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일행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 등록 2012.09.24 10:45:56
크게보기

17세기 제주 표착 네덜란드 선원들의 13년 대기록, 소설로 탄생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장편소설 '소설 하멜' ...무능한 조선 조정 비판

17세기에 제주에 표착, 조선 땅을 밟은 네덜란드 하멜 선원 일행의 13년간의 체류기가 소설로 나왔다.

 

현역 기자 생활을 54년간 해오고 있는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가 장편소설 '소설 하멜'을 펴냈다.

 

김영희 대기자는 1653년(효종 4년) 조선 땅에 표착한 파란 눈의 네덜란드 선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17세기 조선의 현실과 그 너머의 진실을 밝혀내는 데 주력한다.

 

하멜 일행이 거쳤던 제주, 강진, 여수, 나가사키, 암스테르담을 직접 다니며 취재하고, ‘하멜 표류기’와 17세기 조선, 중국, 일본의 역사에 관한 70권이 넘은 책들을 통해 얻은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 8년에 걸쳐 일궈낸 장편소설이다.

 

김영희 대기자는 1958년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 수석논설위원, 편집국장, 출판본부장, 뉴스위크 한국판 발행인 등을 지냈다.

 

현재 국제문제 대기자로 54년째 펜을 놓지 않고 있다. 그는 2003년 단편소설 '평화의 새벽'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현대사의 역사성을 기반으로 국제무대가 배경인 4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 바 있다. 이번에 세상에 내놓은 '소설 하멜' 역시 탁월한 국제 감각으로 17세기 조선 역사의 이면을 날카롭게 분석해 그 인식과 반성을 소설 속에 풀어내고 있다.

 

그는 17세기에 제주 해안에 표착한 36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을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기술과 지식을 알아보지 못했던 조선 국왕과 신료들의 역사의식 부재와 국제현실에 대한 몰이해를 생각하면, 하멜의 이야기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이며, “국가적인 기회 상실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한국인이 하멜의 이야기를 평정심을 갖고 읽기는 쉽지 않다. 조선 조정이 그들의 표착을 계기로 넓은 세상에 눈을 뜨고 미래를 준비했더라면 그 후 조선(한국)의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특히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관을 열어주고 왕성한 무역을 하고 때를 놓치지 않고 세계정세를 판독한 왜국(일본)과 조선을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운명이 17세기 나가사키에서 갈렸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고 말했다.

 

■ '소설 하멜'은?

 

'소설 하멜'은 1653년 조선 땅에 표착한 하멜과 네덜란드 선원들의 13년간의 조선 체류기를 담고 있다.

 

1653년(효종 4년), 조선의 국왕 효종과 신료들은 중국에서 명(明), 청(淸) 왕조의 교체가 끝났음에도 청나라를 치고 명나라를 일으켜 명나라에 입은 은혜를 갚고 삼전도의 굴욕을 설욕한다는 기치 아래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땅에 표착한 네덜란드 선원들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저마다 한 가지씩 전문 기술을 가진 네덜란드 선원들은 북벌을 위한 군비증강에 쓸모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조선 조정에서도 처음에는 그들을 훈련도감 소속으로 소총과 대포를 만들고 군장비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정은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임금을 호위하는데 장식품으로 동원되고, 호기심 많은 사대부들은 그들을 집으로 불러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푼돈을 던져주었다.

 

한편 조선 조정은 한양에 오는 청나라 사신들에게 선원들의 존재를 들킬까 전전긍긍했다.

 

그들의 기술로 병장기를 제작해 청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는 의심을 받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 선원 두 사람이 서대문 밖 홍제교에서 청나라 사신의 길을 가로막고 신분을 밝히고 구원을 요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천신만고 끝에 뇌물로 청나라 사신들의 입을 막은 뒤 조정은 선원들을 멀리 전라도 강진으로 보냈다.

