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혼이 된 의인 양제해, 200년 만에 제주로 귀향한다

  • 등록 2013.11.27 16: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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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예술계, 조선조 '양제해 모변'으로 숨진 의인 뜻 기리는 추모열기
정약용 제자 이강회의 '상찬계시말'로 재조명 계기...도민동참 후원 호소

“제주백성들이여 어찌하여 양제해의 영혼에 한 번도 제를 지내지 않는가? 어찌해서 그의 고혼을 한 번도 위무하지 않는가?(濟民者何不一祭於其魂撫存其孤乎)”

 

200년간 반역자의 누명을 썼던 제주의 의인 양제해(梁濟海)를 기리는 움직임이 제주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그의 한스런 죽음을 기리는 200년만의 추모제가 준비되고 있다.

 

강문규 한라생태문화연구소장,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박찬식 제주문화유산연구원장은 27일 양제해를 기리는 추모제 계획을 밝히고 도민동참을 호소했다. 다음달 3일이 추모제 행사가 예정된 날이다.

 

양제해는 조선 순조 13년(1813년) 지금의 주민자치위원장 격인 향감(鄕監)의 직을 맡고 있었다. 당시 제주에 있던 하급공무원인 아전(衙前) 800여명 중 300여명과 '상찬계(相讚契)'를 결성했다.

 

양제해가 주동이 된 상찬계는 당시 제주목과 대정·정의현 관리들이 온갖 악행과 비리를 저지르자 백성의 억울한 사연을 관아에 알리는 등소(等訴) 작성에 앞장섰다. 그러나 양제해는 '역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제주목사 김수기(金守基)의 형장(刑杖)국문을 받다 숨졌다.

 

양제해는 1770년 지금의 제주시 아라동에서 태어나 1813년 음력 11월 1일(양력 12월3일) 4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향감을 네 번, 찰방헌리(察訪憲吏)를 두 번 역임할 정도로 당시 제주도민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인물로 알려진다.

 

그의 큰아들과 부인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또 큰아들의 장인 김익강(金益剛), 둘째와 셋째아들 등은 유배 길을 떠나야 했다. 결국 주모자 중 고덕호와 양제해의 아들 일회(日會)는 참형에 처해졌고, 강필방·김익강·양인복(梁仁福)·김창서(金昌瑞) 등은 절도에 안치되었다. 또한, 양일신(梁日新)·양일빈(梁日彬) 등 6인은 도배(島配)에 처했으며, 나머지 35인은 보석 또는 방면되었다.

 

목사의 치계(馳啓)를 받은 조정에서는 이재수(李在秀)를 찰리사 겸 위유사(察理使兼慰諭使)로 삼고 제주에 파견,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했다. 위유사 이재수는 이 사건과 관련, 제주도의 실정을 일일이 조사해 이폐조목(釐弊條目)과 함께 보고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도 제주목 관리들의 실정 사실을 인정하고, 탐욕과 불법으로 민원을 샀던 전 목사 이현택(李顯宅)을 체포, 유배에 처했다.

 

 

 

 

이 사건은 조선왕조실록에 소위 '양제해 모변(謀變)'으로 기록되며 영원히 모변으로 기억될 뻔했지만 지난 2008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유배지 제자인 운곡(雲谷) 이강회(李綱會)가 쓴 '상찬계시말(相讚契始末)'이 발견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상찬계시말은 이강회의 저서 '탐라직방설(耽羅職方設)'의 한 부분이다. 당시 제주목관아와 내통한 상찬계의 악행을 고발한 이 글은 이강회가 유배간 양제해 큰아들의 장인을 통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강회는 이 글에서 양제해의 성품과 능력을 '나라의 홍문관 관리와 비길 만하다'고 평가했다. 홍문관은 조선시대 삼사(三司)의 하나로 궁중의 경적(經籍), 사적(史籍)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을 맡아보던 기관이다.

 

그는 바로 그 상찬계시말에서 '제주백성들이여! 어찌해서 양제해의 영혼에 한 번도 제를 지내지 않고 외로운 그의 혼을 어루만지고 보살피지 않는가?'라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200년 전 숨진 12월3일 오전 9시 제주시 아라동 양제해 묘소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같은 날 오전 11시 제주목 관아에서 제주큰굿보존회 서순실 심방이 추모굿을 하고, 오후 3시 옛 제주대학교병원 앞 각 북카페에서 역사학자인 김정기 전 제주교육대학교 총장이 추모강연을 한다.

이들은 "제주도민의 십시일반 힘을 보탠 추모굿과 추모제를 올리고 세미나를 열어 그의 희생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박경훈 소장은 "그의 죽음이 개인의 죽임이 아니라 당시 제주사회에 만연한 불편부당과 사회모순에 저항해 이를 혁파해려했던 의로운 죽음"이라며 “200년 만에 그의 고혼을 불러내 억울한 넋을 달래는 일은 200년 전 이강회가 한탄했던 '야만의 제주도민의 풍속'을 벗는, 그 해묵은 부끄러움을 씻는 제주도민의 씻김굿"이라고 추모의 의미를 전달했다.

 

이들은 후원금을 모아 행사비용을 충당할 계획이다. 후원자는 '의인 양제해 200주년 추모사업회'의 위원으로 이름이 등록된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

문의=064-755-7372(제주전통문화연구소).
 

 

양성철 기자 j1950@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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