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도착해 보니 때가 절은 옷을 입은 조그만 학생이 검은 시장바구니를 든 채 경비원에 잡혀 덜덜 떨고 있었다.
바구니 속에는 한복 한 벌이 들어 있었다.
중앙시장 상가 문이 닫히기 전 숨어 들어갔다가 한 가게에서 한복을 훔쳐 상가 셔터를 열고 나오려다 경비원에 들킨 것이다.
파출소로 연행해 조사하니 놀라운 사연이 숨어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에 어렵게 생활하던 중 겨울 이불과 먹을 것을 훔치려 상가에 들어갔으나 큰 이불은 들고 나오기 어렵고 훔칠 음식은 없어 생각 없이 한복을 들고 나오던 중이었다.
중학생인 A군(13)은 몸이 아픈 할머니(82), 그리고 두 남동생(11ㆍ8)과 천안 목천읍의 한 농가주택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가 읍사무소 보조금으로 받은 10여 만원이 이들 네 식구의 생활비 전부다. 할머니는 난방비를 아끼려고 보일러를 항상 '외출'로 놓는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씨에 방바닥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엷은 여름이불 뿐이었다.
"너무 추워 바람이라도 막아 보려고 이불 두 채의 끝을 빨래집게로 물리고 동생들과 그 속에 들어가 생활했어요."
이 경사는 같은 순찰조인 최영민 순경과 함께 그날 아침 A군의 집을 찾았다. 난방 기름은 떨어져 있고 연로하고 몸도 편찮은 할머니는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남동생들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몇 개월째 씻지 않은 상태였다. 입은 옷도 세탁하지 않아 때국물이 흘렀고 몸에서 악취가 풍겼다. 무엇보다 이들 네 식구의 긴급 구조가 필요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파출소 직원들이 급한 대로 지갑을 열었다. 겨울이불과 라면 5상자를 집에 들여놓고 돈 20만원을 마련해 전했다. 최 순경은 비번인 날 아이들을 목욕탕에서 씻기고, 이발소에도 데려갔다. 그런데 A군이 동생들과 달리 이발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머리를 자르면 집 난방이 안 돼 더 춥다"는 게 이유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최 순경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A군 사연을 들은 절도 피해자인 한복가게 주인은 선처를 요구했고 이불 한 채를 건넸다.
이들은 난방기름도 구입해 당분간 큰 추위는 안 겪을 듯하다. 이 경사는 "학교 무료급식이 시행되는 마당에 어떻게 이런 가족이 방치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이번 겨울이 지나고 또 찾아올 겨울을 이들이 어찌 날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A군 부모는 오래전 이혼하고 각자 재혼해 살고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천안 거주)와 같이 주민 등록이 돼 있지만 시골 할머니 집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다.
제주와 먼 곳의 사연이지만 그래도 우리네 세상사 이야기다. 우리 한국땅 어딘가에선 A군과 같은 처지에 있는 아동·청소년들이 아직도 많다. 그들은 이 추운 겨울날 따뜻한 남쪽나라 제주를 퍽이나 부러워 한다. 물론 그 제주에도 아직 우리의 따뜻한 손길이 미치지 않는 차가운 방구석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을 것 같다. 민족의 명절 설이 다가오는 이 시기만이라도 춥고 배고픈 우리의 이웃들을 다시금 돌아봤으면 한다.
☞조한필은? =충남 천안 출생. 고려대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고대사를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 편집부·전국부·섹션미디어팀 기자를 지냈다. 현재는 충청타임즈 부국장 겸 천안·아산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공주대 문화재보존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