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서예, 그 뿌리는 언제인지 알암수광?"

  • 등록 2013.02.21 17: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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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씨, 수원대 미술대학원 학위논문···"명필 반열 오른 고적(高適)이 원류"

서체로 표현한 인간의 예술-. 서예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 민족의 정서에 '문자예술'로 자리잡은 문화다.

 

물론 제주라고 예외는 아니다. 제주에선 그 서예가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을까?

 

말년을 서학과 서예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이용훈씨가 최근 수원대 미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을 통해 그 실마리를 풀었다.

 

그의 주장을 본다.

 

제주서예의 시작은 고려시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부터다. 고려는 불교를 중요한 사회 교육 수단으로 이용했고, 불교문화의 발전은 학문과 서예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이후 고유(高維)의 증손자인 고적(高適)이 명필의 대열에 오르면서 제주의 서예사는 그 첫장을 열었다.

 

고적(高適)명필 오른 뒤, 제주서예 역사 본격

 

조선시대들어 정치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과 숭문천무(崇文賤武)의 유교정책으로 바뀌었다. 유학교육은 인재양성과 함께 과거를 위한 교육으로 전락되어 정치적 발전에 치명상(致命傷)을 가져왔다.

 

하지만 고득종의 흥학(興學)에 대한 유고(遺稿, 죽은사람이 남긴 원고)는 제주 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조례십개조(條例十箇條)'는 그의 교육사상과 함께 조선조 교육의 본질을 천명하는 계기다.

 

이러한 고득종의 노력으로 1460년(세조6년)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이 되고 1843(헌종9년)년 제주목사 이원조(李源祚)에 의해 향현사(鄕賢祠)에 배향(임금이 생전에 총애하던 신하나 공로가 있는 신하를 종묘에 부제하는 것)됐다.

 

 

이후 1519년 기묘사화로 제주도에 유배 온 김정(金淨)의 학문은 김양필(金良弼)을 통해 계승됐고 제주향교의 유생들은 각각이 지역의 학당과 서당에서 다시 많은 학자와 서예가를 배출했다.

 

특히 1840년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는 제주 서예문화의 예술사적인 위치에서 대단한 변혁을 일으킨다. 추사는 오랜 유배 생활 동안 훌륭한 제자들을 키워냈으며 세계적인 추사체를 완성했다. 그 영향은 홍종시까지 이어지며 제주 서맥을 이어왔다.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제주의 서단은 일본 유학파 서예가들과 향토 서예가들이 중심이 되어 서예동호인(書藝同好人) 단체를 구성하는 등 폭 넓은 활동을 전개했고 그들이 갖고 있는 드높은 학문과 예술적 기량은 제주서예 발전의 모태(母胎)가 됐다.

 

현재 제주 서단은 그 후학들에 의하여 독특하고 개성적인 예술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현재 제주서예의 원천이라 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홍화각(弘化閣)〉과〈홍화각기(弘化閣記)〉를 들 수 있다.

 

 

 

제주서예의 원류작...'홍화각', '홍화각기'

 

이씨는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절 글이 예술로 인정받게 됐다. 제주도에서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를 오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며 "제주도 서예의 특징은 아름답게 쓴 글씨뿐만 아니라 개성이 담긴 작품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찾아 보기 힘든 비석만 골라서 논문에 게재했다"며 "향후 제주서단의 원류를 찾아내는 일에 더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최병근 기자 whiteworld84@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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