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애' 관광지라 해서 왔는데 … 곳곳이 위험천만 장애물 투성이

  • 등록 2025.04.20 06:54:47
크게보기

[장애인의 날 기획] 장애인의 시선은 빠진 '무장애 관광' … 호텔부터 이동·재난·정보까지 '불편 일색'

 

10㎝가 넘는 단차가 있었고, 세면대는 앉은 키로 닿기 어려운 높이에 있었다. 침대는 낮고 불안정했다. 혼자서 씻고, 눕고,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휠체어를 탄 박창수(48)씨는 결국 가족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보낼 수 없는 상태로 여행의 시작부터 막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불편을 견디는 훈련 같습니다. 시설은 있지만 쓸 수는 없습니다."

 

이 호텔에 장애인 객실이 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법적으로 있는’ 수준이었다.

 

장애인 관광 전문 여행사 ‘휠체어투어’를 운영하는 전성환 대표는 기자에게 "지금 보신 게 바로 이 섬의 무장애 관광의 실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문서로는 장애인 객실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휠체어가 돌아가지도 못하는 좁은 구조에, 욕실과 세면대는 여전히 비장애인 기준으로만 설계돼 있어요. 행정 보고서에는 다 갖췄다고 하지만 정작 장애인 입장에서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실제 여행에서는 장애인이 덜 불편한 일반 객실을 눈치 보며 골라 쓰는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제주장애인인권포럼과 국가인권위 제주출장소가 도내 4성급 이상 호텔 37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장애인 객실 '설치율'은 88.2%였다. 그러나 ‘불편 없이 이용 가능한 객실 비율’은 79.2%로 낮아졌다.

 

일부 호텔은 "장기간 리모델링 중"이라며 객실을 아예 사용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고, "올해 예약은 마감됐다"는 이유로 접근조차 차단된 곳도 있었다.

 

<제이누리>가 직접 도내 주요 호텔 10곳에 장애인 객실 예약을 문의한 결과 절반 이상은 이용이 불가능했다. 제주에서 가장 높은 층수를 자랑하는 D호텔조차 장애인 객실이 없었고, 일부는 객실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거나 기본 편의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있지만 쓸 수 없는 방'에 불과했다. 지금의 제주 무장애 관광이 보여주는 현실이다.

 

 

대구에서 서예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정수(78)씨의 제주 '한 달 살이'는 막연한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됐다. 서귀포시 중문에 숙소를 잡고, 휠체어를 타고 바다를 따라 이어진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삶. 그게 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이누리>가 하루 동행한 그날, 김씨가 마주한 제주의 현실은 다르지 않았다. 도로와 건물, 카페와 관광지까지, 그의 여행은 ‘장애물 경기’에 가까웠다.

 

아침 햇살이 퍼지던 중문 해안도로. 김씨는 휠체어를 조심스레 굴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걷는 이들에겐 풍경이고 여유일 그 길은 휠체어 앞에서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보도블럭이 군데군데 솟아 있고, 경사로는 너무 가파르거나 미끄럽고, 휠체어가 그대로 도로로 튀어나갈 뻔한 적도 있어요.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정말 아찔했죠."

 

점심 무렵, 우리는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한 카페를 찾았다. 입구 앞에 계단 두 개. 김씨는 휠체어를 잠시 멈췄다가 결국 뒤로 돌렸다.

 

"경사로 하나만 있었어도, 바다 보면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었을 텐데요."

 

카페 직원은 "장애인 손님은 거의 없다"고 말하며 미안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 말은 오히려 김씨를 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오후에는 식사를 위해 한 현지 식당을 찾았다. 테이블 간격이 좁아 휠체어로는 진입이 어려웠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김씨는 입구에서 직원에게 메뉴판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키오스크 사용법 안내였다.

 

"글씨도 작고 손도 불편해서 누르기 힘들어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나왔죠. 배고픈 것도 서럽더라고요."

 

관광지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서귀포 외돌개 전망대.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던 김씨는 중간에서 멈춰섰다. 휠체어 경사로가 절반쯤 가다 끊겨 있었다.

 

"누구 도움 없이는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렵더군요. 전 그냥, 왔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해야 했어요."

 

그날 하루, 그의 휠체어는 제주 곳곳을 돌았지만 도착지마다 벽을 마주했다. '무장애 관광지'라는 말이 무색했다. 그의 말처럼 장애인은 제주에서도 여전히 이동권을 위해 싸워야 했다.

 

 

송창헌 제주도 관광약자접근성안내센터 사무국장은 "편의시설에 대한 시설 운영자들의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 등 편의증진법' 준수를 보다 실효성 있게 유도하려면 ‘제주도 건축물 허가 시 편의시설 설치 사항 검사 조례’를 개정하거나 별도의 조례를 제정해 정기적인 모니터링의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장애인 편의시설 전문 업체를 운영하는 김상민 대표는 더 날카로운 평가를 내놨다.

 

"법적으로는 출입구 폭, 회전 반경, 안전 손잡이 등 세부 기준이 다 나와 있지만 실제 시공 현장에서는 비용 문제로 '눈속임 공사'가 많습니다. 비장애인은 모르고, 장애인만 알아보는 차별이죠."

 

그는 "장애인을 위한 관광을 하겠다면 최소한 ‘쓸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는 그조차 안 되는 곳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숙박뿐 아니다. 제주의 무장애 인프라는 이동·재난 대응·정보 접근에서도 허점이 컸다. 도내 430곳의 민방위 대피소 중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곳은 88곳(2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계단이나 급경사로 구성돼 장애인은 스스로 대피조차 할 수 없는 구조였다.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리프트 버스나 특장 렌터카는 수요 대비 공급이 부족하고, 가격도 일반 차량의 2~3배에 달해 선택지가 줄어든다. 또 도가 자랑하는 관광 정보 앱 '안심제주'는 시각장애인 접근성이 크게 떨어졌다. 관광지와 호텔 내 점자안내판 설치율은 8.1%. 음성 안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시각장애인 관광객 김모씨(68)는 최근 가족과 함께 제주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런 말을 남겼다.

 

"무장애 관광이라고 해서 왔지만 결국 장애인이라는 사실만 다시 확인하고 돌아가는 여행이었어요. 머물 곳도, 갈 곳도, 이동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또 다른 관광객 이모씨(52)는 "이건 여행이 아니라 인내력 시험"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혜경 한국장애인개발원 정책연구부 부장은 "무장애 관광은 '편의시설이 있느냐'보다 '실제로 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며 "쓸 수 없는 시설은 없는 것보다 더 나쁘다. 기대하고 찾아온 이용자에게 '있는 줄 알았지만 못 썼던 경험'은 큰 상처를 남긴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형식적 기준이 아니라 사용자 발끝에 닿는 실질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김영호 기자 jnuri@jnuri.net
<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추천 반대
추천
1명
100%
반대
0명
0%

총 1명 참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노형5길 28(엘리시아아파트 상가빌딩 6층) | 전화 : 064)748-3883 | 팩스 : 064)748-3882 사업자등록번호 : 616-81-88659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제주 아-01032 | 등록년월일 : 2011.9.16 | ISSN : 2636-0071 제호 : 제이누리 2011년 11월2일 창간 | 발행/편집인 : 양성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성철 본지는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1 제이앤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nuri@j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