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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14)

나에게도 괴롭고 험난했던 가족사가 있다. 그 어려웠던 시절 그런 어려움을 겪은 도민들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내가 어려서 세상을 모를 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서운해 한 적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익혀가면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버렸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당신의 삶에서 원칙과 가치의 끈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던 나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나도 아버지가 추구하던 그 길을 가고 있었음을 알았기에 이를 다만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 싶을 따름이다.

 

“다이아몬드인 줄 알았는데 고작 연탄재 같은 놈이었단 말이냐? 형편 없는 자식!”

 

육사에 입교한 뒤 그렇게 나를 자랑스러워 하시던 아버님은 그만 내가 사관학교 4년 중퇴의 몰골로 고향 제주로 내려오자 이렇게 말했다. 그 분의 실망은 컸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난 1965년 늦은 봄 육사에서 자퇴했다. 젊은 시절의 열정 탓이었다. 고교를 마친 난 솔직히 서울법대로 진학하고 싶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갈 곳은 그곳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도 난 양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버선을 신고 다녔다. 동가숙 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면서 살다보니 하루 세끼 제대로 밥을 얻어 먹을 수 없었다. 고교 2년 시절에도 가출, 용산에서 ‘삐끼’노릇이나 신문팔이 하면서 돈을 벌 궁리를 했던 지라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모든 게 공짜였다. 1962년 2월 정규 입학 전 가입교 상태에서 한달간 군사 훈련을 받았다. 기합과 구타세례에 내무반에서 울고, 입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줄줄이 생겨났다. 하지만 난 울지 않았다. 하루 세끼 ‘곤밥’(흰 쌀밥)을 주고, 고깃국을 얻어 먹어본 게 여기가 처음이었다.

 

나중 12·12사태에 가담한 박희도 장군(전 국회의원, 전 특전사령관)이 대위시절 우리 훈육관이었다. 우리 2중대 훈육관이었고, 난 ‘독종’으로 불리며 1학년 시절 기수생도가 됐다. ‘기수생도’는 밀리지 말아야 했고, 그만큼 독기가 있어야 했다. 박 훈육관은 나에게 “살다보니 이런 독종이 있나”며 내 등을 두드려주곤 했다. 그 시절 나의 마음을 두드린 건 바로 육사의 신조였다.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 그랬다. 그 말만 들어도 내 심장이 고동쳤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퍼레이드 의식과 월요일 국기하강식 때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다짐으로 눈물을 흘리곤 했다. 우린 그 시절 박 대통령의 정신적 영도 안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1960년대. 모든 집안의 딸들은 ‘식모’(가정부) 아니면 방직공장에서 일했다. 나의 큰 누이 ‘굳세어라 금순이’도 그랬다. 그 시절 박 대통령이 독일에서 차관을 빌려 올 때 담보 격으로 7968명 광부가 그곳으로 갔다. 간호사 7050명이 또 그곳으로 갔다. 그들이 1년간 보낸 돈이 미화 5000만 달러였다. 그렇게 해서 일어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 내 가슴을 쥐어 뜯었다.

 

 

