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납치사건
조중훈이 이토록 비행훈련장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근 지역 주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려 세 번씩이나 비행훈련장 확장을 시도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자료를 읽던 김수남은 의문이 들었다. 그 내막은 아주 오래전 조중훈이 박흥식으로부터 녹산장 땅을 매입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땅을 차지한 20여년 동안 조중훈의 머릿속에는 온통 비행훈련장 생각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91년 한 일간지에 연재한 자서전 형식의 글에서 조중훈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동목장이 정부의 축산장려정책에 부응해 한라산 기슭에 문을 연 것은 1972년 3월이다. 이 한라산 기슭 황무지는 흥한화섬 사장인 박흥식씨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매물로 내놓은 물껀을 사들인 것이다.
박흥식이 해방 전에 이 황무지를 불하받은 데는 나름의 애국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곳에다 활주로를 닦고 조종사 훈련장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박흥식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선일지물 사장을 역임했을 만큼 사업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그가 비행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화신백화점을 세운 뒤인 일제강점기 말기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라는 비행기 제작 공장을 차리면서부터였다.
당시 조선의 청년들이 방패막이로 징용에 끌려가는 것을 보고 이들의 징집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비행기 제작공장을 설립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징집 대상자들을 이 공장에 취업시킴으로써 징용면제를 받도록 유도해보려 했던 것이다. 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설립 후 단 한 대의 비행기도 생산치 못하고 해방을 맞음으로써 그의 꿈도 필요성이 없어졌다. 또한 자체로 만든 비행기로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사두었던 제주도의 황무지도 내가 매입할 때까지 그냥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조중훈은 어째서 박흥식의 해방 이전 행적을 이토록 장황하게 떠벌이고 있는 것일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박흥식의 친일 혐의에 대해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조중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내가 그 황무지를 산 것도 당초에는 일본항공과 제휴해 조종사 훈련장을 건설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일본의 한 은행에서 2000만 달러를 융자받아 장차 조종사 부족 시대에 대비하여 점보기급 훈련비행장을 세워놓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과 협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1973년, 공교롭게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일어나 한일관계가 최악의 사태로 빠지는 바람에 모처럼 계획했던 조종사 훈련장 건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 조중훈 처음부터 비행기 조종사의 훈련장을 만들기 위해서 녹산장 땅을 구입했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제동목장 조성이 첫 번째 목적이 아니었다.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주도로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영토에서 한국 국가기관이 공권력을 행사한 이 사건은 외교 문제로 즉각 비화하여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이때 조중훈은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이 박정희 정권에 강경한 입장을 보이지 않도록 로비를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오사노 겐지였다. 그는 조중훈이 제동목장에 조종사 훈련장을 건설하려고 제휴를 시도했던 일본항공 대주주였다.
조중훈은 오사노의 소개로 다나카 총리를 만나 사건 무마를 청탁했다. 외환은행 도쿄지점에서 인출된 3억 엔이 두 차례에 걸쳐 다나카에게 넘어갔고, 서울에서 다섯 명의 접대부를 데려가 다나카의 환심을 샀다.
3억 엔의 정치자금 기부로 조중훈은, 납치사건으로 국제적 고립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구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나카 매수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가히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이대도강(李代桃殭)의 경지를 구가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조중훈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마치 자신이 손해를 본 양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제동목장 조종사 훈련장 건설이 무산되었다고 생짜를 놓고 있는 것이다.
1982년 마침내 조중훈은 건설부로부터 훈련장 시설지역에 대한 공공 입지 승인을 얻어 기초비행훈련원을 설립했다. 10여년 동안 가슴앓이를 했던 비행훈련장이었다. 조중훈은 초지에서 비켜난 땅에 900m×25m의 활주로를 닦고 1단계 기초비행훈련장으로 활용한다. 당시를 조중훈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국내 어느 곳이고 긴 활주로를 닦고 훈련기를 띄울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보안구역이나 비행 제한 공역이 있어 헬리콥터 한번 띄우는데도 일일이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죠. 이러한 상황에서 제동목장의 부지는 황금 같은 적재적소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애당초 이곳을 매입할 때 점보기 비행훈련장으로 사용하려 했었기에 적극적으로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지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조중연= 충청남도 부여 태생으로 20여년 전 제주로 건너왔다. 2008년 계간 『제주작가』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탐라의 사생활』, 『사월꽃비』가 있다. 제주도의 옛날이야기에 관심이 많아 이를 소재로 소설을 쓰며 살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