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시작이라는 1876년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우리나라가 서구열강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계기도 되었다. 신문화의 유입은 실학사상·동학사상·개화사상·위정척사 사상으로 이어지고, 외국에 사절단과 유학생 파견 등으로 군사·교육·산업·행정 등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경장 이후 신식학교 형태의 초등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져 소학교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조정은 현대적인 교육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여러 제도와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소학교령이다. 소학교령은 초등교육을 위해 1895년 7월 공포한 법령으로, 이영에 의하여 새로운 소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1883년 멜렌돌프 등이 세운 영어학교와 1885년 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등이 개교했다. 1895년 고종은 ‘교육을 국가보전의 근본으로 여기고 임금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야 교육이 제대로 설 수 있고, 국민은 교육을 받아야 국가가 바로 서고, 세상의 일에 무지몽매한 자는 필요가 없다.’라는 내용의 교육칙서를 발표하였다.
제주에서의 근대학교 시초는 1907년에 개교한 제주공립보통학교(제주북교의 전신)와 중등학교인 사립의신학교(제주제일중과 제주고의 전신)이다.
당시 제주군수인 윤원구는 신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나이 많은 학생은 사립의신학교로, 연령이 적은 학생은 제주공립보통학교로 입학시켰다.
국가의 흥망이 교육에 달렸다는 의지로 학교설립에 적극적으로 매달린 그는, 의신학교 계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제주도 5개면 88개 마을 이장들이 관덕정 앞에 모여 의연금 모금 결의대회를 열기도 했다. 교사(校舍)는 제주목의 객사로 사용하던 영주관(현 제주북초 근방)이었다.
1905년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한일병합 늑약)을 통해 조선을 영구히 식민지화하려는 술책으로 조선인의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일제에 충성하는 하급관리와 직업인을 양성하려는 교육정책을 담은 조선교육령을 4차에 걸쳐 공포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8년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 활동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