나와 세살 나이 차가 나는 아내는 내 고향 신촌에서 어려서부터 공부 잘하는 착하고 고운 여자아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아내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남녀 합쳐서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한 마을에서 오누이처럼 자랐고 자연스레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서로 그리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내가 육사에 입교하면서 국가에 목숨을 바친 군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아내를 붙잡아서는 안된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나는 육사 정규 1기생들이 민주당 정권 초기 쿠데타를 시도하려다 겨우 육군 대위의 계급으로는 쿠데타가 어렵다는 판단으로 이를 미루고 후에 박정희 소장을 모셨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쿠데타의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육사 2학년 때 육사 축구부 키퍼였던 3학년 선배의 추천으로 하나회 멤버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임관 선배로부터 대한민국에서 두번의 군사 쿠데타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군인의 길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되자 나는 생도생활에 대한 의욕을 잃어 가면서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함께 외출하자는 김영대 생도의 권유도 마다하고 내 책상 앞에 앉았다. 예감 때문이었다. 얼마 있다가 "신구범 생도 면회요"라는 구내방송이 들렸다. 나는 총알처럼 생도면회소를 향해 방을 뛰쳐나갔다. "시자다!" 생도면회소 앞에 서울대 뱃지를 단 아내가 배시시 웃고 서 있었다. 3년만에 다시 보는 아내였다. 그녀는 “자신을 잊었느냐”며 잔뜩 오해 어린 눈이었고, “도도해져 버린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겠지만 대학도 들어갔다”며 서울농대 1학년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반가웠다. 학교에서 외출 허가를 받아 영화를 보러 갔다. ‘도라 도라 도라’란 영화였다. 극장 한 켠 진주막 습격 암호가 제목인 그 전쟁영화를 보면서 난 옆 좌석에 앉은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국난의 위기가 닥칠 경우 내가 해야 할 일만 되뇌고 있었다. 물론 그 시절 난 성적도 좋았고, 선배로부터 신망도 두터웠다. 한 마디로 그 시절 난 국수주의자요, 열광적 애국에 온 정신을 내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4학년이 되었다. 나는 1대대장생도가 되었다. 육사 퍼레이드를 총지휘하는 생도가 된 것이다. 토요일 열병식 때에는 아내가 수원에서 올라와 화랑대 연병장 사열대 한 자리를 차지했고, 열병식 도중 나는 임석상관인 육사교장 대신 아내를 향하여 "우로 봤!" 구령을 했다. 하지만 그 시절 난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난 무엇인가? 원래 내가 되고 싶은 건 ‘그저 그런 군인’이 아니었는데 난 무얼해야 하는지 도무지 의문이었다. 마치 전기가 나간 전구 마냥 도무지 빛이 없었다. 그런 나를 다시 찾아온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이제 옛날로 돌아가자. 오빠의 길은 이게 아닌 것 같아.” 멍하니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지금껏 부여잡은 걸 내려놓으라는 말이 큰 궤종소리처럼 귓전을 때렸다. 그날 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고를 친 것이다. 생도들은 주말 외출, 외박 후 일요일 저녁 학교로 귀대하면 귀대점호를 받는데, 물론 대대장 생도가 지휘보고를 받는다. 그런데 보고 받아야 할 대대장 생도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형사고였다. 학교가 뒤집혔다. 백방으로 나를 찾았지만 난 꼭 꼭 숨었고, 이튿날인 월요일 오전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 측은 그래도 이전 품행과 성적을 감안, 경고로 끝내려는 눈치였지만 내가 학칙을 들어 퇴교결정을 요구했다. 결국 퇴교조치가 내려진 뒤 정래혁 교장(당시 중장, 후일 국회의장 역임)이 나를 불렀다. 퇴교생을 교장이 부른 건 이례적인 일이다. “너를 보니 영국의 윈저공과 심프슨 부인이 생각난다.” 그는 물끄러미 날 쳐다보더니 책상 서랍을 열어 봉투를 건넸다. “어디 가서든 잘 살아라. 그리고 넌 그럴 놈이다. 언제나 육사정신은 잊지 마라.” 금일봉을 손에 쥐어주며 나의 앞날을 걱정해주던 그 분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아내와 난 보따리를 싸고 고향 제주로 내려왔다. 물론 아내도 서울농대 2학년으로 학교를 그만뒀다. 고향 조천읍 신촌리 일주도로 버스정류장에 내린 두 사람의 행색은 처연했다. 물론 그 시절 내 아버지는 일본에 계실 때였고, 아버지는 소식을 듣자 노발대발 하며 그렇게 나를 “연탄재 같은 놈”이라고 역정을 내셨다. 어머님께 드릴 말씀도 없었기에 그냥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처가를 찾아갔다. 솔직히 처가라고 부를 입장도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댔고, 처가엔 장모 혼자 집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딸만 다섯인 집의 막내 딸을, 그것도 서울의 명문대에 보낸 그 딸이 돌연 ‘올레’에서 눈 여겨 보던 그 불한당 같은 놈과 함께 나타난 꼴이 아마도 기가 찼을 것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 드렸다. “제가 모시고 살겠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때 그 분의 말씀을 듣고 난 ‘내 친어머니처럼 효도하겠다’고 이를 악 물었다. 그 때 장모님은 이렇게 말했다. “넌 어디 가서 던져놓아도 시자는 안 굶길 거다. 그래 나하고 살아라. 결혼식 안했다고 남들이 수군거린다고? 사람 눈이 무슨 상관이냐? 너희 둘만 좋으면 됐지.” 난 그저 “어머님! 감사합니다. 보란 듯이 잘 살겠습니다”며 무릎을 꿇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966년 1월4일 난 아내와 제대로 혼인식을 올렸다. 아버님도 없이, 일본에 계신 숙부님이 마침 고향에 오시자 마을회관에서 조촐한 의식을 치렀다. 공교롭게도 그날 집으론 입영통지서가 날아 들었다. 사관학교를 마치지 못해 퇴교 당한 처지라 그때의 병역법에 따라 난 6개월 복무일정으로 광주의 보병31사단으로 배치됐다. 물론 다이아몬드 계급장을 단 장교는 고사하고, 갈매기 두개를 가슴에 박은 하사 신분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아닌 연탄재’라며 역정을 내셨던 그 아버님의 회한을 잘 알고 있다. 1990년 고작 일흔 한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신 그 아버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1919년 태어나신 아버님은 당시로선 흔치 않은 일본 유학생이었다. 니폰대(일본대) 법학부를 나온 아버님은 그 시절 재원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 솔직히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자랐다.