 

그리고 몇 년 후 극심한 흉년과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자 그들을 내례포(여수)와 남원, 순천으로 분산 수용했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강진, 내례포, 남원, 순천의 병영에서 낮에는 풀을 뽑고 훈련장의 화살을 줍고 밤에는 새끼를 꼬는 노역을 해야 했다.

 

그것은 노예 생활이었다. 그들은 인간 대접을 못 받고 헐벗고 굶주렸다. 조선 여인들과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길렀지만 극빈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1666년 선원 중 8명이 내례포를 탈출해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에 도착했다.

 

하멜 일행의 눈에 비친 일본은 조선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조선 조정이 바깥세상을 외면하고 당쟁에만 몰두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은 네덜란드 상관을 창구로 활용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유럽과 동남아시아와 서반구(미주 대륙)에서 일어나는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사정을 때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그야말로 작은 서양이었다. 왜국 조정은 네덜란드 선원들에 대한 문제를 조선에 제기하고 결국 조선에 남아 있던 선원들마저도 나가사키를 거쳐 네덜란드로 귀국하게 된다.

 

청국의 조선 침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가선이 걸어온 인생역정이 하멜에게는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같이 들렸다.

 

사대모화(事大慕華)에 눈이 가려 바깥세상에 부는 도도한 변혁의 바람, 역사의 수레가 굴러가는 방향을 보지 못한 이 나라의 혼암(昏暗)한 군주는 나라와 백성을 온전히 바람 앞의 등불로 내어주었다.

 

기댈 곳을 잃은 조선의 민초들은 질풍노도로 달려드는 침략군 앞에 힘없이 꺾였다. 장가선도 그렇게 꺾이고 쓰러져 인간성 자체를 말살당한 한 포기 가련한 민초였다. (214쪽, 본문 중에서)

 


저자는 국제 감각이 전무한 혼암한 군주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장가선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드러낸다. 작가는 소설적 흥미를 위해 옛 지명이나 토속어 등을 활용해 당시대의 현장감이 느껴지는 묘사와, 연애소설 형식을 빌려 전개되는 스토리 구성으로 소설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탁월한 식견으로 17세기 국제정세를 파헤치는 한 저널리스트의 강건한 목소리가 압권이다. 그는 여러 가상 인물들의 입을 통해 국가 전략이나 비전이 없고, 한없이 무능하기만 했던 당시 국왕과 신료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더 나아가 20세기 벽두에 조선이 일본에 병탄당하는 운명은 이미 17세기 조선 국왕과 신료들의 무능함에 있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후금의 부상과 명의 쇠락 징후를 읽고 북방의 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균형 외교를 시도했지만 서인세력의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병자호란 후 심양으로 끌려가 서양 문물을 익히고 넓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귀국했지만 친청(親淸)으로 의심받고 독살당하고 마는 소현세자. 만약 이들이 17세기 조선을 이끌었다면, 그 후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작가는 이러한 인식과 반성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

 

인조와 그의 아들 효종은 조선 중기 최대, 최악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어떤 역사적인 교훈도 얻지 못했다. 선조에서 효종까지 조선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고통이다. 국왕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무능하고, 국제 감각이 없고, 역사의식이 없었던가. 그런 국왕들한테서 국가 전략이나 비전을 기대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연목구어,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잡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김영희, 「작가의 말」 중에서)

 

■ 책 속에서

 

쿵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 거대한 암초 같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용골이 부러져 두 토막 났다. 배가 귀신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아래 갑판에서는 파도 소리와 선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인간이 만든 정교한 구조물은 성난 자연의 위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동인도회사가 소유한 상선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스페르베르호의 비명 소리가 하멜의 심장에 꽂혔다. 갑판에 있던 선원들은 바다로, 시커먼 파도의 아가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멜은 갑판 위에 남은 선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건 운명과의 대결이다. 살아도 내 의지로 살고, 죽어도 내 의지로 죽자.(본문 49쪽)

 

