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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귀거래사] 대안스님, 어머니는 한민족임을 잊지 않게 해준 원동력
‘난 곳은 내 맘대로 못해도 죽을 곳은 내 맘대로’라는 아내 따라 고향으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 때 세상에 나온 그는 일본에서 발이 묶였다. 타국에서 살아야 했다. 우리글과 말은 물론, 역사와 문화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우리 민족을 위한 일을 하겠다며 동포 교육에 젊은 생을 받쳤다.

 

정년이 다 돼 회사를 떠나고 노년을 준비하던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불자의 길. 하지만 그는 제주에서 살겠다는 아내와 함께 제주에서 인생의 마지막 깨달음의 길을 걷고 있다.

 

속세에서는 그를 ‘김창효’(70·金昌孝)라고 부른다. 법명(法名)은 대안(大安)이다.

 

#전후(戰後) 생계와 우리 교육 잊지 않은 제주의 어머니

 

대안 스님은 제일교포 2세다. 그의 부친과 모친은 제주시 이호2동이 고향이다. 하지만 부모는 고향을 떠나 일본살이를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여름 그는 3남2녀 중 넷째로 낯선 일본 땅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3살 되던 해 그의 부친은 미군의 공습으로 목숨을 잃었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패망했고, 대한민국은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도 잠시. 사정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당시 구성된 재일조선인연맹은 1차 귀국운동으로 강제징용인을 먼저 귀국시켰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그 뒤였다.

 

그의 모친은 갓 태어난 그의 남동생과 작은 누나 등 2남1녀를 키워야 했다. 그의 형과 큰 누나는 분가해 그의 모친의 어깨를 가볍게 했다.

 

하지만 전쟁 뒤여서 먹고살기는 힘들었다.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길거리에서 쓸만한 물건을 모아 내다 팔았다. 어느 정도 돈이 생기자 수레를 만들어 광목(천) 노점을 했다. 이후에는 오사카 쓰루하시국제상점가에서 좁지만 7~8평 규모의 점포도 냈다. 그렇게 어머니는 생계를 꾸려갔고, 그의 형제들도 교육을 시켰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항상 조선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고 조선어 교육을 시켰다. 스님이 입에 밴 제주말솜씨는 그의 모친 덕이다. 학교에 진학하기 전 그의 모친은 제주어로 조선어를 가르쳤다. 하지만 바쁜 일상이다 보니 자녀들에게 조선어와 역사, 문화를 가르친다는 것은 한계였다.

 

#우리 교육 받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재일조선인연맹은 귀국하기 전 조선어(한국어)와 역사, 문화를 알고 가야 한다는 교육운동이 일어났다. 7세가 되던 해 1949년 4월 드디어 조선인 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6개월 뒤 학교가 폐쇄됐다. 미군정이 조선학교에서 민족의식 고양을 빙자해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가 이념대립이었던 시기여서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에게는 눈엣 가시였다. 결국 6개월 밖에 우리 교육을 받지 못했다. 이후 일본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됐다.

 

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사학과를 선택했다. 꿈이 교사였기 때문에 사학은 교사 생활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대학 재학 중 동포들을 위해 일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뜻 있는 동포 선각자들이 폐쇄된 학교를 재건해 부활시키기 위해 대대적으로 동포 학생들을 모집했다. 또 그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교원들을 모집하기도 했다. 그는 이 대열에 동참해 조선인 학교에서 어린 동포들을 교육시켰다.

 

#우연찮게 찾아온 불자의 길

 

25년간 교사생활을 끝으로 그는 교단에서 내려왔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나라현 상공회의소 이사장을 맡았다. 정년을 마친 그는 책이나 써 볼 요량으로 도서관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가 환갑이 되던 해였다.

 

또 다른 지인이 찾아왔다. 오사카의 한 절에 있는 주지스님이 ‘만나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찾아간 곳은 오사카 텐노지구(天王寺區)에 있는 ‘통국사’(統國寺).

 

대뜸 스님은 “중(스님)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환갑에 무슨 중입니까. 중을 할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다시 “(중을)할 수 있다. 중은 중생을 위한 사람이다. 자네는 40년간 중생을 위해 일을 했다. 중이 하는 일을 벌써 했다. 이제 중이 알아야 할 전문지식만 알면 된다. 불경을 외우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다시 설득했다.

 

그 설득에 넘어간 그는 나이 60에 승려가 되기로 했다. 그해 겨울 그는 오사카 가야산 정각사의 주지가 됐다. 그렇게 불도(佛道)를 닦은 지 10년이 지난 2012년. 그는 지금 일본의 사찰이 아닌 제주의 한적한 농촌마을에서 제주의 사람과 자연을 친구 삼아 새로운 인생을 보내고 있다.

 

 

-굳이 동포교육을 해야 했던 이유는?

 

“조선인학교가 폐쇄되고 일본학교에 진학한 뒤 한글을 잊어버렸다. 교포 1세들의 말은 들을 수 있었지만 글은 쓸 수가 없었다. 한글의 표준어는 물론 조선의 역사와 지리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민족혼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항상 우리 학교에서 우리말과 글, 역사와 문화, 지리를 배우지 못한 게 한이었다. 게다가 이중인격적인 생활을 했다. 동서고금에도 있어본 적이 없는 비참한 인격적 생활이었다. 교육운동을 하면서 세계관이 달라졌다. 그때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위한 청년이 돼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후 계속해서 조선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학생들에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한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라’고 했다. ‘식민지 종주국에서 살고 있지만 왜놈에 굽실거리지 말고 한민족의 긍지를 보여주라’고 했다.”

