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정과 삼천서당터의 역사

  • 등록 2014.01.06 21: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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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기상청 일대는 선조 25년(1592) 이경록 목사가 건립한 ‘결승정(決勝亭)’이 있었다. 또 제주성 동성 경관 최고의 정자였던 ‘공신정’(拱辰亭)이 있던 곳이다. 효종 8년(1653) 이원진 목사가 북수구 위에 초루(譙樓)를 설치하고 ‘공신루’라고 이름 붙였다. 그 뒤 순조 32년(1832) 이예연 목사가 현재의 감리교회터로 이전하면서 ‘공신정’으로 개칭, 100여 년 가까이 입지했다. 그러나 1928년 일제가 제주신사를 짓기 위해 헐어버렸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제주동성과 북성이 교차하는 지점인 동북치성 위에 제주측후소가 들어서면서 이 일대는 제주측후소의 경내구역에 속하게 된다. 공신정은 그 부속건물이 됐다. 이때까지도 공신정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1928년 일제는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 일본식 신사를 조성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인다. 그 과정에서 제주읍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이곳에 짓게 된다. 이 신사의 조성으로 공신정은 끝내 헐리게 된다. 주춧돌만 한쪽 구석에 남는다. 제주신사는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신사는 그 해 10월 건입동 청년들이 부숴버렸다고 전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피난민으로 제주에 온 도인권 목사는 1951년 신사가 철거된 이 자리에 임시 피난민교회인 가설 ‘제주읍교회’를 설립해 목회를 시작한다. 그 이후 ‘류형기 감독 기념 예배당’이라는 명칭으로 교회건물을 신축하게 된다. 당시 이 터는 일제가 남기고 간 소위 ‘적산(敵産)’으로 분류돼 정부 소유의 땅이었다. 도인권 목사는 1954년 이 터를 정부로부터 사들여 이곳에 교회건물을 건축하겠다고 나선다.

 

이에 당시 제주읍내의 유림들과 유지 등 원로들은 원래 조선시대 유명한 정자인 공신정이 있던 명승지이므로 교회가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크게 반발했다. 이 사실은 당시 제주신보에 보도되면서 지역사회의 핫 이슈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 속에 도 목사는 명승지 주변경관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하고 결국 그들을 설득해 토지를 사들였다. 1956년 건물을 완공하고 교회 이름을 ‘제주중앙교회’라고 명명했다. 이 교회는 제주도 감리교의 시발점으로 오늘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가 교회의 이전에 이어 헐리고 말았다.

 

 

☞노봉은 『노봉집』에서 “저 연당(蓮堂)의 옛터를 보니 학사(學舍)를 새로 짓기에 적합하다. 마을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실은 성안에 있으면서 산림과 샘과 돌들이 맑고 그윽하니 아마도 이곳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숨겨둔 곳이다”고 해 이곳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학문도야의 장소로 만들기로 작정한다.

 

삼천서당을 세운 터는 원래 인조 때인 1627년부터 1629년까지 제주 판관을 지낸 ‘이각(李恪)’이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그 위에 연당을 세웠던 터였다. 그러나 노봉이 제주목사로 왔을 때는 이미 멸실돼 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노봉은 단지 기암과 수림이 우거졌을 뿐인 이곳의 경관적 가치를 누구보다 깊게 간파했다.

 

결국 그는 임기 내내 바쁜 정사의 와중에도 틈만 나면 이곳을 학문적 도량으로 가꿔 나갔다. 또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10소장의 국립목장지 중 6소장의 폐장된 토지를 떼어내 서당에서 공부하는 재생들의 늠료(廩料)를 마련해 생활비의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삼천서당’은 노봉이 제주에 부임한 이듬해인 영조 12년(1736) 겨울에 세웠다고 한다.

 

상량문에는 선비들이 여염집에서 기식하며 공부하는 모습을 그렸다. 또 ‘마을에는 예양하는 풍속이 줄어들고, 집에는 거문고 타는 소리와 책 읽는 소리가 고요해져 버린 것을 안타까이 여겨 쇠락한 시기에 사치스러운 일인 듯해도 제주에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라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서당 건립의 배경을 밝혀놓고 있다.

 

연이어 ‘삼천서당’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밝혀 놓았다. 흔히 알려져 있듯이 경내에 3개의 우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역』의 ‘산수몽괘(山水蒙卦)’의 “산 아래 샘이 솟아나는 것이 몽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과감하게 덕을 실천하면서 묵묵하게 덕을 쌓아야 한다.”는 괘의 의미를 딴 것이라고 설명했다.

 

즉 이 서당이 아직 몽매하고 유학의 가르침을 깨치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 선비로 성장하기 위한 학문도야의 장, 또는 일반 백성들을 교화해 예양하는 풍속을 일으키기 위한 학문의 전당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또 서당의 마당에 ‘이택(麗澤)’, 즉 서로 이웃한 한 쌍의 연못을 판 것 역시 주역의 “‘붕우강습(朋友講習)’하는 태괘(兌卦)를 본받은 것이다.”고 했다.

