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도에서는 신석기 패총, 동굴유적, 고인돌, 탐라시대 유물 등 다양한 역사문화유적이 출토된 바 있다. 천진항 근처 패총에서는 신석기 후기에서 말기로 추정되는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연대 측정결과 3600년과 32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자료들을 통해 우도에는 약 3500년 전부터 해산물 등 수렵채집 집단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시적인 고기잡이 돌그물인 원담, 옛 포구인 개, 마을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방지하는 방사탑, 옛 등대인 도대불 등이 산재해 있다.
해안가 도처에는 해신당과 포제단, 불턱도 남아 있으며, 특히 1845년경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연대와 환해장성이 여러 곳에 원형으로 남아있다.
우도는 제주 본섬과 같이 말의 고장으로, 유한명 목사가 1697년 말 200필을 우도에 방목한 것이 시초이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그리도록 한 탐라순력도 41화폭 중 하나인 우도점마(牛島點馬)는 우도에서 방목되던 말을 점검하는 풍속도이다.
당시 우도에는 260여 필의 말이 방목되고 있었다. 이후 1823년 제주에 큰 가뭄이 들자, 이를 위무하기 위하여 위유어사인 조정화가 제주를 둘러보고, 조정에 출륙금지령 해제와 우도목장 개간을 건의했다.
출륙금지령(1629- 1823)은 그 해에 해제되나, 목장 개간은 20년이 지난 1842년이 되어 서야 허가되었다. 그는 서당을 지어 훈학에 앞장섰고, 농경에 전념할 수 있도록 우도선인들에게 과중한 부역과 세금을 덜어주는 역할도 주도했다.
본관이 경주인 김석린 진사는 한학자로 유명한 난곡 김양수의 부친이다. 1826년(순조 28년)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그는, 1842년(헌종 8년) 조정에서 우도에 기경(起耕)허가를 내리자, 1844년 부인과 함께 우도에 들어 와 이주민들을 훈학하며 촌락공동체가 이루어지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42년 우도와 가파도에 대한 입경허가가 나자, 제주목사 이원조는 유이민(流移民)들도 농산물과 해산물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진사는 당시의 세폐와 관폐에서 오는 어려움을 우도선인들 편에 서서 적절하게 해결하였다. 김진사가 죽은 후 우도 유이민들은 김진사의 공적을 기리어 우도 입경허가 60주년이 되는 1902년 4월에 ‘진사 김석린 유애비’를 소섬 중앙인 포젯동산에 세웠다. 2008년에는 같은 장소에 구휼비(救恤碑)도 세웠다. (유애비는 고인의 사랑을 기리기 위한 비이고, 구휼비는 어려운 사람들을 금전으로 구제한 이를 기리어 세우는 비이다.)
우도의 토지는 145년 동안 마소의 배설물로 버무려져 토질이 본도와는 사뭇 달리 비옥한 편이다. 183만여 평인 우도의 땅은 대개 천여 평 내외로 분할되어 있다. 그만큼 이주민들에게 땅을 골고루 분배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또한, 농로가 사통팔달로 많은 것은 경작하기 어려운 맹지를 최소화하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