 

해방 뒤 일본에서 귀국한 아버님은 고등문관 시험을 보고 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일찌감치 난 세상에 태어났고, 가족을 먹여 살리는게 급선무였다. 아버지는 서울 용산에서 토목사업을 하며 돈을 벌던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게 되자 고향으로 잠시 내려왔다. 아버지는 그 길로 고향 제주에 주저앉았다. 1948년 4·3사건이 터진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터에 중학시절은 물론 일본에서도 동문수학한 처지나 다름 없었고, 4·3사건의 핵심인 이덕구·이호구 형제완 호형호제하는 인연까지 작동했다. 하루는 이덕구의 동생 이호구가 아버지를 설득, 아버지는 ‘입산’ 길에 올랐다. 그러다 아버지는 도망을 쳤다. 아무래도 그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산에서 제주읍 삼양마을 쪽으로 내려오던 새벽무렵 아버지는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그 날은 ‘산폭도’ 무리에 의해 삼양지서가 습격당한 날이다. 무릎이 꿇리고 두 손이 묶여진 채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네댓명과 함께 즉결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이 도우셨는가? 미군정 통역관이던 외숙부(이순우)가 마침 미군 찦차를 타고 그 길을 지나치다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천신만고로 목숨을 부지했다. 그때 아버지는 사업 때문에 뭍으로 갈 엄두는 이미 포기한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후 제주지방법원 입회서기 주임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물론 그 시절 나에게도 마음 한 구석의 괴로움이 있다. 지금 말하지만 난 그 ‘폭도의 수괴’로 불렸던 이덕구의 아들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코흘리개이던 신촌초등학교 1학년 동급생이자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았던 벗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 역시 지금 세상에 없다. 4·3사건이 종반전으로 치달을 무렵 어느 날 경찰의 손에 붙들려 갔고, 후일 들은 얘기지만 경찰관도 차마 그냥 총을 겨눌 수 없어 놓아주고 도망치게 한 뒤 총부리를 겨눴다고 한다. 너무도 아픈 우리네 역사다. 그 어린 영혼이 무슨 죄가 있다고 숨져가야 했는지 그 참담했던 제주의 시련이 아직도 마음을 후빈다.

 

 

그 험난한 시절을 거치는 도중에도 아버지는 강직했다. 투철한 애국심이 마치 그 분을 지탱시켜 준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그게 그 시절 생존의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법원 입회서기 주임으로 있던 아버지는 그때 변호사시험을 준비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제주에서 어물쩡거릴 수 없다”며 군에 자원입대했다. 사법요원은 징집면제 대상이었는데 그랬다. 그 시절 난 학교를 옮겨 제주동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 때부터 우리 집안은 모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했기에 날품팔이도 마다 않고 장사를 하며 제주 곳곳은 물론 부산까지 오가며 장삿일에 나섰다. 내 밑으로 시간이 흐르며 줄줄이 누이가 다섯이나 생겼지만 아버지는 집안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병으로 입대해 보병학교를 거쳐 장교로 신분이 바뀐 아버지는 어느 날 제주에 들러 쌀배급 통장 하나를 덜렁 친지에게 주고 떠났다. 그나마 친지의 도움으로 눈칫밥을 먹고 있을 때 아버지는 피난정부가 있는 부산에서 국방부 법무계장이 됐다. 난 부산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됐다. 그리고 휴전이 되자 아버지는 제주로 내려오게 됐고 모슬포의 육군 제2훈련소를 거쳐 헌병대 제주지구파견대 대장이 됐다. 육군 대위였다. 뒤따라 두어달 다니고 졸업한 학교가 제주북초등학교다. 다 열거하진 못했지만 초등학교를 여섯군데나 다닌 게 내 어린시절이다. 가족이 함께 모여 산 몇 년이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부산에서 가족들과 합류했다. 물론 고달픈 셋방살이였다.

