중 ‘우리나라에는 하와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 돌아가면 그 곳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차(茶)에 관심을 많았던 그는 ‘조용한 찻집을 열겠다’는 계획까지 잡았다.

 

귀국 후 그는 가장 자신 있는 당근케이크를 만들어 팔았다.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인력 관리라는 게 너무 힘들었다. 제주가 당근의 주산지라는 사실을 알고 찻집을 포기하고 제주에서 당근케이크 가게를 내자고 결심했다.

 

그는 이제 제주를 찾는 여행자들은 물론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제주당근케이크’를 만드는 제빵사가 됐다. 그의 이름은 권혁란(61).

 

제주시 한림읍 귀덕1리 일주도로에 ‘하우스레서피’라는 작은 빵집이 있다. 조금은 허름한 집이지만 하얀 건물에 예쁜 자전거와 작은 화단으로 디스플레이 됐다. 문을 열자 구수하고 달콤한 빵 냄새가 진동한다.

 

# 결혼 후 더욱 활발해진 방송 활동의 인생 2막

 

권씨는 MBC아나운서 출신이다. 1974년부터 77년까지 4년간 뉴스와 교양프로그램, 어린이프로그램,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자 등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77년 대학 동기이자 캠퍼스커플이었던 ROTC 출신의 남편 김경화(61)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하면 퇴사해야 한다’는 지금으로서는 황당한 사규(社規)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내려놔야 했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포항제철(지금의 포스코)에서 고(故) 박태준 사장의 비서로 근무하던 남편은 이내 시험까지 치르면서 해외근무를 자청했다. 1980년(29세). 2살 난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의 엄마 권씨의 해외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인디아나, 멕시코시티,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을 돌며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세탁소, 마트 점원(캐셔·cashier) 등으로 파트타임(part time)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그의 손에 다시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미국생활 5년 만에 KBS프리랜서 리포터로 활동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에는 올림픽 방송을 교포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3년 뒤에는 워싱턴DC에서 KBS라디오통신원으로 활동했다.

 

 

권씨는 미국의 각종 소식을 한국으로 전달했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특파원보다 일이 더 많았다. 걸프전 때에는 하루 종일 소식을 전했다. 미 국방성, 외무성, 백악관 등에서 나오는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이라크 전쟁 때에는 KBS본사로부터 ‘속보상’을 받기도 했다.

 

현지방송도 했다. 1993년(42세)에는 ‘라디오 코리아 뉴욕’에서도 아침 시간대에 앵커를 했다. 새벽 4시30분에는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해 두고 출근해야 했다. 혼자 모든 것을 하는 시스템이어서 팩스로 들어오는 한국과 미국, 국제 뉴스를 편집하고 진행했다. 아무도 없는 빌딩 12층에서 혼자서 마이크와 대화를 나눴다.

 

소수민족을 위한 방송 WMBC(Mountain Broad Casting) TV에서는 ‘권혁란의 63초대석’이라는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황금시간대 방송이 됐다. 당시 그는 UN에서 연설하기 위해 방문했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총재)을 특별인터뷰 하기도 했다.

 

사실 그에게는 한국에서 아나운서를 했던 인생 1막보다 더 바빴던 인생 2막이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99% 노력하는 성미여서 오히려 그에게는 해외생활의 큰 활력소가 됐다. 그의 입담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통한 것이다.

 

# 제주에서 당근과 함께 한 인생 3막

 

2002년 말(51세) 권씨는 아들을 군에 입대시키기 위해 귀국했다. 귀국 후 ‘이제는 방송을 그만 접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1년 반 동안 외국의 유명연사를 한국의 행사에 참여시키는 스피커에이전시(speaker agency) 활동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땅이 있었다. ‘제주’였다. 해외 생활 도중 들른 하와이는 제주도와는 비교도 안 됐다. ‘귀국하면 제주에 살겠다’는 생각을 늘 간직했다.

 

제주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려고 차근차근 준비를 했다. 제주 지역 신문을 인터넷으로 보고 TV에서 제주 관련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제주지역 날씨에도 관심을 가졌다. 제주에서 열린 ITOP Forum(Interisland Tourism Policy)과 중동평화세미나에서 동시통역 진행을 맡아달라는 부탁에도 선뜻 나섰다.

 

그때 당근의 주산지가 제주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흥분됐다. 제일 잘 만드는 것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4년(53세) 서울 청담동에 베이커리를 내고 당근케이크를 팔았다. 입소문에 백화점에서 입점해달라는 부탁도 받아 입점도 했다. 점포당 2~3명의 직원까지 거느렸다. 하지만 이런 생활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꿈에 그리던 제주로 내려왔다. 2009년 3월5일. 권씨의 제3막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나이 58세 때다.

 

-당근케이크는?

 

“미국에서는 흔한 케이크다. 누구나 만들어 먹는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이 만들고 미국 빵집에서 파는 당근케이크는 별로 맛이 없고, 달고, 퍽퍽했다. 그래서 조리법을 달리 해 달지 않게 만들었다. 크리스마스 때에는 100여개를 만들어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귀국 후 모교인 연세대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당근케이크를 만들었다. 금세 동이 났다. 몇 달 고민하다가 인생 후반부를 당근케이크에 걸기로 했다. 지금의 당근케이크 맛은 제주당근이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전의 것은 지금처럼 촉촉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맛은 아니었다. 수분이 많고 당도가 높으니까 굉장히 많이 달라졌다. 이보다 더 좋아질 수는 없을 것이다(웃음)”

 

-왜 제주당근인가?

