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래를 펼 찬란한 여명, 다시 비상하는 제주가 나의 꿈"

  • 등록 2023.11.02 14: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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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제주현대사의 주역 신구범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 ... 성공과 좌절의 연대기

 

“제주도가 내게는 행운이자 기회였다. 당선과 더불어 낙선도 있었기에 나는 독선의 해악을 알게 되고 비전과 가치공유의 미덕을 학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첫 선거에서 낙선한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하는 반성과 회한을 내 삶의 성숙을 위한 자양분으로 비축할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신조대로 살았다. 그의 신조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였다.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제29대 관선 제주도지사를 거쳐 초대 민선 제주지사를 역임한 신구범.

 

1942년생인 그는 모진 풍파와 시련의 삶을 뒤로하고 향년 81세의 나이로 2일 아침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는 풍운아이자 좌절한 혁명가, 최고의 기획가였다.

 

그의 유년시절 기억 하나. 누구나 그렇듯 '제주현대사'였다. 조천읍 신촌리 태생인 그는 초등생 시절 '4.3폭도의 수괴'로 불린 이덕구의 아들과 단짝이었다. 그 단짝은 그 참상의 시기에 홀연 사라졌다. 그 기억을 더듬어 좌.우파로 나뉘어 치러지던 4.3위령제는 그의 지사재임 시절 처음으로 '합동위령제'로 치러졌다. 

 

장년기 기억. 그는 농림부 축산국장 시절 한국마사회의 체육부 이관을 반대하다 당시 6공의 황태자인 박철언 장관에 '찍혀'(?) 미국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그 일로 그는 김영삼(YS) 야당 총재의 눈에 들어 훗날의 영광을 담보했다.

 

그의 이력엔 그렇게 곳곳에 그런 스토리가 즐비하다. '위기'와 '기회'를 넘나들었다.

 

그는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국제식량농업기구(FAO)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19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늘푸른~'.'희망찬~' 등의 구호가 난무하던 그 시절 신구범 민선 도정의 슬로건은 '위대한 제주시대를 연다'였다. 파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옥고를 치렀다. 삼무힐랜드는 그의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그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업적보다 안타깝게도 국회에서 그가 한몸을 던지며 벌인 사건때문이었다. 축협중앙회장 시절 그는 정부의 강제적인 농.축협 통합에 반발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지원받아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는 국회에서 할복사건을 벌여 파란을 일으켰다. 인생의 굴곡과 고비마다 정면도전하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간다'는 그의 신조를 지켰다.

 

그러나 제주에선 그보다 그의 찬란한 업적을 기억하는 이가 더 많다. 공기업 제주개발공사를 세워 ‘삼다수 돌풍’을 불러왔고, 지자체로선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관광복권을 발행, 지금 연간 2000억원에 육박하는 로또 배당수익금을 받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그였다.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유치 실패를 기회로 삼아 서귀포 중문에 제주국제컨벤션센터란 금자탑을 만들어낸 것 역시 그였다. 지자체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수출무역기업인 제주교역이란 공기업을 만든 것도 그였다. ‘세계 섬들의 문화올림픽’이란 기치를 내건 세계섬문화축제 역시 그의 기획작품이다.

 

구좌읍 행원리에 조성한 풍력발전단지 역시 그가 주도해 일군 국내 첫 상용·상업풍력발전이란 지점에 이르다보면 지금 21세기 제주도가 먹고 사는 그많은 먹거리가 그의 두뇌와 손끝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98·2002년 두 번의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그에게 검찰은 칼끝을 겨눴다. 그가 재임중 사회복지법인으로 세운 은혜마을은 돌연 뇌물수수의 소재로 작동했고, 유·무죄를 오가던 그는 최종심을 거쳐 옥살이 신세로 뒤바뀌었다. 수감중엔 희대의 폭력조직 ‘양은이파’를 이끌었던 조양은으로부터 ‘형님’ 대접을 받는 웃지못할 일까지 생겼다. 면회를 간 지인들은 "미래를 넘나드는 제주에 대한 강의만 듣고 왔다"는 푸념이 나온 것도 일화다.

 

감옥에서 풀려나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제주도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꿈을 보였다. 그러나 홀연히 등장한 원희룡 후보에게 그는 다시 석패했다. 당선된 원 후보는 그럼에도 그의 혜안을 존중했다. 그에게 인수위격인 ‘새도정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원희룡 도정의 출범에 일조했다. 그 일을 끝으로 그는 공적인 일에서 모두 퇴장했다.

 

 

그는 2012년부터 1년여간 <제이누리>에 그의 회고록을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로 연재했다. 그의 회고를 묶어 펴낸 책 『삼다수하르방, 길을 묻다』가 그의 마지막 유고다.

 

그 책의 본문을 시작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가 떠오를 때 난 제주의 비상을 꿈꾼다. 해가 질 무렵 난 제주에 지혜의 샘이 솟고 있다고 믿는다. 성공도 있었지만 과오도 많았다.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제주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책의 말미엔 이렇게 적었다.

 

“어둠이 너무도 짙었기에 그만큼 우리에게 지혜의 샘도 깊다. 우리 제주가 다시 나래를 펼 찬란한 여명도 그만큼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일흔을 넘긴 나는 지금도 다시 비상(飛上)하는 제주도를 꿈꾼다.”

 

빈소는 제주대병원 장례식장 제1분향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6일 오전이다. 당일 오전 6시 제주영락교회 대예배실에서 천국환송예식이 열린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

 

양성철 기자 j1950@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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