 

육사를 걷어 치우고 내려와 살다 첫 아이를 얻고, 운이 좋아 행정고시에 합격할 무렵 내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밀항자의 신분이었다. 그 시절 그런 아버지를 그리 미워해보지는 않았지만 가정을 등한시한 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풀지 못한 꿈이 뭐 그리도 많은지 많이도 서운했다. 아버지의 사랑이란 건 나에게 사치였다. 제주도에서 근무하다 농림부로 적을 옮기고 유학시험에 합격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70년대 중반 난 일본 오사카에 사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부유하게 사시는 줄 알았다. 일본에 있는 대학시절 친구들이 떵떵 거리며 산다고 했다. 그런데 찾아가 보니 아버지는 한 허름한 주유소의 주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50대 후반이던 그 나이에 그는 4층 짜리 건물 맨 윗층의 쪽방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1년여 뒤 미국에서 귀국할 무렵 오사카의 총영사관에 들렀다. 아버님을 귀국시킬 방법을 여러 방면으로 궁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손을 써 아버님의 여권을 만들어 드렸다. 항공권과 여비도 보내드렸다. 그런데 엉뚱한 소식이 돌아왔다. 아버님의 편지는 이랬다. “난 범법자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떳떳하게 처벌을 받고 귀국하겠다.” 스스로 경찰에 가서 자수한 것이다. 아마 그 분은 그게 법을 배운 사람의 양심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일본 경찰에게 선처를 바라는 모양새로 자존심을 구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는 오무라 수용소로 보내졌다. 내가 직접 수용소 소장에게 편지도 보냈다. 대한민국 농림부 서기관을 들먹이며 ‘선처와 관용을 바란다’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수용기간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는 또 사고를 쳤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지자 아버지가 수용소에서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국부(國父)가 서거하셨는데 한국인 재소자는 모두 함께 추념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소리치다 같은 재소자들로부터 폭행까지 당했다는 것이다. 일본 NHK TV의 주요뉴스로 보도까지 됐다. 물론 그 추념식은 결국 아버지의 주장대로 이국땅 무단입국자 수용소에서 거행됐다.

 

예순 나이인 아버님이 부산항 제3부두로 도착하자 난 아버지를 잠시 서울로 모시고 왔다. 그 시절에야 이르러 고향 신촌에 집다운 집이 있었다. 어머님과 동생들이 사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집 한칸이라도 장만한 때였다. 그 아버지는 농림부의 간부공무원이 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구범아! 넌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를 잊고 살면 안된다. 나라가 없으면 우리도 없다.”

 

 

시대가, 사회가 정상이었다면 어쩌면 꼬장꼬장한 법관이 되셨을 지도 모르는 아버지는 며칠 동안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고향 제주로 내려갔다. 신세한탄으로 세월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한 되나 되는 술병을 매일 집에 들여 놓았고 결국 간암으로 나이 일흔 한살에 수술을 받으시다 깨어나지 못하셨다. 농림부 관료시절 내가 잠시 고향에 들르면 함께 이발관으로 갔고, 자식보다 숱이 검어 “형처럼 보인다”는 말에 허허롭게 웃으시며 한껏 고무되시던 분이다. 그 모진 고생을 홀로 다 감내하셨던 어머님은 세살 앞선 아버님을 따라 일흔의 나이로 고혈압에 따른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1993년 말 난 관선 제주도지사로 부임 받아 제주에 내려오면서 그 분들을 떠올렸다. 모진 풍파에 쓰러지기보다 우리 제주를 ‘신나는 삶터’로 만들어보리라. 작은 듯 하지만 원대한 내 소망이었다. 아내는 그런 나의 소망에 이렇게 화답했다. "당신 먼 외국 땅에서 살 때 말끝마다 '우리 고향 제주도 정말 좋은데.' 그렇게 말했죠?" <15편으로 이어집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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