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다 사람 냄새 나는 편의점" ... 그가 프랜차이즈 철학을 바꾼다

  • 등록 2025.07.18 13: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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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산다] "점주 손 안 털고 성공할 수 있다" ... 박현수 레몬비 대표의 제주살이

 

여름 햇살이 퍼지는 제주시 아라동 첨단과학기술단지 한복판.


여러 사무건물들 사이 간판이 낯선 작은 편의점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레몬비'(Lemon B).

 

대형 프랜차이즈 편의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생소한 이름, 하지만 그 안의 풍경은 익숙하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상품, 조용히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그리고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

 

올해 53세인 박현수 레몬비 대표는 유치원 교사 출신 아내와 함께 제주에 살고 있다. 10년 연애 끝에 2022년 결혼했고, 아내는 오랜 기간 교직에 몸담다 그의 제안으로 제주로 내려와 지금은 레몬비 본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제주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는 주말 부부로 지내며 서울과 제주를 오갔지만 그는 '아내가 교사직을 내려놓고 제주로 내려와 준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함께 살아가고, 함께 회사를 꾸려가는 지금의 삶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든든한 기반이다.


프랜차이즈 편의점 브랜드 '레몬비'.

 

이름처럼 상큼하게 들리지만 그 안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안정적인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야 했던 씁쓸한 퇴사, 무급으로 시작한 배움의 시간, 외면과 묵살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사람'과 '신념'.

 

그에게 '레몬비'는 단지 브랜드 이름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자 철학 그 자체였다.

 

그는 2001년 유통 대기업에 입사해 전국 편의점을 오가며 가맹점의 운영 실태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는 당시 점주들의 어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꼈고, 그 괴리감이 결국 퇴사의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사람보다 회사 이익이 먼저인 구조가 제 가치를 부정하는 것 같았어요."


그는 본사와 매장 사이에서 갈등했다. 점주들이 수수료 부담과 적자로 힘들어하는 현실, 본사의 수익 위주 운영 구조, 수직적인 조직문화. 바꾸기 위해 제안을 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고, 어느 순간 자괴감에 빠졌다.

 

"점주와 대화하곤 사무실로 돌아와 무력감을 느끼는 일이 반복됐어요. 프랜차이즈는 점주와 함께 가야 한다고 믿었는데 회사는 그 목소리를 듣지 않더라고요."


퇴사 후 그는 다양한 길을 돌았다. 금융 자격증을 따고, 부동산 실무를 배우고, 공연 기획 현장에서 유명 가수의 전국투어 일부를 직접 맡기도 했다. 화려해 보이는 시절이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은 늘 편의점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미련이었죠. 내가 생각했던 제대로 된 프랜차이즈,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다시 돌아온 길. 이번엔 본인의 철학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1년간 무급으로 작은 개인 편의점 본사에서 일하며 현장부터 배웠다. 시스템, 발주, 물류까지 전부 처음부터 익혔다. 또 1년은 사업 파트너와 자금을 모으는 데 썼다.

 

"그때는 가진 것도 없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어요. 대신 부딪혔죠. 물건 옮기고, 엑셀 돌리고, 점주님들 말에 귀 기울이고."


그렇게 2013년 12월 6일 '주식회사 바구니'가 출범했다.

 


당시 편의점 업계는 '로열티 갑질', '해지 위약금', '24시간 영업 강요'로 점주들의 고통이 뉴스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박 대표는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로열티·관리비·해지 위약금 없는 시스템'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계했다. 점주 중심 모델은 그의 철학이자 업계의 흐름을 거스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회사 설립만으로 매장이 생기진 않았다. 고정비가 빠르게 바닥을 향하던 그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던 지인이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고, 매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 매장을 인수하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나 삼켰는데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하늘이 도왔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죠."

 

그렇게 시작된 '레몬비 1호점'은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던 '로열티·관리비·해지 위약금 없는 구조'를 현실로 만들었다. 가맹비는 낮추고, 인테리어 비용은 절반으로 줄였다. 본사가 오히려 점주에게 매월 8만원을 지원하는 역발상 시스템까지 도입했다.


영업시간도 점주의 자율에 맡겼다. 24시간 영업을 강요하지 않았고, 심야 시간이나 명절에는 매장 문을 닫을 수 있게 했다. 주말에도 쉴 수 있도록 운영 지침을 설정했다. '점주 중심'이라는 그의 시스템은 당시 편의점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기존 관행을 뒤흔들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시작된 레몬비 1호점은 당시 일 매출 15만원에 불과하던 매장이었지만 두 달 만에 130만원까지 끌어올렸다. 상품 구성부터 매대 배치, 손님과의 소통까지 전면적으로 손본 결과였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불과 34미터 앞에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섰고, 매출은 반 토막 났다. 그는 부푼 꿈을 안겨준 첫 매장의 지속 여부를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다시 일어설 기회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제주와의 인연은 스물네 살 청년의 간절한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대표님, 꼭 제주에 하나만 오픈해 주세요."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차례 걸려오는 전화에 그는 결국 마음을 움직였다. "이 정도로 간절하면 한번 내려가자." 그렇게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시 아라동에서 만난 청년과 그의 어머니의 설득, 낯선 섬에서의 첫 실험. 레몬비는 그렇게 제주에 첫발을 디뎠다. 

 

순탄할 것 같던 제주 상륙은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다시 위기를 맞았다. 관광객이 발길을 끊자 매출은 급감했고, 당시 제주에만 운영 중이던 90개 가까운 매장은 하나같이 직격탄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물류를 담당하던 협력 업체마저 버티지 못하고 부도를 내고 철수하면서 그는 또 한 번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서울 본사 직원을 한자리에 불러 "본사를 제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고 제주도에 물류센터를 직접 구축했다. 컨테이너 계약부터 발주 시스템까지 모든 걸 직접 배워야 했다.

