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로 향했던 시선을 하도리와 상도리 그리고 저 멀리 송당으로 돌린다. 지미봉 서쪽은 철새도래지가 있어 제주 유일의 탐조관광지로 유명한 하도리 마을이다. 예전에는 별방이라 불리었다. 임진왜란 전 1510년(중종 5년) 장림목사가 이곳에 특별한 방어진지가 필요하여 지어진 이름이 별방진인데, 하도리 마을은 이후에 형성되었다.
하도리는 제주에서 해안선이 6.3km로 가장 긴 마을이자, 백록담에서 가장 먼 마을이고, 해녀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1932년에 일어난 해녀항쟁도 하도리 해녀의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세화리·종달리·연평리(지금의 우도) 출신의 해녀 등 연인원 1만 7000명이 참가 했던 해녀항쟁은, 제주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하도리에는 해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평야지대도 건천도 오름도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사시사철 샘물이 솟는 용천수가 20여 곳에 있고, 온갖 해초가 널린 깨끗한 바다가 있다. 하도리와 지미봉 사이에 있는 철새도래지는, 원래 바닷물이 들고 나는 물길이었는데, 간척사업으로 상류 쪽은 뭍이, 하류 쪽은 늪지가 되었다.
그 늪지에 저어새·도요새·천둥오리 등 20여 종의 철새가 내려앉고 오르는, 제주도 유일의 탐조관광지이다. 바다와 철새도래지를 가르는 제방다리 주변은 천국(天國)과 해국(海國)의 풍광에 빠지게 하는 매력적이고 고혹적인 곳이다. 일출 감상의 명소이기도 하다.
하도리는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1923년 사립으로 초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을 만큼 후세교육에도 남다른 관심과 지원을 한 마을로 또한 알려져 있다.
앞의 ‘우도의 연대와 환해장성’에서 일견했듯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왜구는 당시 무인도였던 우도에 상륙하여 주변 마을을 노략질하였다. 지미봉수대와 종달연대를 통해 교신했던 김녕방호소에서 수전선이 출발하면 왜구선은 멀리 도망가곤 했다. 1510년 우도를 잘 관찰할 수 있는 해안가인 이곳에 특별한 방어진지가 필요했고, 특별의 별과 방어의 방자가 합쳐 별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원래 상도리와 하도리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설촌유래를 들어다 보면 500여 년 전부터 이곳 사람들은 봉천수 물통을 근거지로 하여 살기 시작했다. 마을에는 지금도 ‘여수물’이라 부르는 봉천수가 있다.
상도리는 1510년에 구축된 별방진이 생기고 나서 형성된 마을이다. 웃드리인 상도리는 양반촌으로 알려졌다. 공무원 없는 집안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글을 숭상한 양반촌이다. 그러다보니 출세하여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많은 곳이 또한 상도리이다.
상도리는 양반촌이라는 자존심으로 바닷가를 다른 마을에 이양했단다. 바닷가에 올라온 송장을 이웃 바닷가 마을에서 처리하는 대가로 바다를 양보해버린 것이다. 지금은 해녀박물관 아래 바닷가 50m 정도가 상도리 마을 소속이란다.
상도리의 숨은 보물은 용눈이 오름 주변의 15만 평이나 되는 마을공동목장이다. 용눈이 오름을 돌아가면서 마을 목장을 형성하고 집집마다 소를 키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마을목장 일부를 ‘제주레일바이크’에 임대해 임대료를 받아 마을의 재원으로 삼고 있다. 필자에게도 우도 학동들과 함께 레일바이크를 타기도 했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