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 불안과 미국의 통화정책 전환이 겹치면서 원·달러 환율의 심리적 저항선 1450원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17.5원 치솟은 1453.0원으로 출발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이 긴급 거시경제금융회의(F4 회의)를 열고 당국의 시장 개입을 예고했다. 이후 1448~1453원을 오르내리다가 1451.9원으로 주간 거래를 마쳤다. 환율이 1450원을 넘어선 것은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3월 13일(1483.5원) 이후 15년 9개월 만의 일이다.
이날 환율 급등은 미국 달러화 강세가 이끌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통화정책 전환을 예고한 게 도화선이 됐다. 연준은 시장 예상대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그러면서 향후 금리인하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밝혀 달러 초강세를 촉발했다.
환율이 1450원을 뚫고 급등한 데는 강强달러와 한국경제 저성장을 비롯한 경제적 요인 외에 12·3 내란 사태 이후 정국 불안 등 정치적 요인이 가세했다. 경제성장률이 올해 정부 목표보다 낮은 2.1%에 이어 내년에는 1.9%로 더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내년 1월 20일 출범하는 미국 트럼프 2기 정부의 정책이 미칠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12·3 사태 이후 차기 대선까지 험난해 보이는 정국 안정, 국내외 투자자의 자금 이탈로 인한 달러 수요 증가도 원화가치 약세를 부추긴다.
그래도 12·3 사태 이전에는 1400원이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졌다. 내란 사태 이후 1430원대가 일상화했고, 19일엔 1450원마저 넘어섰다. 시장 일각에선 내년 1월 전후 1500원을 돌파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400원을 넘어선 고환율은 역대 네번째다. 경제위기-1997년 말 외환위기(최고 1995원),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1597원), 2022년 레고랜드 사태(1444원)-와 궤를 같이한다. 당시 고환율 상황은 각각 6개월, 6개월, 2개월 이어졌다. 이번 고환율 국면은 11월 초순 이후 두 달째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고환율 추세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본다. 골드만삭스는 미 연준의 매파적 기조로 인해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시점이 지연될 것으로 본다. 노무라연구소는 내년 2~3분기 환율이 1500원을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수입물가가 이미 10월, 11월 두달 연속 올랐다. 고환율은 수입물가를 더 끌어올려 그렇지 않아도 부진한 내수에 악영향을 미친다. 수출 제조기업의 원자재 수입 부담을 가중시키고 수익성을 떨어뜨린다. 식량 자급률이 낮은 한국은 식품 원재료도 많이 수입하기 때문에 식품기업들도 제품 원가 인상 압박을 받는다.
환율이 불안하자 기업들이 내년 사업계획을 세우는 데 애를 먹고 있다. 9월 말 기준 국내 기업과 금융권의 외화 빚은 약 610조원. 환율이 오를수록 원화로 환산한 외화 빚 원금과 이자 부담이 커지는 구조다.
외환보유액은 11월 말 기준 4153억9000만 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최근 3년간 외환보유액은 감소세이고,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300억 달러 넘게 줄었다. 급격한 외화 유출로 자칫 외환보유액 4000억 달러 선이 무너질 경우 국가 신용등급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은은 국민연금과의 외환 스와프 거래 한도를 500억 달러에서 650억 달러로 늘리고, 연말로 끝나는 계약기한을 1년 연장하기로 했다. 필요한 조치다. 외환 스와프는 국민연금이 해외자산 매입 등을 위해 달러가 필요할 때 외환당국이 외환보유액에서 달러를 먼저 공급하고 나중에 돌려받는 구조다. 이밖에도 동원 가능한 다른 환율 안정 조치를 적극 강구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올해 30조원에 이르는 세수결손을 메우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을 끌어다 쓰려던 계획도 자제해야 마땅하다. 외국환평형기금은 환율이 급등락하면 달러나 원화를 사고팔아 환율을 안정시키는 ‘외환 방파제’다. 지난해 20조원을 전용했는데 올해도 손대기로 했다.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에서 이태 연속 외환 방파제를 헐어 펑크 난 세수를 돌려막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위태롭다.
고환율 추세가 계속되면 내년 성장률이 1% 중후반대로 내려앉을 수 있다. 환율 수준 자체도 문제지만 정국 불안으로 인해 환율 변동폭이 커지는 형국이다. 여야 정당과 정부가 협의체를 조속히 가동해 정치적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대외적으로 한국의 경제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관리된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지금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이나 거부권 행사 문제 등을 놓고 정략적 계산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빠르고 엄정한 내란 사태 수사와 탄핵 심판으로 정치 리더십 부재 상태를 조기 종식해야 한다. 대외 악재에 맞서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국내 정치의 불확실성으로 환율 불안을 초래하는 것은 자멸 행위다. [본사 제휴 The Scoop=양재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