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향토음식명인이 생각하는 '제주의 맛'은 어떤 맛일까.
제주도 조례에 따라 지정되는 제주향토음식명인은 제주에 살면서 향토음식 관련 최고 수준의 기능을 갖추고 동시에 향토음식 육성 발전에 공헌한 사람을 일컫는다.
지난 2010년 김지순(88) 선생이 향토음식 초대명인으로 선정된 데 이어 8년 뒤인 2018년 고정순(81) 제주향토음식문화연구소 소장이 제2호 명인으로 지정됐다.
올해 부정숙(61) 사단법인 제주문화포럼 원장이 새롭게 명인으로 선정되며 15년간 세 명의 명인이 이름을 올렸다.
세 명인이 지금까지 연합뉴스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주향토음식의 맛과 특징, 가능성을 들여다본다.
◇ 원재료 맛 살린 사계절 건강한 밥상
"천혜의 제주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한 다양하고 신선한 식재료와 최소한의 양념으로 원재료의 맛을 살린 건강한 밥상."
평생을 제주향토음식을 연구해 온 김지순 제1호 명인은 "제주향토음식은 복잡하지 않다"며 이같이 말한다.
김 명인은 "어패류 등 신선한 원재료의 맛을 살릴 수 있는 음식이라서 양념을 많이 쓰지 않는다"며 "예로부터 제주에선 고추농사를 짓지 않아 된장과 간장으로만 간을 했다"고 설명했다.
김 명인은 "제주 사람들은 계절을 거스르지 않은 제철음식을 만들어 사계절 파릇파릇한 푸성귀로 쌈을 싸서 먹었다. 어렵게 살던 시절 양이 부족해 음식이 다소 빈약하더라도 영양면에서는 고르게 섭취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슬로푸드(slow food)이자 웰빙음식"이라고 강조했다.
패스트푸드의 반대 개념인 슬로푸드는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란 식재료를 활용한 정성과 손맛이 깃든 전통음식을 의미한다.
식품영양학과 교수를 정년퇴임을 한 뒤 제주 음식문화연구에 매진해 온 고정순 제2호 명인은 슬로푸드로서 제주향토음식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지난 2004년 자코모 모욜리 슬로푸드국제위원회 부회장 일행이 제주를 찾았을 당시 고 명인은 '60년대 제주인의 밥상' 전시하면서 여름철 별미인 자리물회 요리 과정을 시연했다.
몸길이가 18cm 안팎까지 자라는 자리돔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리는 것 없이 모두 섭취할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돔으로 만든 자리물회는 대표적 제주향토음식이다.
맛을 본 모욜리 부회장은 "완벽한 슬로푸드"라고 극찬했다.
고 명인은 "슬로푸드 운동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듣자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제주 음식에 대한 열등감을 털어버리게 됐다"며 "제주 음식을 잘 다듬으면 세계인들로부터 관심을 끌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고 명인은 이어 2011년에는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해 온 추사 김정희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토대로 '추사 유배길 음식 상품 개발 전시회'를 열었고, 국제민간기구 슬로푸드가 추진하는 '맛의 방주'에 전통 발효 음료인 '쉰다리'를 올리는 데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 제철음식을 활용한 제주만의 사계절 밥상을 선보였다. 봄·여름·가을·겨울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만든 만큼 몸에도 좋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슬로푸드이기 때문이다.
고 명인은 "이것이 바로 제주향토음식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 "향토음식 재현 보다 옛 식재료 구하기 어려워"
명인들은 제주향토음식의 또 다른 특징으로 '조냥정신'('절약정신'을 뜻하는 제주어)을 강조한다.
제주향토음식은 제철에 나는 신선한 식재료가 가장 중요한 만큼 오래오래 아껴먹는 게 중요했다.
김지순 명인은 "자리젓을 먹다 보면 나중에는 가시만 남게 되는데 제주사람들은 이걸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물을 넣고 끓여 국으로 만들어 먹었다"며 "제주음식을 보면 참으로 절약해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죽하면 쉰 밥에 누룩을 넣어 쉰다리를 만들어 먹었겠느냐"고 말했다.
김 명인의 아들인 제주향토음식 전수자 양용진 제주전통음식보전연구원장도 "생선을 먹을 때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쓸개 정도만 빼서 나머지를 모두 먹었고, '자리'인 경우 비늘을 벗기지 않고 가시까지 완전히 먹을 수 있도록 바싹 익혀 먹었다. 옛날 제주 사람들처럼 먹는다면 요즘과 같은 음식물 쓰레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
제주야말로 몇백년 전부터 '매크로바이오틱'(Macrobiotic) 식습관이 생활화돼 있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매크로바이오틱이란 음식재료를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로 보고 흔히 버리는 부분인 껍질과 뿌리까지 통째로 요리해 제철음식을 먹는 자연식 식이요법이다.
