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의 회초리는 매서웠다. 4ㆍ10 총선은 야당 압승과 여당 참패로 귀결됐다. 더불어민주당과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 175석, 여기에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진보당까지 포함하면 192석의 ‘거야’가 탄생했다.
총선에서 표출된 민의는 안정보다 견제와 변화였다. 선거기간 내내 정권심판론이 다른 이슈를 압도했다. 국민의힘이 ‘이(이재명)ㆍ조(조국) 심판론’으로 맞서며, 각종 초대형 공약을 쏟아냈지만 통하지 않았다.
여당의 참패는 집권세력 전체에 대한 심판 성격이 짙다. 국민은 소통과 타협을 외면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에 레드카드를 꺼내들었다. 국민의힘에 있어서 윤 대통령의 낮은 국정수행 지지도는 구조적 족쇄였다.
이태원 참사와 해병대 채 상병 순직 등 국가적 재난과 비극에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해병대 외압 수사 의혹 피의자인 전 국방장관의 호주대사 임명과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회칼 테러’ 발언 등으로 무책임 이미지를 키웠다. 고물가와 의정(醫政) 갈등 등 민생 현안 해소에도 실패해 불통ㆍ무능력 이미지를 더했다.
원내 1당이 된 민주당은 스스로 잘해서가 아니라 현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의 반사이익을 얻은 측면이 상당하다. 부산ㆍ울산ㆍ경남(PK) 지역에서 민주당 의석이 줄고, 텃밭이던 서울 도봉갑 지역구에서 의외의 일격을 당한 점이 이를 보여준다.
‘비명횡사’로 불린 공천 파동과 일부 후보들의 도덕성ㆍ자질 논란에도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표를 몰아준 것은 그만큼 현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정서가 강했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12석)이 제3당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총선 이후 정국은 시계 제로(0) 상태다. 21대 국회처럼 대통령실ㆍ여당과 입법권을 쥔 민주당이 대립과 반목을 거듭해선 곤란하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남은 임기 3년 동안 국회, 특히 야당의 협조 없이 국정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먼저 야당 의견을 경청하고, 국정에 반영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필요하면 여야정(與野政) 협의기구를 먼저 제안해 가동하는 것도 방법이다.
윤 대통령은 11일 “총선에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고 경제와 민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대통령실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한덕수 국무총리와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을 포함한 용산 고위 참모진도 사의를 표명했다.
이제라도 독선과 불통 이미지를 벗도록 국정운영 방식을 바꿔야 마땅하다. 대통령실의 국정 쇄신 의지 천명이 국면 타개용 립 서비스에 그쳤다가는 스스로 ‘레임 덕(lame duck)’을 넘어 ‘데드 덕(dead duck)’ 상황에 빠져들 수 있다.
국민의힘도 뼈를 깎는 혁신을 하고, 용산 대통령실에 할 말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은 고물가ㆍ고금리와 청년실업,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감소 및 지역소멸 우려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미국-중국간 패권다툼이 격화하는 등 국제정세도 살얼음판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글로벌 경제전쟁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2차전지 등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당이 용산만 바라보지 않고, 경제난과 민생 대책을 적극 마련하고, 야당과의 대화 및 협치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선거에서 이긴 민주당 등 야권도 자만하지 말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민생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거대 의석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 연금ㆍ노동ㆍ교육ㆍ의료 개혁 등 국가적 과제에는 야당도 독자적 입장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21대 국회처럼 법률이나 예산안을 좌우하려 들거나 탄핵안을 남발해선 곤란하다.
2022년 3월 ‘비호감 대선’에 이어 2024년 4월 ‘증오 총선’이 진행됐다. 비전과 정책 대결이 실종된 채 서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막말과 네거티브가 난무하고 진영 갈라치기와 팬덤이 횡행했는데도 투표율은 67.0%로 1992년 14대 총선(71.9%) 이후 32년 만에 가장 높았다.
국민의 선택은 언제든지 의미가 있고 옳다. 정치권은 선거 결과에 나타난 민심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하고, 야당은 국정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 국정 현안을 놓고 대화해야 한다. 총선 이후에도 진영 논리에 함몰돼 극한 투쟁을 반복하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손실이다. 국력을 모아야 점증하는 경제ㆍ안보 위기의 파고를 헤쳐 나갈 수 있다.
국민은 여야 정당들이 협의하는 정치, 책임을 지는 정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희망을 주는 정치를 원한다. 파행적인 정치 구조와 행태를 바꾸기 위해 1987년 체제 이후 40년 가까이 그대로인 헌법을 개정하는 논의도 필요한 시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