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원리 주민 성금으로 세운 '4·3사건 희생자 위령탑'

  • 등록 2018.07.27 09: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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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회] 제주 처음 리민이 세운 위령탑 ... 매해 4월 3일 위령제 봉행

③ 리민이 세운 4·3사건 희생자 위령탑

 

제주 어느 곳에서든 비경 속에 숨겨진 아픔이 있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이 역사의식이다. 후손들 가슴속에 선조들의 삶과 죽음이 같이 할 때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사람이 되리라.

 

이러한 취지에서 우리 마을에서는 4·3 광풍에 휘날려간 슬픈 영혼들을 기리기 위해 행원리와 월정리의 우회도로인 행원리 1573번지에 ‘사삼사건희생자위령탑’을 세웠다.

 

4·3 당시 ‘반장·조합장 사건’과 ‘곱은재우영 사건’ 등으로 젊은 청년들과 마을 유지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행원리 주민들은, 4·3의 비극을 가슴속에 묻었다가 1998년 희생자 93위를 모신 ‘4·3사건 희생자 위령탑’을 제막했다.

 

이 위령탑은 당시 행원리 사삼유족회(회장 홍승대)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강공천씨가 기부한 2백여 평의 부지 위에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위령탑이 제막되던 해부터 매해 4월 3일이면 행원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위령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 위령탑은 마을 단위로는 제주에서 처음으로 리민 자체적으로 세운 것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하겠다.

 

④ 서청특별중대가 주둔했던 모교

 

 

1924년 지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사립으로 배움터의 문을 연 나의 모교인 구좌중앙초등학교는, 4·3 당시 토벌대가 주둔했던 장소였다. 당시의 모교는 월정, 행원, 한동, 평대, 덕천리 출신 아동들이 다니던 꽤나 큰 학교였다.

 

모교에는 1948년 11월경 9연대 일부 병력이 주둔하다가, 1948년 12월에 연대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2연대 2대대 11중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11중대는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되어 서청특별중대로 부르기도 했다.

 

당시 성산포와 모교에 주둔한 특별중대가 가장 악명이 높았다 한다. 이곳에 한번 끌려가면 살아 돌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구금된 사람들을 살리려고 소등 재산을 바치기도 했고, 안하무인의 군인들에게 희롱 당하는 여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모교에 근무하던 교사들도 희생되었다. 평대 출신인 김홍만 교사는 학교에서 군인들에게 매 맞아 죽었으며, 김지한 교사는 월정 포구에 끌려가 총살 되었다.

 

1949년 1월 8일, 11중대는 인근 한동리 주민 고승호(33세) 등 5명을 이곳으로 끌고 와 밤새 고문을 하다가 다음 날 학교 앞 비석 거리에서 총살하기도 했다.

 

나의 할아버지도 바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제주시에 있는 나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지나던 조부는, 고향을 빠져나간다는 죄명으로 재판도 없이 서청에 의해 총살당했다.

 

부친은 비명에 가신 할아버지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집안에 마지막 남은 혈족마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의 할머니는, 부랴부랴 부친을 부산으로 피신을 보내야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⑤ 연대봉은 그 허망한 역사를 알고 있다

 

 

나의 고향 집 바로 남쪽에는 한길이 나있고, 한길 붙은 큰밭 건너에는 연대봉이라는 자그마한 오름이 병풍처럼 동네를 두르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다소곳하게 마을을 품어주고 있는 정겨운 동산이다.

 

그곳은 나의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어린 시절 벗들과 놀이를 하면서 지낸 아련한 추억의 장소이다. 그곳에는 이중 분화구처럼 오목한 지형들이 있다. 아래 분화구는 꽤나 넓어 한 겨울에도 우리는 배구를 비롯한 여러 놀이를 즐겼다. 정상에는 권투장 크기의 작은 공간이 있어 글러브를 끼고 권투를 즐긴 기억도 새록새록 솟는다.

 

연대봉 정상은 바다는 물론 한라산도 볼 수 있고 주변의 여러 곳을 관망할 수 있는 명당이다. 그곳에는 무격신앙의 당이 있었고, 바로 아래에는 연봉사라는 절도 있다. 절 오백 당 오백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곳은 올레길 코스로 지금 산책로가 조성되어 올레꾼들이 오가는 명당으로 탈바꿈 하고 있다.

 

마을 선인들은 왜 이곳 이름을 연대봉이라 지었을까. 그 사연이 의아하다. 왜냐면 제주도 방어시설 중 ‘38연대’에 들어 있는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별의별 전설을 지어 지금도 표지판에 붙여놓고 있다. 이곳에서 보면 다도해 섬들이 연꽃모양으로 보인다고 하여 연대동산 또는 연대봉이라 이 름이 지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연대동산은 연대와 상관 깊은 이름일 것이다. 우리 마을의 옛 이름은 어등포이다. 예부터 다른 마을에 비해 포구가 잘 발달되어 선박 출입이 비교적 안전한 포구였던 어등포는, 제주도에 산재한 9개의 수전방호소 중 한 곳이었다.

 

동쪽 마을인 한동리에는 좌가연대와 왕가봉수대가, 서쪽 마을인 월정리(옛 이름 무주포리)에는 무주 연대가, 그 다음 마을인 김녕리에는 입산봉수대가 이웃하고 있었 다. 마을의 높은 지역인 이곳에서 이웃 마을의 연대와 봉수대와 교신했을 것이다.

 

이 지역을 관할했던 진은, 동쪽으로 10여 킬로 떨어진 별방진으로 지금의 하도리 바닷가에 복원되어 있다. 양방향으로 잘 트이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등포 수전방호소에서는, 위급상황을 교신하기 위해 이웃 마을의 연대와 봉수대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교신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어등포 수전방호소와 우선 교신했던 곳이, 같은 마을에 위치한 연대동산이라는 것이 필자의 역사·지리적 추정이다.

 

이곳은 또한 4·3 당시 산사람과의 내통을 막기 위해 성담을 쌓았 던 곳이다. 4·3이 일어난 1948년 11월부터 무장대 토벌작전을 벌이기 위해, 제주도 전역에서는 모든 도민을 동원하여 내성(높이 5척)을 축성하게 하였다.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체도민을 동원하여 해안선 위로부터 각 면과 리 경계선과 주요 골목에 외성(높이 12척, 넓이 6척)과 잣성 등의 석성을 구축해야만 했다.

 

우리 마을 생존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연대동산을 경계로 하여 바로 동쪽 동산으로 이어진 곳에 4·3 석성을 쌓았다 한다.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역사의 사생아 같은 유물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문영택 yeongtaek24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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