이처럼 많은 장점을 가졌음에도 제주향토음식의 미래에 대해서는 걱정을 내비쳤다.
김 명인은 제주에서 나는 10가지 해조류를 재료로 향토음식 발표를 하는데 정작 음식을 재현하는 것보다 식재료를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너패('넓패'의 제주어)라는 해조류를 해녀들에게 부탁해도 구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구해 국을 만들었다"며 "몸국의 주재료인 몸('모자반'의 제주어)도 예전에는 거친듯하면서도 국을 끓이면 제대로 된 맛이 우러나왔는데 요즘에는 양식을 해서 그런지 너무 부드러워져 예전의 맛이 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제주관광대에서 관광호텔조리과 교수를 지낸 제3호 부정숙 명인 역시 "자연산 식재료가 가장 중요한 제주향토음식 강의를 할 때 가장 힘든 부분이 재료를 구하는 일"이라며 "기후 위기 상황에서 제주어로 '물토새기'라 하는 군소를 비롯해 성게, 전복 등 질 좋고 가격도 저렴한 자연산 원물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고 말했다.
그는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오분자기 같은 경우는 종패(種貝)를 제주 앞바다에 뿌려도 안자란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양용진 원장은 "생태환경 자체가 너무나 변해 자연에서 나는 해조류와 식물도 변하고, 농가에서도 소위 돈이 되는 작물만 재배하다 보니 재래종 작물은 도태돼 사라지고 있다"며 "토종, 재래종이라는 것은 그 땅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정착한 식재료인데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농사를 짓다가 포기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제주향토음식 고유문화 전하는 메신저"
제주향토음식은 제주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부정숙 명인은 평소 학생과 귀농귀촌인,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조리법 만큼이나 제주의 음식 문화를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부 명인은 "제주 문화를 이해하려면 제주 음식을 알아야 한다"며 "제주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는 음식 속에 그들의 생활과 관습이 녹아들어 있고 이를 통해 제주 사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단순히 조리법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음식 안에 들어있는 스토리, 제주 음식 인문학을 함께 전달하려 노력한다"며 "봄을 알리는 제주의 고사리, 나눔을 바탕으로 한 돼지 문화 등 이야기를 가미하면 제주 음식은 훨씬 더 맛있어진다"고 강조했다.
부 명인은 무엇보다 구술로 전해온 지역별 해녀음식문화를 전수받아 조리법을 개발하고 보급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았다.
지난 2016년 12월 1일 제주 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정숙 명인은 당시 좌혜경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위원, 김선희 방송구성작가와 함께 해녀들의 음식문화를 연구했다.
해녀들이 직접 채취한 해산물과 해초를 조리해 판매하는 제주의 '해녀의집'을 전수조사하며 해녀 20명의 음식 조리법을 구술채록한 뒤 실제 음식으로 구현해냈다.
부 명인은 "80세 넘는 제주 해녀분들이 돌아가시면 현재 남아있는 해녀음식 조리법이 정말 다 묻혀버리지 않을까 염려된다"며 앞으로 제주 해녀들을 찾아 다시 인터뷰하며 마을마다 다른 해녀음식 조리법을 재현해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 제주향토음식은 달고 맵고 짠 자극적인 맛에 길든여진 현대인들을 위한 안성맞춤 건강식이다.
고정순 명인은 "비만, 당뇨, 각종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젊은 세대에게 건강한 제주향토음식이 제격"이라며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양념이 과하지 않은 재료 본연의 맛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찰음식과 제주향토음식은 공통점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첫날 밍밍한 음식 맛에 거부감을 느꼈던 사람들도 5일째가 되면 '먹고 나서 속이 편안해 좋다'는 말을 저절로 한다"며 "'내가 먹은 음식의 결과물이 곧 내 몸'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의 이치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김지순 명인과 양용진 원장은 "오늘날 (외식이 잦은) 현대인들의 영양 상태에서 본다면 제주향토음식 이상 좋은 음식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되살려야 한다"며 "제주 향토음식으로 된 밥상을 본 한 대학 교수는 '오래된 미래'라고 극찬했다"고 전했다.
앞으로 우리 현대인들이 먹어야 할 밥상이 바로 오래전부터 제주에서 먹었던 향토음식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가치 있는 밥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향토음식은 그 지역의 고유문화를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주향토음식점 종사자에 대한 교육, 재교육이 필요하다"며 "제대로 만들어 제값을 받는 음식점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주 토종 재료로 제대로 만든 향토음식이라면 사람들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고 전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