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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人] 정공철 심방 “굿판에 빠져들다보니 어느새 심방이 됐다"

 

무구의 소리가 크고 빠르게 움직인다. 그의 발과 몸동작도 빨라진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무구의 소리가 멈추고 그의 동작도 멈췄다. 12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무려 6시간 30분을 그렇게 무구의 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중얼거림으로 신(神)을 달래고 신의 소리를 전달했다.

 

그가 달랜 신과 영혼은 시국을 잘못만나 잘못된 명에 죽임을 당한 제주 서귀포시 성읍리 마을 사람들이다. 4.3사건 당시 군경 또는 산사람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다.

 

정공철(52) 심방. '심방'은 무당이다. '신의 형방(刑房)격, 즉 신의 대리인이라는 유래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이 있는 제주어지만 어쩐지 느낌이 다르다. 제주에선 무당이 대부분 남자다. 그 중에서도 정 심방은 젊다. 젊지만 그는 쾌자(무당이 입는 옷)를 입고 요령·맹두(무당의 도구)을 잡는다. 그는 남들처럼 ‘신’이 내려서 된 무당이 아니다.

 

그는 대학교 시절 마당극을 했다. 당시 육지지역에는 탈춤이 성행했다. 육지의 마당극은 탈춤이 미학원리였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탈춤이 없어 제주의 마당극의 미학의 원리를 찾아 나섰다.

 

“제주의 마당극에서 미학은 굿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굿을 몰랐다. 제주의 굿을 알아야 했다. 그때부터 관심 가져 보러다니고 공부도 했다. 하지만 공부로는 부족했다. 아무래도 심방이 돼야겠다”

 

34세 때였다. 그로부터 그는 무당의 길을 18년째 걷고 있다.

 

그는 무당이 되기 위해 김윤수 심방을 찾아갔다. 김 심방은 중요무형문화제 71호, 칠머리당 영등굿 보유자이며 인간문화재이다.

 

칠머리당영등굿 보존회 사무장으로 근무하면서 김 심방으로부터 굿을 배웠다. 그러다 사무장을 그만두고 김 심방을 따라 다녔다. 잡일도 하고 작은 굿도 했다.

 

전수관이 생기자 그는 본격적으로 김 심방으로부터 사사를 받았다.

 

결국 그는 37세에 정식으로 심방이 됐다. 제주시 조천읍 와산리 고씨 문중에서 굿을 한 것이 처음이다. “쾌자를 입고 처음으로 굿을 했다. 정신이 없어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굿을 할 때 뭘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다만 신(영혼)의 얘기를 할 뿐이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른 사람한테 듣는 경우가 있다. 녹화영상을 보면서 '내가 그런 말을 했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신'을 자연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신을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일부다. 우리가 조상을 소중히 여긴 것은 내가 자연의 일부이듯, 그분들도 자연의 일부다. 내가 살다가 죽으면 그분들처럼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연을 소중히 가꾸듯, 우리 조상도 소중히 생각하고 결국은 자기도 걸어가게 될 길이다. 이런 걸 소중히 여기는 만큼 자신도 내 아들·딸로부터 소중한 자연의 일부로서 대접을 받는다. 그런 것이기에 조상이나 신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날 그가 집전한 굿은 4.3영령들을 위로하는 굿이었다.

 

그는 “오늘 굿은 차사영맞이 굿이다. 영혼들이 죽어서 저승갈 때에는 저승사자(차사)가 데리고 간다. 여기 영혼들은 착하고 어진 차사가 아니라 모질고 독한 차사가 데리고 갔다. 독한 차사들은 뒤로 물러나고 어질고 착한 차사님이 인계를 해서 저승으로 곱게 데려가 달라고 한 것이다. 자기 명을 다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시국을 잘못 만나 군인·경찰한테도 죽고, 산사람한테도 죽었다. 자기 의지대로 명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독한 차사를 앞 세워 저승갔으니까. 오늘은 독한차사를 물러나게 하고 착한 차사가 인계를 해서 곱게 데리고 가달라고 한 것이다. 다른 굿과 다른 것이다.”

 

이날 그의 굿은 6.25 당시 전사한 성읍 출신의 군인들에 대한 위령굿으로도 이어졌다. 또 성읍을 위해 일한 구·리장에 대한 위령굿도 진행됐다.

 

큰굿으로서는 처음 마을굿으로 열렸다. 큰굿 중 4.3영령을 위로하는 굿으로서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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