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과 후계를 위한 교육 ... 제주교육 천년사

  • 등록 2019.10.25 10: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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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이전의 제주교육 ... 교육기관이 없는 탐라, 제도교육도 없다

 

2016년 초 도교육청 교육국장 재직 시절, KBS 제주방송국에서 ‘제주가 보인다’라는 프로그램에 ‘제주교육 백년사’라는 제목으로 출연할 것을 제의하였다. 백 년 전이라면 짙은 아픔이 배어있는 일제 강점기 시대가 아닌가. 현대교육은 논외로 친다 해도 근대교육에 한정한다면 제주교육은 근현대에 기원을 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제주교육이 일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역으로 제의를 하였다. ‘제주교육 천년사’를 이야기 하자고. 이 제의가 받아들여져서 제주교육 천년사를 8부작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다음은 당시에 소개한 내용들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교육은 인류가 교육을 말하기 이전부터 인류의 생활 그 자체였고, 교육제도가 확립되기 이전부터 교육활동은 생존과 후계를 위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왔다. 모든 생활이 곧 생존과 후계를 위한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학동교육은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거치면서 국가교육과 세계교육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제주교육은 국가교육과 세계교육과 교류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신라천년과 천년 왕국 탐라가 상징하듯, 천년은 숫자적인 의미와 함께 장구한 역사를 상징한다. 이 장에서는 제주도의 제도교육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학교인 향교를 세운 전후로 하여 근대와 현대교육까지 나눠 기술하고자 한다.

 

향교 이전의 제주교육

 

제주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주호(洲胡), 도이(島夷), 탁라(乇羅), 영주(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탐라(耽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교육형태도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다. 탐라의 개벽설화의 일부인 ‘…삼신인(三神人)은 나이 차례로 삼신여(三神女)를 각각 배필로 맞아들여 물 좋고 토지가 비옥한 곳에 가서 활을 쏘아 살아 갈 땅을 정하니(射矢卜地사시복지)….’ 대목에서도 당시의 교육성격을 엿볼 수 있다.

 

‘물 좋고 기름진 땅을 골라’라는 말은 교육의 형태와 성과를, ‘활을 쏘아 땅을 정하니’라는 말은 교육에서 얻어진 질서와 규범을 나타내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성을 가진 사람들인 고·양·부 삼성인들이 외국에서 온 사람들인 벽랑국의 세 공주들과 섞여 살면서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통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사회를 지향했음을 엿볼 수 있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난 탐라선인들은 삼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진출, 통상무역을 하였다고 전한다.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8년의 고구려 멸망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귀족과 관리들이 탐라에 이주해왔으며, 그 후 고후·고청·고계 3형제는 통일신라에 입조하여 성주·왕자·도내의 세습직책과 국호인 탐라를 부여받았다고 전해진다.

 

7세기 말 탐라국 성주가 학자 고지창(支昌)을 신라에 보내 이두문자를 배워오게 했다는 기록과, 11세기 중국인 심괄의 몽계 필담’에 탐라 표류인들이 한자와는 다른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태의 글인 안행문자(雁行文子)를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탐라 선인들은 이두와 한자와 안행문자를 혼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여겨 진다.

 

992년 고려에서는 국자감을 세워 유학을 장려하였으나 탐라에는 교육기관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주민은 제도에 의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거나 없었다.

 

그러나 성주와 일부 특권층 자제들은 개경의 최충(984-1068)의 구재학당 등에서 수학하여 벼슬길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탐라인으로는 유일하게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정2품 평장사를 지낸 고조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1270년 입도한 삼별초가 1273년 1만2000 여몽연합군에 패하고 난 후, 제주는 백 년 동안 몽고의 지배에 들어가니, 원나라는 제주에 도적·죄수·왕족·관리·승려 등을 보냈다.

 

1374년 2만5000이 넘는 최영 장군 부대가 목호의 난 진압 차 추자도를 들려 제주에 상륙, 어업·농업·건축업의 문명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 운남에 세웠던 원 나라 양왕의 자손인 왕족이 탐라로 이주해 옴을 계기로 원나라의 상류사회인들이 제주에 영주케 되고 그들이 갖고 온 문물이 제주의 풍습과 문화, 교육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문영택 yeongtaek24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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