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방 셋을 경 보내고, 게다가 일가족 11명이···"

  • 등록 2013.04.03 14: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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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창] 4.3 위령제 현장에서 만난 유족···참혹한 그 참상, 치 떨리는 기억

"오라방(오빠)이 경(그렇게) 가 부러신디(가 버렸는데) 남은 우린 무신(무슨) 죄랑(죄랑) 이리 설룬고(서러운고)?"

 

여동생은 어릴적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날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큰오빠와 막내오빠는 제주도에서 총살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둘째 오빠는 아직도 행방불명 상태다. 오빠 셋을 4.3사건으로 그렇게 잃었다.

 

3일 오전 11시 제주시 봉개동 평화공원 내 4.3위령제 현장.

 

위령제단 부근에서 각명비를 어루만지던 제주시 건입동 강미옥(73)씨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강씨는 "그나마 두 오빠의 유해는 확인했지만 둘째 오빠의 유해는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부모님도 이미 4.3사건 이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난 뒤 딸 셋만 남았다. 대를 잇지도 못한다"고 눈물을 흘렸다.

 

강씨는 제주4.3사건으로 마지막 남은 둘째 오빠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둘째 오빠가 인천형무소에 투옥됐기 때문이다.

 

그는 오빠가 살아서 돌아올거라 믿었다. 그러나 인천형무소로 투옥된 강씨의 오빠는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렇게 1950년 둘째 오빠를 인천형무소로 보내고 연락이 끊긴지 벌써 63년이 흘렀다.

 

그는 "오빠가 인천형무소로 끌려갈 때 감기에 걸려 감기약과 옷을 사서 보내줬다. 매년 둘째 오빠 이름만 보면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프다"며 "제주 서문통 공회당으로 불려 나가면 거기서 무작위로 사람들을 뽑아서 총으로 쏴 죽였다. 오빠 두명도 그렇게 잃었다"고 흐느꼈다. 그는 매년 빈무덤을 찾아 오빠를 기다리고 있다. 

 

제주4.3사건으로 일가족 11명을 잃은 할머니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이영자(79)씨는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소에서 일가족들의 이름을 직접 확인하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이씨는 당시를 기억하며 "집에 있는데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끌어내 총으로 쏴버렸다. 그 일로 가족 뿐만 아니라 사촌, 육촌까지 합쳐 11명이 몰살당했다"고 흐느꼈다. 

 

중학생이던 오빠를 먼저 보낸 동생은 지금도 그날을 일들이 생생하다.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할머니는 위패봉안소 벽에 새겨진 오빠의 이름을 눈길로 더듬으며 "오빠가 그때 오현중학교를 다녔다. 거기서 공부를 하다가 가을걷이를 위해 집에 왔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나자 군이 1948년 10월 22일 세화읍으로 소개령을 내렸다"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그는 "길에 사람들이 다니면 군인들이 무조건 다 잡아가서 총으로 쏴버렸다. 4.3과 아무 관계가 없는 학생인 우리 오빠도 그렇게 끌려가서 죽었다. 너무 억울하다"고 눈물을 훔치며 발길을 돌렸다.

 

 

3일 오전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제65주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가한 유가족들은 참혹했던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넋을 기렸다.

 

제주4.3사건은 남아있는 이들에겐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최병근 기자 whiteworld84@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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