조선 조정은 우리를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각자 가진 기술에 따라 무기의 제조와 개량, 화약 제조, 축성, 조선, 천문, 의술에 관련된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지금 우리는 모두 도감군의 군졸이 되어 고작 마을 순찰을 돌거나 임금님 행차에 호위병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기술과 상관없는 직무에 전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매일을 불만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갓집에 불려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얻는 푼돈이 없으면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고달픈 실정입니다. 이런 재능의 낭비가 또 있습니까. 조선 조정이 우리를 제주에서 한양으로 데려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이런 생활이 임금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본문 178~179쪽)

 

하지만 검모포진 수군부대 지휘관들은 한스 로스에게 선박건조의 일을 시킬 생각보다는 아란타와 유럽 이야기를 듣고 아란타 노래를 듣고 춤을 구경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런 일이 열흘 이상 계속되는 사이에 한스 로스는 수군부대 지휘관들이나 조선소의 조선공들이 아란타의 앞선 조선술을 배우는 데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걸 알고, 유형원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조선 기술을 이 사람들에게 못 가르쳐서 안달할 것 없이 되도록 편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부안을 떠날 행운이나 기다려보자고 마음을 정했다. 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안에서도 유형원이라는 선비 한 사람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제 발로 걸어온 한스 로스라는 스승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조선소의 수군 장교들이나 조선 기술자들은 나른하게 늘어진 자세로 그날그날 맡은 일을 하는 것 말고는 나라의 앞날도 조정의 북벌 계획에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스 로스는 탄식을 했다. 이놈의 나라에는 임금의 세상과 백성의 세상을 이어주는 줄도 없고 다리도 없어. 위아래 할 것 없이 혼곤한 잠에 빠져 있어. 그는 혀를 끌끌 찼다.(본문 252~253쪽)

 

하멜은 조선에서 야판이 물샐틈없는 쇄국을 하는 나라라고 들었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야판은 나가사키라는 작은 관문을 통해서 유럽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고 중국과도 활발한 무역을 하고 있었다. 하멜은 다시금 실감했다. 야판의 지도자들은 국제 감각이 뛰어나. 그들은 어떻게 야판을 부강한 나라를 만들것인가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이야. 하멜은 조선과 야판의 운명의 갈림길은 데지마라고 생각했다. 조선이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둠의 길을 가는 동안 야판이 밝음의 길을 가는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언젠가 조선은 아판에 의해 가혹한 시련을 맞을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에 하멜은 불안했다. 그래도 조선은 장가선의 나라요 돌선과 곧 태어날 우리 아이의 나라인 것을.(본문 448쪽)
 

 

■저자 김영희는? 1936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미국 조지메이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주리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컬럼비아대학교 언론대학원 국제보도과정을 수료했다. 1958년에 기자 생활을 시작하여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 수석논설위원, 편집국장, 출판본부장, 《뉴스위크》 한국판 발행인 등을 지냈다. 2012년 현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3년 단편소설 「평화의 새벽」으로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저서로 『워싱턴을 움직인 한국인들』(1980), 『페레스트로이카 소련기행』(1990),『마키아벨리의 충고』(2003) 등이 있다. 삼성 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홍현성 언론상, 한국언론학회상, 중앙대학 언론상, 한국 펜클럽 편집부문상 등을 수상했다.

 

 

임성준 기자 jun@jnuri.net
< 저작권자 © 제이누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원노형5길 28(엘리시아아파트 상가빌딩 6층) | 전화 : 064)748-3883 | 팩스 : 064)748-3882 사업자등록번호 : 616-81-88659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제주 아-01032 | 등록년월일 : 2011.9.16 | ISSN : 2636-0071 제호 : 제이누리 2011년 11월2일 창간 | 발행/편집인 : 양성철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성철 본지는 인터넷신문 윤리강령을 준수합니다 Copyright ⓒ 2011 제이앤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nuri@jnur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