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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항복하던 그날 '징용자들과 함께 만세 삼창'[제주, 제주人]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제주지부 고문 박창호옹의 남다른 광복절
“이제는 억울한 삶을 살다간 동료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어 다행”
김상현 기자  |  ksh56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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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8.14  17: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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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은 너무도 굴욕적이고 비참했다. 우리의 기본권을 박탈당하고 강제 노동과 강제징병, 징용에 시달리며 우리의 역사, 언어, 문자까지도 탄압에 굴복했다.

   
▲ 박창호옹은 남양군도에서 징용에 시달리던 시절 해방을 맞봤다.
박창호옹(91.제주시 애월읍)은 1945년 8월 15일,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21살이던 1942년 7월.  남양군도(일제가 통치했던 미크로네시아 지역 섬들)로 강제 징용돼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그는 살아야 했다.

강제 징용된 수천 명의 한국인 청년들은 굶어 죽어갔다. 젊은 여자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성적 학대를 당했다. 그 한 맺힌 땅이 바로 남양군도다. 박 옹은 비행장 건설에 투입됐다.

일본은 사이판 등을 태평양전쟁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했다. 그런 의도로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시설을 구축하려 했다. 그와 함께 끌려간 사람들은 노동과 굶주림 등으로 차츰 목숨을 잃어갔다.

당시 그와 함께 애월.한경 지역에서 징용된 젊은이는 모두 37명. 그 중 7명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남양군도에서 징용된 지 3년이 흘렀을 때, 박 옹 역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이 살아가고 있을 무렵 일본 천황이 마침내 항복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것이었다.

일본이 항복 뒤 6개월 간은 남양군도에서 미군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리게 됐다. 그리곤 1946년 2월 드디어 고향인 제주로 돌아오게 됐다.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지역에서 일본과 남태평양 등지로 나간 징병 및 징용자는 18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현재 살아 있는 생존자는 박 옹을 포함해 20여 명 뿐이다.

박 옹은 1954년부터 18년 동안 공직생활을 했다. 1972년 하귀출장소장을 끝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 그는 5년 전부터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제주도지부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만만치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돼 희생된 원혼을 달래기 위해 2009년 11월 26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인근 사찰인 약천사 내에 14.5m의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탑’을 건립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매해 광복절에 제주종합경기장 광장에서 치르던 위령제를 위령탑이 세워진 2010년부터는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던 12월 8일에 맞춰 지내고 있다.

   
▲ 2009년 11월 서귀포시 중문에 태평양전쟁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됐던 상황은?

21살이던 1942년 7월 29일 징용됐다. 남양군도에서 3년 6개월 동안 군사시설에 투입돼 고생을 많이 했다. 바다에는 군함들과 하늘에는 전투기가 매일 포탄을 퍼 부었고, 음식이 공급되지 않아 무서움과 굶주림의 연속이었다.

팔 다리에 있는 살은 죄 빠졌다. 앉으면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다들 뼈만 앙상했다. 머리카락은 하나 둘 씩 빠져만 갔다. 차츰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죽지 않으려면 자급자족을 해야만 했다. 고구마를 재배해 먹거나 고구마 줄기, 야자수, 심지어 뱀이나 쥐까지 잡아먹으며 하루를 버텼다. 그 고통을 참고 하루하루 산다는 게 참 고역이었다. 고향에 대한 생각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은 깊어만 갔다.

당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밤마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함께 징용됐던 동료들은?

애월. 한경에서 37명이 징용됐다. 그 중에서 7명이 남양군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화장해서 보관해 놓고 고향에 돌아온 뒤 유족들에게 돌려줬다.

1960년대에 정부에서 유족들에게 30만원 가량의 보상금을 준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징용됐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30명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은 만났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전쟁 당시를 회고하면 분하기 그지없다.

이름 없는 동료들을 추모하기 위해 노력했다. 3년 전에는 약천사에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탑을 세웠다. 이제는 억울한 삶을 살다간 동료 징용자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

   
▲ 박창호옹이 징용 당시를 회고하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박창호옹에게 광복절이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남양군도에서 동료들과 함께 만세 삼창을 했다. 그 기쁨은 실제 맞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른다. 정말 기뻤다.

그러나 너무도 굴욕적이고 비참했던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이었다. 갖은 굴욕을 당하며 민족성을 완전히 짓밟았다. 일본은 한마디 유감의 표시를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강대국이 돼서 일본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 하는데, 경제대국 일본을 넘볼 수 있겠는가?

광복절 등 국경일에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는데 제주도민을 넘어 국민들이 태극기를 많이 게양하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많이 게양해야 하는데. 스포츠 응원할 때만 사용하지 말고 평소에 태극기를 사랑했으면 한다.

△올림픽 한일 전 축구 승리 후 '독도 세리머니'를 한 박종우 선수에 대해서는?

그 경기를 생중계로 봤다.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 선수는 모든 것을 초월해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세리머니를 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분한 마음을 표출한 것 같기도 하고. 영웅 심리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결과(동메달 박탈 위기)가 좋지 않아 안타깝다. 아무쪼록 좋은 쪽으로 결론 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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