 

“당근은 당뇨병 환자나 암 환자에게도 좋다. 특히 제주당근은 당도가 높고 수분이 많아 몸에 좋다. 특별히 설탕을 쓸 필요가 없다. 제주당근은 갈아 쓰면 반죽이 질어진다. 그래서 채를 쳐서 해야 한다. 내가 만드는 당근케이크는 화학첨가제를 쓰지 않는다. 유기농당근, 유정란, 통밀가루를 쓴다. 필요한 경우 약간의 유채·카놀라유도 쓴다. 친환경이다 보니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금액만 받고 있다. 재료를 생각하면 인건비를 줄여 좀 더 좋고 저렴한 제품을 만들려고한다”

 

 

-하루에 얼마나 만드나?

 

“아침 5시30분~6시에 출근해 작업을 시작한다. 오전에 택배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바쁘다. 만드는 양의 25% 정도는 매일 육지로 올라간다. 지난해 서귀포 이중섭거리에 작은 가게를 냈는데 남편은 거기서 번역 일을 하면서 소량만 판다. 하루에 당근 20~30kg을 소비한다. 많으면 40kg 정도 사용한다. 케이크와 머핀을 만들기 때문에 하루 평균 몇 개를 만드는지는 모른다. 머핀으로 만들면 약 400개 정도. 만들 수 있는 만큼만 만들고 있지만 요청이 오면 조금 더 만들기도 한다. 화요일은 쉬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인터넷 각종 블로그에도 많이 올라올 만큼 유명세다.

 

“하루에 관광객 30~40명 정도가 들른다. 대부분 인터넷과 소문을 통해 알고 오는 경우다. 여기서 차와 케이크를 먹으면서 쉬었다 간다. 제주에 도착하면 첫 방문지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매년 왔던 관광객들이 돌아가면 택배를 통해 주문한다. 또 주위사람들에게 소개를 시켜주거나 자신의 블로그에도 올린다. 사실 혼자하기도 힘들 정도이지만 신이 나 힘든 것도 모를 정도다(웃음).”

-당근 주산지는 제주시 구좌읍이다. 그런데 사는 곳은 정 반대다.

 

“처음에 구좌읍에 가려고 했다. 2008년 제주에 왔을 때 구좌당근이 너무 얌전했다. 당근주산지라는 것을 알리는 당근모양의 간판 하나도 없었다. 혼자만 짝사랑했던 것 같았다. 당근 관련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구좌읍사무소에 찾아가 읍장에게 ‘당근을 가지고 대학도 보내고 발전이 돼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읍장이 관내 이장 13명 모이는 자리 만들었다. ‘당근 홍보관을 만들고 당근 주산지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내용의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끝난 다음에 나이 많으신 이장이 ‘출신이 어디냐’고 질문했다. ‘당연히 제주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제주에 내려오면 죽을 때까지 살려고 한다’고 말했다. 구좌 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런 제안을 한 것이 무슨 연유인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살 집을 찾다가 ‘제주는 어느 지역에 가도 아이템만 확실하면 사람들이 다 찾아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울을 보는 심정으로 이곳 귀덕리를 선택했다. 지금 언론이나 TV에서 제주당근 좋다고 홍보를 하는 것을 (구좌 주민들이)보면 아마 반은 놀라고, 반은 배신감을 느낄 것 같다(웃음).”

 

 

-자식들은?

 

“우리 부부에게 미국 영주권의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은 늘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일부러 귀국했다. 처음에 아들은 ‘왜 군대에 가야 하느냐’며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군대 생활에 곧 적응했다. 살도 빠지고 건강해졌다. 휴가 때에는 집안 청소도 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영어조교로 근무했다. 아들은 이제 ‘남자라면 군대에 한 번은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다. 연예인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들은 이제 결혼해 서울에서 살고 있다. 우리 부부가 내려온 것에 대해 ‘며느리’가 더욱 좋아한다. 제주에 갈 수 있는 핑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1년에 2번 정도 내려온다”

 

-귀덕리 생활에 불편함은 없나?

 

“귀덕리는 좋은 곳이다. 인터넷 생활정보지에서 이곳을 찾았다. 집을 구하자마자 서울에서 5t트럭에 모든 짐을 다 싸고 내려왔다. 남편은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기 때문에 어디든 관계가 없다’고 했지만 ‘당근하나만 보고 내려간다’고 약간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남편은 이곳 생활에 만족해한다. 서귀포 가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물론 기상이 나쁘면 타고 다니지 않지만 중산간 도로를 지나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즐기라고 만들어준 길 같다’고 감사히 생각한다. 몸국, 성게미역국, 고기국수 등 제주음식도 잘 먹는다. 담담하고 건강한 음식이다. 남편은 내려오자마자 귀덕초등학교에서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쳤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학부모들과도 친해졌다. 농산물도 자주 갖다 주고 간다. 마을 지도자들도 마을에 일이 있으면 우리 부부를 불러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또 마을에 정착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한다. 동네에 경조사가 있으면 연락이 온다. 가서 일도 도와주고 같이 즐기기도 한다. 나는 동네에서 ‘왕언니’로 불린다. 우리 부부는 이제 마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리 부부에게 이제 제주를 떠나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제주에 내려온 뒤 3~4차례만 서울에 갔을 뿐이다. 아마 제주에서 쫓겨나면 바다에 빠져 죽는 일 밖에 없을 것이다(웃음). 하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남편은 지금도 읍내 도서관에서 영어강좌를 하고 있다. 청소년들을 위해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전달할 것이다. 나는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 동네 주민들을 위해 환경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바다가 맞닿아 있어 습기가 많은 이곳보다 좀 떨어진 중산간에 건축가인 딸이 설계해준 에코하우스를 짓고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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