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길 걸어온 제주 청년…지금은 '세계적 학자'

  • 등록 2013.04.17 16:52:00
크게보기

[新귀거래사] 제주출신 세계적 광생물학 권위자 송필순 제주대 석좌교수
끝없는 연구‧실험 한국인 최초 ‘휜센메달’ … 77살 노구에도 "난 연구하는 사람"

오직 한 길만 보고 달렸다. 학창시절부터 즐겼던 일을 자신의 꿈으로 이뤘다. 한 우물을 파온 결과 광생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가 됐다.

 

송필순(77) 제주대학교 석좌교수.

 

그는 제주농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를 졸업,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곤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텍사스 공대 교수, 네브라스카 링컨대 교수, 미국광생물학회 편집주간, 금호석유화학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장, 국제광생물학회연맹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주요이력이다.

 

이력만으로도 화려하지만 실상 그가 살아온 길은 더 화려(?)하다.

 

그는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자라며 전쟁의 참혹함을 온 몸으로 견뎌냈다. 일본에서 전쟁을 겪고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도 표선면으로 돌아왔다. 그때 나이 10살. 표선면에서의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 6개월 남짓. 이후 제주시로 이사했다. 제주시에서 제주농업고등학교(현 제주고등학교 전신)에 당당히 입학했다. 당시 제주도내에서는 농업고등학교가 가장 오래된 명문 학교다. 오현고, 제일고 등 이후의 명문 학교가 문을 열기 전이다.

 

 

그에게도 전쟁의 아픈 기억과 공포가 있다. 일본에서 자랄 때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가 살던 마을에 폭탄이 떨어져 처참히 파괴된 모습을 봤다. 전쟁을 겪으며 살던 집도 잃었다. 제주로 온 뒤 4.3사건을 겪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산사람’의 이동을 감시하는 '보초'를 서기도 했다. 깊은 밤 한라산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한국전쟁도 겪었다. 전쟁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지만 제주로 내려온 피난민들과 전쟁고아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상을 눈으로 봐야 했다.

 

그에게 공부는 전쟁의 참상을 잊고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였다. 삶의 지표나 다름없었다.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꽃과 나무를 좋아했다. 그래서 산으로 들로 다니며 식물의 잎과 뿌리를 관찰했다.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도 평소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공부에 재미를 붙여갔다.

 

전쟁의 참상‧공포…공부만이 살길

 

그러나 점점 한계를 느꼈다. 농업고등학교에 재직하던 교사들이 농업에는 학문적 깊이가 있었지만 수학, 물리, 화학, 국어, 영어 같은 기초과목에는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민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서울에서 제주도로 피난온 대학교수들이 제주농업고등학교 교단에 등장했다. 부족했던 기초과목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에 ‘올인’했다.

 

그 결과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입학했다. 전공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농업과 관련된 농화학.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캠퍼스는 시위현장이었다. 연일 벌어지는 데모로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더구나 교수들조차 학문적으로 별 깊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교수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고등학교 교사들이 대학으로 차출(?)되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다.

 

그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가게 됐고, 그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집에선 매년 땅을 팔아야만 했다. 그가 대학에 가는 대신 두 동생들은 공부를 접어야 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부턴 학비와 생활비 등을 모두 혼자 해결했다. 대학 졸업직후 군대에 갔다. 운 좋게 노량진에 있던 연구발전사령부(국방과학연구소의 전신) 병참물자개발실에 사병자격(연구조교)으로 2년동안 복무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석사학위가 주어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복무하던 중 인생 최고의 기회를 잡았다. 국비장학생 모집 공고를 본 것이다. 총 20명을 뽑는데 생화학 분야에 2명이 배정됐다. 운좋게 ‘덜컥’ 합격했다. 미국에서의 삶을 예고했다. 그때가 1960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으로 돈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다. 그래서 국비장학생들이 출국하기 전 2년 동안의 생활비, 학비, 귀국할 때의 비행기 값을 한꺼번에 줬다. 그는 그렇게 받은 돈을 동생들 공부를 위해 모두 놓고 갔다.