 

서로 이어진 연못을 붕우에 빗대어 벗과 더불어 학습하고 교우하는, 선비의 도리와 이치를 터득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조성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그는 철저하게 유학자적인 태도에서 유학의 가르침을 깨우치게 해 양민을 교화하기 위한 예학의 장소로 정교하게 이 공간을 조성해나간 것이다.

 

그가 남긴 문집인 『노봉집』에서 이곳과 관련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보면 “사라봉은 한라산에서 오다가 바다에 이르러 서쪽으로 휘돌며 주성(州城)의 동북 모서리로 들어와 우뚝하게 절벽이 솟았다가 작게 다시 세 가닥으로 나뉘었는데, 가운데는 중장병, 왼쪽은 용린병, 오른쪽은 호반병이다.”고 했다. 그는 공신정 아래의 절벽인 이곳의 바위들에 각각 그 형태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는 또 그 서당 아래의 지하를 흐르는 산지천의 수맥을 이용해 감액천, 급고천 등의 새로운 우물을 조성하고, 산저천을 깨끗한 수질이 보장되게 수축한다.

 

노봉집에 “감액천은 용린병 밑에 있고, 물이 말라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으나, 을묘년(1735년) 가을에 파서 고쳤더니 단물이 다시 솟아나왔다.”, “급고천은 중장병 아래에 있는데, 병진(1736년) 봄에 집터를 다질 때, 한 발 넘게 파서 옛 우물을 얻었는데, 감액천에서 30보 거리에 있다.”, “산저천은 호반병 밑에 있다. 온 성안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서 물을 긷는다. 정사년(1737년) 봄에 돌을 깨어내고 벽돌을 고쳐 바깥 난간을 평평하고 넓게 하였다. 급고천에서 30보 거리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재임 중 1년에 하나씩 새 우물을 조성했다.

 

이렇게 우물을 조성한 것은 몽괘의 ‘산하출수’의 상징성을 함의한 중의적인 공간의 창출에도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삼천서당’ 경내의 여러 장소들에 대해서도 글로 남겼다. “이택(麗澤)은 모두 재(齋, 삼천서당을 일컬음)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데, 위 못은 크고 넓어 약 10궁(弓, 여덟 자, 길이의 단위로 못의 둘레가 24m정도 됨)쯤 되고 아래 못은 약간 넓다. 이 못의 위쪽에 유생들이 글씨 연습을 하는 ‘천농석(天礱石)’이 있으며, 두 못 사이에는 ‘세심단(洗心壇)’이 있다.”라 했다.

 

즉 서당 앞마당에 두 개의 연못을 조성해 주역의 ‘태괘(兌卦)’에 나오는 “군자가 그 이치로써 친구끼리 강습한다.”는 이치를 실현하려 했다. ‘천농석’이라는 너럭바위를 놓아 붓글씨를 연마하게 했으며, ‘세심단’을 두 못 사이에 두어 항상 학문하는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

 

“‘한취당(寒翠堂)’은 용린병 아래에 있다. ‘달관대’는 용린병 아래에 있으며 북으로는 넓고 아득한 바다를 누르며, 남으로는 영주를 적시고 서로 지는 해를 전별하며 옛 도읍을 굽어본다. 그 위에는 과녁을 두고 관덕(觀德)한다. ‘희우대(喜雨臺)’는 감액천 위에 있다.”고 한 것으로 미뤄 용린병 바위 기슭의 푸른 대나무 숲 앞에 ‘한취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재일(齋日)’에 제사를 올리기 위한 ‘희우대’를 세웠고 활터로 ‘달관대’를 조성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이곳은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조성된 것이 없는 공간이다. 노봉은 철저하게 유교적 미의식과 선비들의 학문과 풍류를 위한 인문공간으로 이곳을 심혈을 기울여 가꿨다. 그의 이런 노력은 몽매한 제주섬사람들에게 유학을 권장해 모범을 보이고 교학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유학자다운 면모의 실천결과였다.

 

제주백성들을 위한 그의 선정은 한둘이 아니다. 긴 안목으로 제주도민들을 위해 노력한 것이 바로 삼천서당의 설립과 화북포구의 개척이었다.

 

실제 서당에서는 평민의 자제들이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 수준이 오히려 향교나 서원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표류기로 유명한 장한철이 바로 삼천서당에서 공부한 학인이었다. 그가 몸소 돌을 져 날랐던 화북포구는 그의 사후 조선왕조의 폐망에 이를 때까지 제주도와 육지부를 잇는 연륙항으로 이용돼 제주의 대표적인 포구가 됐다.

 

노봉은 임기를 마치고 제주도를 떠나기 위해 화북포의 진성 내에 있는 후풍관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제이누리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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