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5 (목)

  • 구름많음동두천 -3.0℃
  • 맑음강릉 2.3℃
  • 구름조금서울 1.5℃
  • 구름많음대전 1.0℃
  • 흐림대구 2.3℃
  • 구름많음울산 3.5℃
  • 맑음광주 4.1℃
  • 구름많음부산 5.7℃
  • 구름많음고창 6.8℃
  • 구름많음제주 10.4℃
  • 구름조금강화 -2.5℃
  • 구름많음보은 -0.7℃
  • 흐림금산 0.0℃
  • 구름많음강진군 3.8℃
  • 흐림경주시 4.7℃
  • 흐림거제 5.8℃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낙빈왕(駱賓王 : 640-?)은 당대(唐代) 문학가이다. 일찍이 임해승(臨海丞)을 역임했다. 시문사부에 능했던 ‘초당사걸(初唐四傑)’ 중의 한 명이다. 후에 무측천(武則天)을 반대하며 서경업(徐敬業)이 기병하자 따랐는데 패전 후 행방불명됐다. 피살됐다고도 하고 출가해 승려가 됐다고 하는 등 아직까지 정론이 없다. 『낙빈왕문집』이 있다.

 

초당(初唐) 시단에서 낙빈왕은 창작구상이 능한 시인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변혁아이기도 하다. 천고에 이름을 떨친 『토무조격(討武曌檄)』을 썼다. 천여 년을 내려오면서 사람들은 그의 시문에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진 역사의 현안이 됐다.

 

낙빈왕은 중국 역사상 전기적인 인물이다. 일찍이 그는 자신의 시적 재능으로 유명한 ‘초당사걸 :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의 한 명이 됐다. 그러나 곡절이 많은 일생을 살았다. 여러 차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만년에는 무측천을 반대하는 서경업의 기병을 따라 전투에 참가했다.

 

문일다(聞一多)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한 잔의 흙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육척지고는 어디에 있는가?(一杯之土未乾,六尺之孤安在)’라고 소리 쳐서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대장부는 선천적으로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한 기골을 타고 났다. 정의를 쫓아 의로운 말을 하고 불의에 분개해 의연히 일어섰다. 복수하고 혁명하여 치정의 여인을 돌아서게 한 이, 바로 그다”라고 했다.

 

 

 

 

낙빈왕은 청소년기를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정관지치(貞觀之治)’ 시기에 보냈다. 그는 줄곧 초당(初唐) 시기의 성세를 잊지 못하면서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성격을 갖게 됐다. 그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빈한하고 출신성분이 낮았”으며 “청빈했고 큰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줄곧 자신의 견해를 견지했고 세도가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당 고종(高宗) 의봉(儀鳳) 3년(678)에 정사를 논하며 상소해 무측천의 노여움을 사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 그의 「재옥영선(在獄詠蟬)」은 감옥에서 매미소리를 듣고 시흥이 일어 매미를 빗대 자신을 노래했다. 이 시에는 억울함을 담고 있으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在獄詠蟬(재옥영선)

 

西路蟬聲唱(서노선성창) : 가을에 매미가 우니
南冠客思侵(남관객사침) : 죄인의 몸 향수에 젖는다.
那堪玄鬢影(나감현빈영) : 어찌 견디랴, 검은 머릿결에
來對白頭吟(내대백두음) : 백두음을 부르게 된 것을.
露重飛難進(노중비난진) : 이슬이 무거워 날아가기 어렵고
風多響易沉(풍다향역침) : 바람이 심해 소리가 쉬이 잠긴다.
無人信高潔(무인신고결) : 고결한 마음 믿어줄 사람 없으니
誰爲表予心(수위표여심) : 누가 나의 속마음 드러내 줄까.

 

이듬해 가을에 누명을 벗어 자유를 얻는다. 오래지 않아 예부상서 배행검(裵行儉)을 따라 정양(定襄, 현 산서 서북부)으로 종군한다. 조로(調露) 2년(680) 무슨 영문인지 임해현(臨海縣)에 현장으로 파견됐다. 그는 임해현에 도착하고 오래지 않아 관직을 사임하고 떠난다. 684년 초 낙빈왕은 장안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하자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같은 해 7월, 무측천이 이 씨 당 왕조를 찬위한 것을 반대하면서 서경업이 양주(揚州)에서 기병했다. 그때 낙빈왕도 양주에 있었다. 서경업의 ‘예문령(藝文令)’이란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군대의 문서를 관장하는 직책이었다. 이때 그는 강개하면서 격앙된 『도무조격』을 발표했다. 10월 서경업이 패배한 후 낙빈왕 등은 피살됐거나 자살했거나 숨어 버렸는데, 이에 대해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구당서』에서는 낙빈왕이 나중에 피살됐다고 기록돼 있다. 낙빈왕이 당 왕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낙빈왕이 어느 때 어디에서 피살됐는지 확실하게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당 왕조에 의해 주살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근거가 있다. 그의 『도무조격』은 일시에 세상에 알려져 세인들을 선동했다. 무측천이 “한 잔의 흙이 마르지도 않았는데 육척지고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구절을 읽고 놀라고 의아해 누가 썼느냐고 물었다. 낙빈왕이 한 것임을 알고 나서 “재상은 어찌 이런 인재를 잃으셨소!”라고 했다. 이는 격문이 무측천을 화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무측천의 황위를 동요케 했으니 무측천이 낙빈왕을 죽이려 했을 것은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낙빈왕이 반란군 장수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신당서․이훈전』부 「서경업전」을 보면 서경업과 부장 왕나상(王那相) 등이 정변이 실패한 후 해변으로 도망쳤다. 왕나상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업과 낙빈왕 등 25명을 죽이고 그들의 목을 낙양으로 가지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빈왕이 반란군 장수에게 살해됐다는 것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낙빈왕이 “경업과 양주에서 기병했으나 대패해 강에 투신했다”(『조야검재』)라고 한다. 이 설은 낙빈왕이 타살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말이 된다.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다. 송지문(宋之問)은 낙빈왕보다 열 몇 살이 어린데 무측천의 황궁에서 궁정시인으로 있었다. 그의 『제두학사심언문』에 “낙빈왕은 가족을 보호할 수 없어 모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낙빈왕은 다른 사람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미다.

 

낙빈왕이 살았을까? 죽었을까? 거사에 실패하자 서경업과 낙빈왕은 도망쳐 은거했다고 하기도 한다. 출가하여 스님이 됐다고 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낙빈왕은 거사가 실패한 후 타살이든 자살이든 분명 죽었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된다. 그런데도 서경업이 대패한 후 ‘不和去向’이라고 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고. 하지만 이 말은 증거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생각해 보자. 낙빈왕이 대패하여 서경업과 함께 해변으로 도망갔는데 어떻게 반란군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으며 당나라 군대의 포위를 뚫을 수 있었겠는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관련기사

더보기
93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