인생 최대의 전환점…국비장학생 선정돼 미국행

 

미국에서의 삶은 녹녹지 않았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첫발이니 당연했다. 더욱이 입은 벙어리였고, 귀는 막혔다.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교 대학원 입학 후 첫 1년 동안 말이 안 통해 그저 눈만 껌벅였다. 그래도 그에겐 ‘노력’, ‘성실’, ‘열정’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영어와 생화학 공부에 몰입했다.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2년째부터는 공부발(?)이 붙었다. 학교 장학금도 받았다. 그렇게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4년 동안의 박사과정, 2년 동안의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그래도 돈이라도 좀 챙기고 귀국하기 위해 텍사스 공과대학에 조교로 취직했다. 1~2년 조교일을 하려고 했는데 하다 보니 교수가 됐다. 이후 네브라스카 링컨대 교수, 미국 광생물학회 학회지 편집주간까지 맡았다.

 

나이 67살이 돼 2003년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1987년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 설립한 금호석유화학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이름을 걸치고 있었지만 '상근 전임'으로 일 해달라는 제안 때문이었다. 박성용 금호아시아나 명예회장이 주도로 설립한 연구소는 그가 타계하자 없어졌다. 2005년 12월이다.

그는 2005년 미국학계에서 사실상 은퇴했다. 2006년 1월 고향인 제주로 왔다. 이번엔 제주대학교에서 생명자원과학대 석좌교수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연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광생물학 분야에서 이미 이름을 알릴대로 알렸지만  ‘STOP’이란 없었다.

 

연구에 연구,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그는 2009년 한국인 최초로 광생물학분야(광피부학, 광의학, 광합성, 시각, 반딧불 및 생물발광, 자외선에의한 DNA와 생체의 영향, 식물광형태변화, 환경광생태학)에서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휜센메달’을 받았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이었다. 은퇴 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받지 못할 상이었다. 휜센상은 국제광생물학회연맹이 4년마다 광생물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에게 주는 상이다. 아시아에서는 오직 일본에서만 3명의 수상자가 있다.

 

연구는 언제나 그의 삶이다. 최근 그는 성장속도가 느리고 번식력이 기존 잔디보다 2.5배 빠른 GM잔디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냈다. 웃 자라지 않아 관리하기가 쉬운 잔디인 것이다.

 

 

끊임없는 연구…광생물학 최고 권위자에 올라

 

현재 그는 아내 송영순 씨와 그저 단둘이 제주에서 산다.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큰아들은 대만, 둘째 아들은 독일, 셋째 딸은 미국에 살고 있다.

 

- 1960년 한국을 떠나 2006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시 와보니 어땠나?

 

“고향에 돌아 와보니 사람이 굉장히 많아졌다. 깜짝 놀랐다. 옛날 제주도는 전통적인 문화와 정서, 건축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기가 제주도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대화 돼 있다. 선택적으로 (제주의) 옛 문화를 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관광용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으로서 제주의 전통, 역사,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제주도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제주는 환경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존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제주도는 관광이 중요 산업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제주도의 환경을 보전하면서도 환경을 즐길 수 있는 관광자원들을 개발해 내야 한다. 하지만 보기 싫은 구석도 있다. '궨당'문화는 제주도의 유일한 문화라고 본다.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문제가 있다.”

- 제주지역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없나?

 

“미국은 각주마다 별명이 있다. 예를 들면 네브라스카주는 ‘굿라이프(good life)’, 미조리주는 ‘쇼미(show me)’라는 별명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미조리주 사람들과 비슷한 면이 많다. 미조리주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설득도 안된다. 미조리주 사람들은 일단 ‘부정’하고 본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어떤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 건설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주의 발전을 위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제주사람들을 보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유명인사(젊은 사람들)가 있으면 응원해 주는 모습이 부족하다. 지도자가 나오기 어려운 지역인 것 같다. ‘쇼미’하지 말고 ‘오케이’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

 

최병근 기자 whiteworld84@jnuri.net
<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노형5길 28(엘리시아아파트 상가빌딩 6층) | 전화 : 064)748-3883 | 팩스 : 064)748-3882 사업자등록번호 : 616-81-88659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제주 아-01032 | 등록년월일 : 2011.9.16 | ISSN : 2636-0071 제호 : 제이누리 2011년 11월2일 창간 | 발행/편집인 : 양성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성철 본지는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1 제이앤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nuri@j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