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사무원이 투표함을 열쇠로 봉인하고 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623/art_17489996644655_61a9c0.jpg)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지난 3일 오전 5시.
초여름의 선선한 공기 아래 제주시 삼도2동 제2투표소, 제주남초등학교에는 서서히 불이 들어왔다.
투표 사무원과 정당 참관인, 선거 관계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5시 30분이 되자 본격적인 투표 개시 준비가 시작됐다.
참관인을 대상으로 한 안내와 주의사항 전달, 투표지·도장·투표함 점검까지 모든 절차가 빈틈없이 이어졌고, 투표함 봉인 작업도 그 일부였다.
"이건 봉인함을 잠글 열쇠입니다.", "이건 투표함에 부착할 개폐 방지 스티커입니다."
투표 사무원은 준비물 하나하나를 직접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현장은 긴장 속에서도 질서와 투명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오전 5시 59분. 투표관리인의 개시 선서가 낭독되면서 제21대 대통령 선거의 본 투표가 시작됐다. 그러나 평온했던 분위기는 채 한 시간도 유지되지 않았다.
오전 6시 48분 한 남성 A씨가 삼도2동 제2투표소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시하며 투표를 시도했다.
그러나 선거인명부에는 이미 지난달 30일 사전투표를 마친 이력이 명확히 기재돼 있었다.
투표 사무원이 이를 설명하자 A씨는 "내가 한 게 아니다"라며 강하게 부인했고, 아무 말 없이 투표소를 빠져나갔다.
제주도선거관리위원회는 곧바로 A씨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비슷한 시각, 또 다른 남성 B씨 역시 지난달 29일 사전투표를 한 뒤 이날 오전 8시 무렵 다시 투표를 시도하다 적발됐다.
이들 모두 '사위(詐僞)의 방법으로 투표를 시도한 자'로 간주돼 수사를 받고 있다. 해당 혐의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오전 9시시 무렵 한 주취자가 자신의 투표장소가 아님에도 투표를 하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623/art_17489996632331_fca5d9.jpg)
오전 7시 30분 또 다른 소동이 일어났다.
한 중년 남성이 투표소에 들어오자마자 "국민의힘 참관인이 누구냐"고 날선 질문을 던졌다.
사무원이 "정당 소속은 안내해 드릴 수 없다"고 답하자 그는 "애새끼들만 앉혀놓고 정체도 안 밝히고 투표하게 만든다"며 고함을 질렀다.
뒤에 서 있던 유권자가 "빨리 좀 하자"고 말하자 "왜 욕하느냐"며 시비가 붙었고, 투표소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 남성은 투표를 마친 후에도 "부정선거다"라고 외치며 욕설을 내뱉고 투표소를 빠져나갔다.
오전 9시 무렵에는 술에 취한 남성이 나타났다. 자신의 주소지와 다른 투표소임에도 "왜 내 투표를 막느냐"며 고성을 질렀다.
투표 사무원이 투표소가 다르다는 설명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그는 "다들 나를 막으려는 것 아니냐"는 말만 반복했다.
이 소란은 30분 가까이 이어졌고, 결국 경찰이 출동해 현장을 정리했다.
![주취 소동을 일으킨 한 남성이 경찰에 제지를 받고 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623/art_17489996638792_abce78.jpg)
이러한 사건들이 잇달아 알려지면서 삼도2동 제2투표소에는 전국 각지의 언론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부 촬영이 제한된 상황임에도 일부 방송은 10분 이상, 많게는 30분 넘게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촬영했다.
한 선거사무원은 "여기가 투표소인지, 기자회견장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중앙선관위와 제주도선관위 관계자, 투표소 위원장까지 총출동해 상황 수습에 나섰지만 투표 업무는 이미 큰 지장을 받았다.
삼도2동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오전 10시 7분, 서귀포시 안덕면 서광동리복지회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도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60대 남성이 선거인명부 확인 작업이 지연되자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30대 선거사무원의 가슴을 밀치고 고성을 질렀다. 경찰은 이 남성을 현행범으로 체포했고,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인 지난 3일 오전 제주시 삼도1동 중앙초등학교 체육관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연합뉴스]](http://www.jnuri.net/data/photos/20250623/art_17489999010511_a68ce6.jpg)
이날 제주 곳곳의 투표소에서 벌어진 일들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이중투표 시도, 욕설, 주취자 소란, 폭행, 언론 취재 과열 등 선거는 더 이상 조용한 민주주의의 축제가 아닌 분노와 불신이 교차하는 사회적 충돌의 현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치 양극화는 이제 투표소 안까지 침투해 '신뢰의 기초'를 흔들고 있었다.
4일 오전 6시 21분 21대 대통령으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당선됐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축하가 아닌 과제다. 국민이 서로를 경계하고, 절차를 믿지 못하고, 상대 지지자를 적대하는 현실.
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다면 갈등은 정치에서 그치지 않고 삶의 곳곳에서 반복될 것이다. 투표장은 단순히 표를 던지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 거울이 보여준 풍경은 불신과 혐오였다. 이제 국민은 이재명 대통령이 그 거울 너머에 어떤 세상을 그릴 것인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