 

-우리나라 불교와 일본 불교의 차이는?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 중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독경(讀經·불경을 소리 내어 읽거나 욈)은 어렵다. 천수경을 외울 때에는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했다. 주지가 됐지만 절은 혼자 운영했다. 일본에서의 스님이 하는 일은 특별히 많지 않다. 장례식에서 경야(經夜·관 곁에서 밤을 새우는 일)와 고별식(告別式)에 참석해 독경을 하면 된다. 우리 불교는 모든 종파가 같은 경(經)을 외운다. 모두 천수경, 반야심경, 법성계를 외운다. 명복을 빌 때에는 무상계를 외운다. 하지만 일본은 종파에 따라 외는 경이 다르다. 일본불교는 학문적으로 세계 최고다. 최고의 불교국가라 할 수 있다. 국민의 99%는 사람이 죽으면 스님을 부른다. 또 절에 묘를 세운다. 게다가 양력 8월15일에는 백중같이 여겨 절에 간다. 그런데 불가사의 하게도 일본에서는 (불교를)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정월 초하루에는 85% 정도가 신사에 간다.”

 

-승려로서 깨달음은?

 

“불도에 들어가면서 깨달은 것이 많다. 예를 들어 ‘고맙습니다’는 일본어로 ‘아리가도우’(有難う)다. 이를 해석하면 ‘어려움이 있다’이다. ‘있기가 아주 어려울 정도로 귀하다’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 ‘나’(我)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상들이 한 분이라도 없었으면 안 된다. 그만큼 ‘사람의 존재는 희귀하다’는 것이다. 존재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인연에 따라 존재하고 인연에 따라 멸망한다. 종교는 하늘과의 대화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불교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주지로서 절을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무엇을 전하는가?

 

“절에서는 1년에 4가지 행사를 한다. 정월대보름, 초파일, 백중, 동짓날에 한다. 대보름 때에는 주로 ‘삼재(三災)풀이’할 때에는 재난을 몰고 오는 바람·불·물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을 한탄만하면 안 된다’고 했다. 지혜와 노력으로 이를 잘 다스리면 도움을 줄 수 있다. 어떻게 마음가짐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백중 때에는 8고(苦)인 생·노·병·사와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면서도 만나는 고통’,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하는 고통’, ‘몸과 마음이 성함으로서 얻는 고통’ 등에 대해 얘기한다. 사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포기하는 것은 쉽다. 그게 정답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이 심각하다. 승려이기 이전에 한국인으로서 신도들에게 뭐라 했나?

 

“일본에는 극우파들도 있지만,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일본인들로 구성된 여러 단체나 교원집단, 학교 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을 수백 번 했다. ‘독도는 명백히 한국의 땅이고, 위안부는 일본의 저지른 전쟁범죄의 하나다’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배는 잘못됐다’고 했다. 승려가 돼서도 신도들에게 일본의 잘못된 역사왜곡을 바로 잡았다”

-왜 제주에 오게 됐는가?

 

“아내 때문이다. 아내의 고향은 서귀포시 중문동이다. 아내는 평소에도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 태어난 곳은 선택하지 못하지만 죽을 곳은 자기 의사대로 선택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했지만 난 아내의 말을 모른척했다. 사실 아내는 일본을 싫어했다. ‘정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여겼다. 문학자인 아내가 제민일보가 발행한 ‘4·3은 말한다’ 6권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달라졌다. 막내딸을 시집보낸 뒤 아내는 혼자서 일본 중부지방으로 10일간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서울로 갔다. 나도 모르게 여권을 만들고, 국적도 바꿔버렸다. 아내가 환갑이 되면서 4·3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또 자주 제주에 가서 인터뷰도 하고 싶어 했다. 게다가 아내를 더욱 유혹한 것은 제주의 작가들이었다. 초대도 받고 간담회에도 참석했다. 이후 ‘제주에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비로소 ‘진짜구나’라고 생각했다. 반대할 이유도, 막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아내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혼자 보내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연금(年金)이 있었다. 그것이면 제주에서 충분히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제주에서의 삶은 어떤가?

 

“제주는 공기가 좋고, 기(氣)가 좋은 곳이다. 극단 ‘한라산’의 멤버들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됐다. 젊은 청년들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부담 없이 대해준다. 처음 왔을 때에는 한 젊은 음악가가 해안동에 빈집을 소개시켜줘 저렴하게 임대해 살았다. 최근에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을 임대했다. 아내가 텃밭도 가꾸고, 고양이도 키우고 싶어 했다. 낡은 집이지만 극단에서 목수 기술을 가진 멤버가 화장실도 새롭게 리모델링해 줬다. 동네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여러 가지 문화행사에 참가해 즐기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로 행사를 했지만, 여기서는 주로 참가한다. 즐기고 있다. 역사기행에도 참가한다. 4·3 기행을 갔을 때에는 진행자가 독경을 부탁해 독경을 해주기도 했다. 독경을 하면서 4·3의 아픔을 갖는 유족들의 그 아픈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얼마나 큰 아픔인지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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