 

"물류의 '물'자도 몰랐어요. 그런데 도와줄 사람도 없더라고요. 결국 직접 부딪혀서 하나하나 배웠습니다."

 

현재 레몬비는 제주에만 30여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단순히 수치만 보면 대기업 프랜차이즈에 비해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그는 확장보다 '신뢰'를 더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 가치에 따라 지난해 여름 이후 신규 가맹 상담을 전면 중단했다.

 

"물류 시스템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매장 수가 늘어도 점주님들에게 피해만 가요. 억지로 늘리다 무너지는 프랜차이즈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는 먼저 우선순위를 재정비했다. 기존 점주들과의 신뢰 회복, 물류 시스템 개편, 내부 교육 강화까지 모든 것을 다시 들여다봤다. 매장마다 상품 구성과 진열 기준, 가격 통일성 등 세부적인 부분을 손보고, 점주들이 각자 다른 경험을 하더라도 공통된 신뢰를 느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나갔다.

 

"본사가 끝까지 책임지는 구조. 그게 제가 생각하는 프랜차이즈입니다. 점주가 안심하고 가게를 열고, 운영하고, 상황에 따라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 그것이 제 경영 철학이에요."

 

그 사이 인수 제안도 적지 않았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유통 대기업들을 포함해 여러 곳에서 거액을 제시했다. 인수 후 합병, 시너지, 전국 확장이라는 그림을 그려보자는 제안이었지만 그는 모두 고사했다.

 

"그냥 돈 벌려고 이 회사를 시작했다면 진작 팔았죠. 하지만 레몬비는 제 철학이고, 점주님들과의 약속이에요. 거기엔 가격표를 붙일 수 없습니다. 제가 레몬비를 만든 이유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니까요."

 

 

그는 제주의 길을 내비게이션 없이 다니게 된 이유가 단지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어느새 마음이 그곳을 '집'이라 느끼게 되었고 몸이 먼저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길을 잃지 않으려는 감각보다 길 위에서 느끼는 편안함이 더 먼저 다가왔다.


중문 해수욕장, 북촌초의 잔디 운동장, 조용한 골목의 바람. 그는 제주의 일상에서 '두 번째 고향'의 감정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는 제주에 산다는 건 곧 배려라고 말한다. 관광객에게도, 이주민에게도, 그리고 제주에 사는 제 자신에게도 늘 먼저 다가가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틈날 때마다 마당의 풀을 뽑고, 가게 앞 쓰레기를 줍는다.

 

"손님들뿐만 아니라 관광객과 도민 모두 제주에 실망하지 않도록 제가 먼저 환경을 가꿔야죠."

 

그의 실천은 조용하지만 꾸준하다. 그 배려의 감각이 바로 그가 제주에 뿌리내린 방식이다.

 

레몬비의 목표는 단순한 수치가 아니다.

 

그는 '제주에서 가장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직원들에게 가장 많은 월급을 주고, 점주가 손해 보지 않는 구조를 완성하고 싶다고 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지금 함께하는 4명 직원들의 월급날, 통장에 찍히는 금액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의 '사람 중심' 철학은 지역 상생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제주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숙취해소음료 '벵주야'와도 협업하며 소규모 풀뿌리 브랜드의 유통 기회를 넓히는 데 힘쓰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납품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가치를 나누는 방식이다.

 

"제주에서 함께 사는 이상, 함께 잘 되는 길을 찾아야죠. 레몬비가 그런 플랫폼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합니다."

 

 

'레몬비'라는 브랜드 이름은 그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직접 지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점주님들께 비타민 한 알이 아니라 레몬 한 바구니를 드리고 싶었어요. 단순한 브랜드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약속이었죠."

 

이 이름에는 그가 바라는 편의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건강한 에너지를 나누는 곳. 가맹점주들에게 단기 이익이 아닌 지속 가능한 삶을 제공하겠다는 의지였다. '레몬'은 비타민C처럼 생기를 주는 상징이고, 'B'는 그 생기를 퍼뜨리는 매개체로서의 바구니 역할을 뜻했다.

 

그는 지금도 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초심을 떠올린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라고 돌아보지만 결국 답은 늘 같다. 점주님들과 함께 잘 살아보자는 마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단단했고,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돈보다 철학, 성장보다 신뢰, 성공보다 사람. 그는 오늘도 그 가치를 붙잡고 살아간다.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가치를 나누며 살 수 있다면 그게 성공 아닐까요? 제주는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곳이고, 레몬비는 그 가치를 실현하는 이름입니다."

 

그는 오늘도 '레몬비'라는 이름으로 배려의 편의점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길을 앞으로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제주 안에서만 머물 생각은 없습니다. 제주에서 제대로 된 모델을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전국 어디에서든 사람 중심의 프랜차이즈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언젠가 누군가 '편의점 하나 하려는데 어디 브랜드가 괜찮을까?'라고 물으면 누구나 '레몬비'라고 말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그는 오늘도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길을 걷는다. 탑차 뒷문을 열고 물건을 내리고, 점주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당의 풀을 손으로 뽑는다. 그 모든 일은 '편의점 프랜차이즈 운영'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싶은 가치를 살려내는 일이다.

 

레몬비는 단지 물건을 파는 편의점이 아니다. 신뢰가 쌓이고, 사람이 중심이 되며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약속'이다. 제주에서 시작된 이 편의점의 이름이, 언젠가 전국의 골목마다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자리하길 그는 꿈꾼다. 그 꿈은 조용하지만 누구보다 단단하다. [제이누리=김영호 기자] 

김영호 기자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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