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과 바늘로 그린 이야기 50년 ... "우리네 삶입니다"

  • 등록 2015.07.10 15:4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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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제주] 제주1호 수예점 산 증인 김문자 생활수예연구회장

근대화시기였다. 나라는 경제성장을 부르짖으며 대대적으로 나서던 1960년대. 삶은 궁핍하고 생활은 쪼들리던 집이 대다수.

 

어린 시절 그래도 집안 살림을 보탤 생각으로 바늘을 집어들었다. ‘수예’(手藝)바늘이다.

 

지난 8일 오후 제주시 설문대문화센터 기획전시실. ‘실과 바늘로 그린 네 번째 이야기’란 생소한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김문자 회장을 비롯 6명의 회원들 솜씨가 눈에 촘촘히 박힌다. 모임은 1960년대로 추억의 시간여행을 탄다. ‘수예’로 뭉친 이들이다. ‘제주1호’ 수예점 장인과 그의 손길을 따라 익히던 제주도내 여학교 가정 교사들이 다수.

 

 

 

그 손놀림이 어느 덧 50년. 수예장인 김문자(74) 제주수예생활연구회 회장이다.
'수예'는 손끝의 기술로 가정에서 실용품 ·장식품 ·완구 등을 만드는 예술이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싱’ 등 각종 첨단기기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다.

 

그 명맥을 이어가는 이가 김씨다. 김 회장의 말을 뒤따랐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교육정책은 1인1기(技)였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을 갖추는 것이었다. 학교 정식교과목에 있을 정도였다. ‘가정’과목에 일주일 5시간이 수업시수였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수예는 교과목에서 사라졌다.

 

물론 그 시절 기술인은 산업과 수출의 역군이자 외화벌이의 첨병이었다.

 

바로 그 시절 여학생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수예, 양재(양복재단), 미용이 고작이었다. "재단사나 미용은 그저 맞춰주는 것이지 내가 창작하는게 아니잖아? 시간이 좀 걸려도 내가 원하는 걸 아무런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만들고 싶었어“ 김씨가 수예를 고집한 이유였다.

 

그 시절엔 는 20살만 되도 ‘찬 나이’였다. 결혼 적령기다. 물론 궁핍한 시절이다 보니 혼수품은 모두 집에서 만들었다. 수예는 힘든 집안 사정 속에서도 유일하게 정성을 기울일 수 있는 혼수품 장만의 수단이었다. TV 덮개, 가구덮개, 덮개, 방석 커버, 베개·이불 등 침구류에 수를 놓으면서 자연스레 수예를 배웠다. 손놀림이 좋아선지 “소질있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학창시절 한 바늘, 두 바늘 자수를 놓다보면 비록 조금씩 비뚤어지고 느리게 갈 지라도 내 마음에 남아있는 따뜻한 흔적에 비하겠냐“는 게 그의 수예작품 예찬론이다.

 

그는 1962년 제주도내 수예 1호점인 ‘미미수예점’의 문을 열었다. 1989년까지 27년간 운영했다. 제주시내 남문로 입구에 어엿하게 내걸었던 간판이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주부·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물론 벌이도 잘 됐다. 그 역시도 시집살이를 시작할 무렵 손수 광목천에 꿴 십자수를 혼수로 가져갔을 정도다.

수예는 우선 바늘과 실, 천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일이니 무엇보다 도안이 중요했다. 그 시절 제주에 학생수예 교재를 만든 이가 그다. 결국 60·70년대를 산 제주도내 여학생이 모두 그의 제자나 다름 없는 셈.

 

처음 가게를 연 뒤 얼마 안 돼 3~4개의 수예점이 또 문을 열었지만 수예 교재는 물론 도안을 만드는 곳은 제주에서는 ‘미미수예점’이 유일했다. 전국에서도 몇 안 되는 수예점이었다. 그래선지 “제주도 돈은 다 끌어모은다”는 우스갯 소리도 들었다.

 

 

 

 

80년대로 접어들자 기계화에 밀려 수공예 산업은 결국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교육도 입시 위주로 바뀌면서 수예는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서양 실과 천을 사용한 퀼트와 십자수가 유행하고, 베개나 이불에 놓인 수도 ‘미싱’이 사람 손을 대신한 지 이미 오래다. 실을 뽑아내는 공장도 아예 없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식탁보, 베갯잇, 방석 커버를 보듬고 있다. 공 든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놓인 수는 유행과 거리가 멀다. 팔지도 않는다. 하나 뿐인 견본품이란 이유에서다.

 

“팔지 않겠느냐는 얘기 많이 들어. 그런데 팔아 버리면 예부터 현재까지의 수예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가 없어지니까 못 팔아. 천이며, 실이며 이제는 못 구하는 것들이야”

 

그러면서 그가 내민 작품은 비단에 명주실을 박은 동양자수, 자유로운 기법이 특징인 서양자수, 사실화에 가까운 치밀한 기법의 중국자수 등이다. 거의 ‘대한민국 수예의 교본’으로 불림 직하다.

 

오래된 작품은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호 수예점을 정리하면서 챙겨뒀던 200여점의 작품들이다. 오랜 세월 수예점포를 꾸려왔지만 “남은 게 해봐야 보따리 세 개밖에 안된다”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요즘 관심사는 ‘수예전도’다. 아예 ‘수예전도사’로 나설 생각이다. “가만히 얘기를 나누다보니 젊은 세대도 관심을 많이 갖더라”는 것. “여가시간에 쉽게 할수 있고 잡념과 스트레스도 없어지는 데 이렇게 좋은 게 없다”는 예찬론이다.

 

“학원 간 애들과 직장 간 남편을 수예를 하면서 기다리는 동안 정신수양이 절로 된다. 완성되면 성취감도 있다"

 

그는 “50여년 반세기에 이르는 수예 변천사를 보여주는 자료는 드물다”며 “제가 보관한 수예작품을 교육자료를 쓴다면 기꺼이 기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사라져가는 ‘수예문화’를 되살리고픈 간절한 꿈을 꾸고 있다. [제이누리=김동욱 기자]

 

김동욱 기자 rainbow@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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