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림이고, 그림이 삶 … 파킨슨병에도 놓지 않은 붓

  • 등록 2025.04.11 15: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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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산다] 떨리는 손끝으로 '열린 시간'을 그려내는 화가 강창열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매일 새벽,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면수동 마을회관 2층. 고요한 작업실에서 떨리는 손끝으로 붓을 쥐는 남자가 있다.

 

강창열(77) 화백.

 

파킨슨병으로 손은 끊임없이 떨리고, 왼쪽 눈은 오래전에 시력을 잃었지만 그는 오늘도 화폭 앞에 선다.

 

"그림은 늘 혼자였던 나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부산 을숙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독과 함께 자랐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외지로 떠돌았다. 사람보다 자연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바람, 바위, 새, 꽃과 놀며 스스로 그림을 익혔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그림만큼은 놓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말할 때 친구 얘기를 하지만 난 을숙도의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그림은 강 화백의 삶 그 자체였다.

 

 

아버지 뜻에 따라 한양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그림 인생을 시작했다. 곧바로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 첫 작업실은 화장실이었다. 잠잘 곳이 없었던 그는 화판을 깔고 그 위에서 잠을 청하며 그림을 그렸다.

 

"53㎏까지 말랐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래도 붓만은 놓지 않았어요. 남들이 저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했죠. 그런데 맞아요. 저는 그림에 '미친놈'이에요."

 

작가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친구의 빚보증으로 강남 아파트를 잃고, 막대한 빚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였어요. 그때의 참담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죠. 그런데 그런 감정도 오래가진 않더라고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다시 붓을 들고 있었어요."

 

그는 다시 일어섰다.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빚을 조금씩 줄여나갔고, 기적처럼 부활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죠."

 

 

그리고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제주'였다.

 

2014년,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느덧 몸에 파킨슨병이 찾아왔고, 가진 돈은 24만원이 전부였다. 바닷가에서 광어회와 소주 두 병을 마시며 그는 결심했다.

 

"하도리의 바다는 을숙도와 닮았어요. 여기에 정착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제주 하도리 면수동 마을회관 2층에 자리를 잡은 그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작업실을 내주고, 먹을거리를 나눠주었다. 그 따뜻한 인연 속에서 그는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낯설고 조심스러웠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신뢰와 애정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다들 저를 경계했죠. 그런데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말수 적은 성격도 지켜보며 마음을 열어주셨어요."

 

그의 하루는 고요하고 단조롭지만 치열하다. 새벽이면 작업실에 불이 켜지고, 그는 떨리는 손을 붙잡고 천천히 붓을 든다. 하루 두 시간 그릴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아침엔 손이 더 심하게 떨려요. 새끼손가락을 캔버스에 대고 겨우 그리죠."

 

그렇게 한 땀 한 땀 덧칠하며 그림은 완성된다.

 

강 화백의 작품은 선을 사용하지 않는다. 색과 면의 경계를 통해 형태를 만들어내는 독특한 상감기법을 사용한다. 색채도 원색을 피해, 한국 자연에서 본 빛과 색을 조합한다.

 

"겉보기엔 파란색이지만, 그 안엔 빨강도 들어 있어요. 우리도 다 똑같아요. 겉보기엔 거칠어보이지만 속은 여리듯."

 

 

그의 말처럼, 작품은 단순하지 않다. 은은한 색감과 깊이감, 한국적 정서가 스며든다.

 

그는 단지 색을 칠하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의 기억과 감정을 쌓고, 흘러가는 시간의 틈을 붙잡아 화폭에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탁계석 음악평론가이자 예술비평가협회장은 우연한 자리에서 강 화백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썼고, 그 시는 창작곡으로 완성돼 무대에서 연주됐다. 강 화백의 그림이 가진 음악적 메시지가 음악가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그의 수 많은 작품들은 뉴욕, 파리 등지의 유명 미술관에서도 전시됐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로제르 부이로(Roger Bouillot)는 "그의 작품은 인간의 염원을 시처럼 풀어낸다"고 평가했다. 미국, 프랑스 등 수 많은 국가의 미술업계에서 전속 제안도 받았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순댓국이 먹고 싶어서 한국에 돌아왔어요.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도 좋지만 내 뿌리는 한국이니까요."

 

그는 모든 작품에 '열린 시간'이라는 같은 제목을 붙인다. 특정한 의미나 해석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기억과 감정으로 자유롭게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제목 짓는 게 가장 싫어요. 그림은 느낌이에요. '열린 시간'이라는 건, 누구나 자유롭게 느끼라는 뜻이에요. 제목이 없으니 보는 사람의 경험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투영되더라고요."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도 지켜나가고 있다. 가격을 낮추지 않겠다는 원칙도 그 때문이다.

 

"그림은 내 삶이고, 내 유산이에요. 내 손으로 내 삶의 가치에 할인을 하고 싶지 않아요. 내 가족과 후대에 남기고 싶어요. 자랑스런 남편이였고, 아버지였고, 화가였다는 것을."

 

실제로 두 아들과도 최근 화해하며 자신이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자랑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아버지로서 미안한 게 많았어요. 그림만 보고 살아온 삶이 가족에게 상처가 됐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최근엔 두 아들이 제 그림을 보고 감동했다는 말을 전해왔어요. 오해들도 풀렸고 지금 삶이 가장 황금기 인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의 작업실엔 300점 가까운 작품이 쌓여 있다. 서울에 남겨둔 작품까지 합치면 400점을 넘는다. 그의 마지막 꿈은 제주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이다.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이름 석 자와 삶을 보여주고 싶어요. 나라는 사람, 이런 그림을 남기고 간 사람도 있었다는 걸요. 그림으로 나를 보여주고 그림으로 삶은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그는 지금도 혼자 제주에 머물고 있다. 서울의 가족과 떨어져 있지만 외롭지 않다. 그에게는 매일 아침 열리는 캔버스가 있고, 물감을 고르고 붓을 드는 일이 있다. 그 행위 자체가 삶이다.

 

강창열 화백은 오늘도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열린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는 말한다.

 

"예술은 쉽지 않지만,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강창열에게 '열린 시간'은 하나의 그림이자, 하나의 생이다. 이름보다 앞서는 색과 결, 경계 없는 여백. 그가 남긴 수많은 캔버스는 결국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름 너머의 삶, 말보다 깊은 이야기.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김영호 기자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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